26화
그 상태로 한참을 대치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자리를 비워 주려고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여긴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복도의 끝이었다. 스태프 시절부터 종종 애용하던 장소였다. 인적이 드무니, 카메라도 없는 곳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입소하자마자 체크해서 장담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쉬는 걸로는 여기만 한 부근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뻘쭘한 그림이 이어졌다. 차라리 누구라도 지나가 줬으면…….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내가 몸을 물리려 드니 이정원이 손을 들었다. 애매하게 펴다 만 손끝을 보니 같은 심정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동작이었는데 상대방도 민망했는지 주춤거리며 발을 물렸다. 쌍으로 멍청해 보이는 광경이 만들어졌다. 당황스럽다 못해 낯부끄러워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큽."
…쟤 지금 웃은 거지? 친하진 않았지만, 처음 본 표정이었다. 민망함에 코끝을 긁다가 합리화했다. …아, 몰라. 이렇게 된 것, 그냥 쉬다가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도망치는 것도 난감했다. 애매하게 띄운 몸을 다시 의자에 앉혔다. 이제는 멀끔한 척하는 것도 소용이 없어 보였다.
"…괜찮으면 같이 앉으실래요."
"그래도 될까요?"
"저도 쉬다 가려는 거라 상관없어요."
내 말에 멈칫한 이정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지? …얘, 내가 생각한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나보다 더 당당해 보이는데 자기는 목격자다 이건가……?
어째 사람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긴 혼자 있을 땐 꽤 굳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딘가 저돌적인 부분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 지금 저 모습 같은 행동을 말하는 거였다.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걸음을 옮겼다.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서였다. 늘씬한 체구에 비해 키가 큰 편이었다. 눈대중으로 보기엔 나랑 비슷하려나.
그래서 그런지 보폭도 넓었다. 척척, 내디딘 지 얼마 안 돼 코앞에 다가왔다. 반대편에 앉은 이정원이 잔을 내려놨다.
최초 평가는 망했지만, 최종 평가에선 기량을 보인 인물이었다. 책정 순위는 26위로 B 등급까지 치고 올라왔다.
사실 그것도 가지고 있는 스탯에 대조하면 아쉬운 성적이었다. 내 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게 본실력일 것이다. 합이 안 맞는 무대로 인해 저평가된 케이스였다.
그나저나 김찬규랑은 왜 사이가 안 좋은 거지? 의문이 들었으나 티는 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불편한데 그건 더 불편해질 주제였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이정원을 쳐다봤다. 올라간 눈꼬리가 또렷한 관상이었다. …기존에도 이랬던가, 기억에 혼돈이 찾아왔다.
규격 외로 단호한 성향인데 둘 다 겪어 보니 어째 반대쪽이 더 약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긴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신해신 연습생 맞으시죠?"
"예? 예… 맞는데요."
이정원이 나를 알고 있어서 눈치를 보며 힐끔거렸다. 가만히 주시하는 게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태도였다. 어째 좀 심상치 않지……?
문득 알고 있던 멘토 몇이 떠올랐다. 유독 기가 강한 성향들이었다. 얘한테서 그 사람들과 같은 냄새가 났다. 이정원… 그쪽이랑 동류였구나.
"…이정원 연습생이시죠."
"저를 아세요?"
"…노래 잘 부르시잖아요."
같은 팀원 때문에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눈에 띄어서 꼼꼼하게 지켜본 과거가 있었다. 이쪽이 을의 입장인 게 아니었나?
어디 가서 쉽게 져 줄 위인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냥 연습실에서 쉴걸. 커피 냄새가 날까 봐 나온 곳이었다. 오늘도 후회했지만, 딱히 소용은 없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아, 네."
……생긴 것보다 더 뻔뻔한걸. 어떻게 돼먹은 성격인 거지…. 두고 볼까 싶어서 모르는 척을 했다. 프로그램 내에서는 처음 만난 동갑이었다. 원래 내 나이보단 어리겠지만 물리적으로는 또래였다.
"혹시 몇 살이세요?"
"…22살입니다."
"저도 22살인데, 동갑이네요?"
"…그러게요. 반가워요."
주객전도라는 건 이런 것을 뜻하는 걸까. 분명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질문을 받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단정한 용모가 믿음이 가는 이미지였다.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평가까지만 해도 건조한 인상이었다. 말도 없고, 허들이 높은 스타일로 파악했다.
그런데 내 예측이 빗나간 것 같았다. 할 말 다 하는 데다, 초면인 사람도 잘 휘어잡았다. 됨됨이 자체는 괜찮아 보였지만 직선적이다.
지금 보니 그리 순한 눈매도 아닌 것 같았다. 내 기억이 미화된 게 틀림없었다. 상황이 만들어 낸 착각이었다.
"저희, 말 편하게 할래요?"
당장의 대사만 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제대로 헛발질했네. 그래도 여러모로 찾기 힘든 범주의 연습생이었다. 개인으로 튀는 인물은 아니었는데 실력은 좋은 편이었다.
일단 관계만 개척해 놓을까……? 김찬규와 이정원, 가운데에만 안 끼면 될 것 같았다. 물론 양쪽 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친해질 마음도 없었다.
"…그래."
"앞으로도 종종 인사하자."
"응."
어디 가서 바가지당할 성격은 아니었다. 도대체 초반에는 왜 그런 거야? 의혹을 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득을 챙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실력자와는 안면을 터 놓고 보는 거였다. 탈 수 있는지 모르겠는 버스의 등장이었다. 못 타면 버스가 아닌데……?
그냥 의구심은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휴식도 못 취했는데, 무언가를 얻어 갔다고 하기도 애매한 만남이었다. 하여간에 특이한 애들이 널려 있는 듯했다. 이렇게 모은 제작진도 대단했다.
* * *
고생 끝에 돌아온 숙소였다. 피로에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문고리가 싸늘한 게 식은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내가 마지막인가……? 하긴 주변에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열자 깜깜한 어둠만이 나를 반겼다. 복도의 형광등 불빛에 의지해 시야를 확인했다. 같은 방을 쓰는 연습생들은 모두 잠이 든 듯 고요한 상태였다.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으로 인원을 체크하던 중이었다. …하는 수 없지. 조용히 자리를 찾아가 캐리어 속에서 짐만 챙겨 빠져나왔다.
공용 욕실로 가야겠는데……. 한적하다 못해 서늘한 건물의 복도를 걸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취침 준비를 하고 와야 할 것 같았다.
방에 붙은 화장실을 애용하는 탓에, 평소에는 잘 이용하지 않던 장소였다. 어색함에 두리번거리다가 문을 열고 커튼을 옆으로 치웠다. 대중목욕탕도 잘 안 가는데……. 알 수 없는 민망함에 얼른 씻고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어?"
"…아, 안녕하세요."
각오를 다지기가 무섭게 낯익은 인영과 마주친 상황이었다. 얘도 막 씻으려고 했는지 티셔츠를 벗고 있었다. …더럽더라도 씻지 말고 그냥 잘 걸 그랬나.
"…형네 방도 지금 전부 자고 있어요?"
"…네, 제가 마지막으로 들어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쪽으로 왔어요. 방 화장실 쓰면 모두 깰 것 같아서요."
"…저랑 비슷하시네요."
"…그래도 다른 팀원들은 괜찮은 것 같네요. …저희만 여기 있는 거 보니까요."
"…그러게요. 아까 확인했는데, 샤워실 안에도 사람이 없더라고요."
"아… 그래요? …그, 그럼 널널하겠어요……."
"…네, 아마도."
시선을 피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인물은 같은 팀이자 내가 많은 걸 맡기고 있는 문채민이었다. 안 그래도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벌써 숨 막히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는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곤 손을 들어 먼저 가보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 얼른 가주라. 여기도 불편해……. 나 역시도 말릴 생각이 없어 고개를 끄덕거리며 문채민을 보냈다.
다신 여기 안 와야지. 문채민이 사라진 샤워실의 유리문을 바라봤다.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을 끌며 늦게 들어가서 마주칠 일을 최소화시킬 예정이었다.
아, 힘들어……. 어째 씻는 것까지 순탄하지 못한 프로그램 같았다. 물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내젓고는 캐비닛 앞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 * *
모처럼 3시 전에는 잘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여러 일들이 겹쳐 이번에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느 시점부터 대기하고 있던 나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들어간 시기에 반해 무척이나 빠르게 씻고 나와 배려해 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기, 형.'
'…네?'
'저는 다 씻어서요……. 준비하시느라 바쁘셨던 것 같은데…….'
'…네, 짐 정리하느라 좀 늦어졌네요.'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네. 잘 자고 이따 만나요.'
어색한 몸짓으로 다시 마주친 문채민은 인사를 한 뒤 눈을 피했다. 나는 그에 맞춰 바통터치 하듯이 빠르게 샤워실에 걸어 들어갔다.
축축한 머리카락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수건 한 장 툭 얹고 사라졌다. 이럴 때는 남자 고등학생다운 털털함이 엿보였다.
아니지, 나 때문에 머리도 못 말리고 돌아갔을 확률이 높았다. 미안하지만 어색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뒤통수를 긁적이며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이미 새벽 4시에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씻고 나가면 부지런한 연습생들은 벌써 기상을 하고 있을 일이었다. 망했네. 애매하게 자고 일어날 바에는, 밤샘을 하는 게 현명해 보였다. 그래서 그냥 시원하게 안 잤다.
"…사람 살려."
구내식당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씻은 지 얼마 안 된 편이라 뽀송한 외관과 달리 얼굴만큼은 참담한 상태로 보였다.
몰려오는 피로에 양손을 들어 턱 밑에 받치곤 먼 산을 바라봤다. 창밖의 하늘은 따듯해진 계절에 맞춰 푸르스름한 색상을 띄고 있었다.
…이거 진짜 누굴 위한 참가인 거지. 오늘도 거하게 찾아온 현타였다.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어느덧 완전한 아침이 되어 있었다. 기절할 것 같은 상태로 식사를 위해 들어오는 연습생들을 지켜봤다,
하는 수 없지……. 마른세수를 하며 배식을 받는 인파에 다가가 줄을 섰다. 오늘부터 어제 정한 사안을 맞춰 나가야 했다.
주변을 파악하며 본경연에서 제 역량을 펼쳐야 했다. 몸이 3개는 더 필요한 시점이었다. 부족한 수면에 하품이 쏟아졌다.
그래서 밥이라도 제때 챙겨 먹기로 했다. 체감상 몸무게가 2kg은 빠진 느낌이었다. 구내식당에서 고봉밥을 쌓아 왔다. 얼굴이 핼쑥하다며 민심을 얻은 덕분이었다.
널찍한 자리를 찾아내곤 젓가락질을 시작하려던 무렵이었다. 머리 위로 시끄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형, 치사해요. 절 버리고 먼저 밥 먹으러 오다니……! 그리고 어제 몇 시에 들어오신 거예요? 못 보고 잤는데 아침에 눈 뜨니까 없잖아요~"
"…어, 좀 늦게 들어갔는데, 일찍 일어났……."
…저게 뭐지? 내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건가 헷갈렸다. 젓가락을 든 채 멈춰 있으니 권혜성이 제 식판을 내려놓으며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