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형? 여보세요~ 해신이 형~"
"……."
[확률 성장 트리]
미개화: ??? ???(??)
무거운 눈꺼풀 위로 손을 올렸다. 몇 번을 비벼 봐도 변한 건 없었다. 잠이 싹 달아난 것 같았다. 권혜성의 스탯 창 위로 이상한 게 올라가 있었다. 이전에는 없던 흔적이었다. 제발 그만하면 안 될까…….
처음 보는 이야기에 머리가 복잡했다. 사방이 물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 이쯤 되니 상태 창에게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알 수 없는 장치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형? 진짜 왜 그러세요?"
이것도 시스템 돋보기의 영향 같았다. 구매할 때 본 적 있는 부분이었다. …아, 괜히 썼어. 참고로 이런 건 모르는 게 약이었다.
서둘러 아이템 창을 확인해 봤다. 예측대로 사용 중이라는 설명만 떠올랐다. 진짜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새벽녘의 열정이 전부 씻겨 내려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밥이나 먹자."
이건 아무것도 아니여야 했다. 아니, 뭔가 문제가 있더라도 무시할 생각이었다. …나, 난 못 본 거야. 그래, 잠깐 졸아서 꿈을 꾼 거지, 하하. 그냥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런 것까지 신경 쓰고 싶진 않았다. 멀쩡한 척 식사를 시작하려고 하니 권혜성이 내 식판을 바라보며 신기해했다. 평소 내 양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나저나 형 오늘 엄청 많이 받으셨네요? 그거 다 드실 수 있으세요?"
"…좀 힘들 것 같기는 한데. 혜성아, 너 밥 두 그릇 먹지. 다음 배식받지 말고 이것 좀 가져갈래? 아직 손 안 댔거든."
"네! 그렇죠. 뭐~ 이거 맛있는데 저 하나 더 가져가도 돼요?"
"…응, 너 다 가져가."
"해신이 형, 짱! 오늘도 정말 멋지십니다."
"먹는 것 하나로 이런 말도 해주는 구나……."
널찍한 자리에 앉아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사전부터 깨끗한 수저를 이용해 밥을 옮겨 줬다. 많이 먹고 시스템 좀 내 앞에서 치워 줘. 약간의 염원도 담긴 동작이었다. 그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안 봐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도 합석합니다."
"엇, 유준이 형, 잘 잤어요?"
"평소랑 비슷하게 잤지. 근데 형은 오늘 못 잤어요? 얼굴이……. 혜성아, 무슨 일 있었어?"
"음, 아뇨……! 그건 아닌데 해신이 형이 좀 늦게 들어왔거든요."
늦게 아니야, 안 들어간 거야……. 속마음으로 정정해준 사실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대꾸할 힘도 없었다. 무기력하게 밥을 먹으니 이유준에게서 걱정 어린 잔소리가 들려왔다.
"혜성이한테 그런 말 들었을 정도면 무리한 것 같은데, 형, 몸 좀 챙기세요."
"그 정돈 아닌데……."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겉으로는 모범 답안을 꺼내며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려댔다.
대답하면서도 쉼 없이 입에 밥을 밀어 넣었다. 진짜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심경이었다. 그래도 신경 써주는 애인데, 얼굴은 마주 봐야 할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들어 올려 이유준을 바라봤다.
"오늘 배고팠어요?"
"…푸흡!"
"으악! 해신이 형!"
"……."
몇 번 씹지도 못했는데 깔끔하게 뿜어낸 상황이었다. 서둘러 손을 들고 막아 봤지만, 딱히 소용은 없어 보였다. 이유준이 제 어깨에 묻은 밥풀을 떼어 냈다.
저런… 뭐라고 사과해야 하는 거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어 이성적인 판단이 들지 않았다. 잠시 이곳에는 침묵이 오가고 있었다. 몇 초 정도겠지만 내게는 1시간 같은 텀이었다.
"진짜 미안해……."
"…괜찮아요. 천천히 드세요."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는 이유준이었다. 쟤가 저러니까 더 무서워.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렸다. 그에 권혜성이 휴지를 뜯어 건네줬다. 열이 오를 정도로 화끈거리는 얼굴이었다.
뻘쭘하고, 숨 막히고, 여기서 탈출하고 싶고, 쓰리 콤보였다. 내 인권은 어디로 간 거야…….
이유준이 본인 몫의 물컵을 내밀어 줬다. 얌전히 받아 들며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저건 또 뭔가 싶었다. 아까부터 내가 하는 말은 '저게 뭐야'밖에 없는 듯했다.
[확률 성장 트리]
미개화: ???? ????(??)
…이유준, 너도 있었구나. …이젠 정말 모르겠다. 단호한 속마음과 달리 밥맛은 떨어져만 갔다.
* * *
"…와, 형 얼굴 장난 없어요."
"…그렇게 심해?"
멀거니 질린 안색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식사를 멈췄다. 지금 삼키면 더 큰 참사가 일어날 것 같았다. 배식해 주신 분들께는 마음속으로 사죄했다.
정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것만 반복했다. 다 때려치우고 싶었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책임져야 할 게 있었다. 그래서 둘과 헤어져 연습실로 향했다.
"괜찮겠어요? 얼굴이……."
"괜찮다니까. 그냥 좀 체해서 그래."
"먹은 것도 없잖아요."
"정 안 좋으면 소화제 받으러 갈게. 둘 다 고생해, 난 가 본다."
"…형!"
경연이 코앞에 있었다. 그래서 발을 멈춘 애들을 뒤로하고 몸을 움직였다. 쟤네도 연습이 급하니까 안 보이면 각자 할 일을 할 것이다. 대충 손을 휘적거리며 인사했다. 뭐가 됐든 당첨금을 돌려받아야 했다.
정 안 될 것 같아도 1차 미션까지는 마무리 지어야 했다. 시스템은 그냥 넘겨 버린 상황이었다. 저것까지 신경 쓴다면 과부하에 걸릴 상태였다. 무시하고 있다는 게 정답이었다.
복도를 거닐며 아까의 일들을 정리해나갔다. 그나저나 한 번에 두 개는 좀 너무한 거 아닐까……? 상태 창을 향해 조용히 건의해 봤다. 물론 들려오는 답변은 전혀 없었다.
알려진 건 아무것도 없는 수상한 멘트로 보였다. 얼마 전부터 일어난 연쇄적인 문제였다. 내 것도 감당이 안 되는데, 다른 것까지 목격한 일이었다. 체력적인 피곤함에 정신적인 대미지가 겹쳐 왔다. …진짜 관두고 싶어. 안 그래도 난 근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실 적힌 내용부터가 내 것과는 많이 다르게 생겼다. 그래서 더 유추하기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음, 도와주는 건 오지랖이지. 이건 정이 든 것과 별개의 일이었다. 현명하게 굴어야 한다며 이마를 긁적였다.
안 그래도 잘하는 인물들인데, 좋은 게 있으면 더 난감할 것 같았다. 미안하다, 혜성아, 유준아. 우리 알아서 해결하자. 세상은 혼자 사는 거였다.
"그냥 신경 쓰지 말아야지. 난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시야에는 반투명한 홀로그램이 떠다니고 있었다. 날 왜 여기에 끌어들인 걸까……? 점점 시스템의 목적이 궁금해졌다. 솔직하게 말하면 사기꾼 같은 거였지만……. 그렇게 의미 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죽였다.
일단 나는 멀티가 안 되는 편이었다. 방법은 이것뿐이라며 입가를 매만졌다. …웃자. 그대로 손가락을 끌어 올렸다. 먹고살면서 느낀 점이었다. 자고로 약점은 보여 주지 말아야지. 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팀에 합류했다. 카메라 앞에서 짓던 무해한 인상이었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제가 많이 늦었나요?"
"아니에요~ 아직 안 온 애들도 있어요."
일찌감치 도착해 있던 팀원이 반겨 줬다. 피곤한 건 같을 텐데 여전히 활발했다. 체력이 참 좋네…. 남은 인원이 올 때까지 대기하며 스트레칭했다. 어제 하던 연습을 이어 가기 위함이었다.
"안무, 여기서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좋아요. 흐음… 근데 이게 좀 걱정되긴 하네요. 잘 받을 수 있을까요."
문채민의 리드로 댄서 포지션이 움직였다. 최영서라고 했나, 자기소개를 하며 들은 이름이 떠올랐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다람쥐처럼 생긴 사람이었다. 몸집이 작아서 그런지 날렵한 춤 선이 포인트였다.
지금 저건 메인으로 계획해 둔 동작 중 하나였다. 실수가 있으면 안 되겠다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초반부를 제외하면 나름 순탄한 과정이었다. 이제 좀 해 볼 만한 조건이 만들어졌다.
"꼭 받아야 해요. 담당 파트라 스포트라이트가 쏠릴 거예요."
"으, 한번 해 볼게요."
준비할 게 한둘이 아닌 것 같았다. 프로그램 상주 작곡가에게 편곡 계획을 설명했다. 그에 맞춰 나온 음원을 들었다. 거기서 또 안무까지 재정비했다.
첫 무대인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겨야 했다. 뭐가 됐든 여기에 사활을 건 연습생들이었다. 이래저래 신경 쓸 게 참 많이 있었다. 필요한 의상과 소품 관련 정보도 전달해 놨다.
새로 꾸린 동선은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다. 내가 제시한 아이디어였지만 살짝은 난처할 정도로 어려웠다. 입 밖으론 꺼내지 않은 채 열심히 따라서 췄다. 밤샘 연습만이 정답이었다.
"다 맞추기 전까지 절대로 안 잘 거예요."
"그 소리는 우리도 못 잔다는 거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연습생들이었다. 사방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체력이 떨어짐에는 장사가 없는 듯했다. 같이 땀을 식히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마침 의견 조율이 되지 않는 팀도 있다고 들었다.
거기선 다툼이 발생했다고 소문이 났다. 우리는 아주 양반이었구나……. 그나저나 요즘에는 김찬규도 조용했다. 원래 나쁜 애는 아니었지만, 적응이 된 건지 별 탈이 없었다.
여태까지의 미묘한 흐름이 방송될 것 같진 않았다. 냉전에 고생 중일 사람들에겐 미안했지만,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했다.
"상대 팀은 잘되고 있을까요?"
"우정환이 있으니까 잘하고 있겠죠. 걔가 유별나서 그렇지, 머리는 잘 쓰거든요. 게다가 명이 형의 존재감이 적지 않아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채민의 신랄하다 못해 냉정한 평가가 떨어졌다. 전부터 친하다 싶었는데, 오래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윤명과도 대화를 나눈 전적이 있었나 보다. 신기한 관계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질문한 팀원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문채민이 투덜거리는 장면을 처음 봐서 그런 거였다. 이럴 때 보면 얘도 고등학생 같았다. 가끔 잊어버리곤 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마저 연습할까요! 상대 팀이 잘하고 있다니까 뭔가 더 힘내야 할 것 같아요."
딱딱해도 리더의 말은 모두 정답이었다. 상대 팀에는 유리한 선곡에, 브레인으로 추정되는 멤버가 있었다. 거기에 실력이 보증된 상위 순위 윤명이 걸렸다. 전력으로 붙어도 결과가 유추되지 않았다.
"좋아! 해 보자!"
지쳐 있던 분위기가 단박에 끌어올려졌다. 우물쭈물하는 성향 때문에 그렇지, 노력하는 건 전부 똑같았다. 한번 해 보자…….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일념이었다.
관절을 두들기며 몸을 일으켰다. 전신에서 찌뿌둥한 통증이 느껴졌다. 우득, 기지개를 켜면 뼈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이건 건강과 별개의 일이었다. 아, 삭신아…….
"형, 부러진 건 아니죠?"
"…아마 아닐걸요?"
"아직 20대 초반이잖아요! 운동 좀 해요!"
"…하긴 하는데."
"알고 보면 허당이라니까… 내 첫인상 돌려줘요."
"…그걸 왜 저한테 찾으세요."
바로 옆에선 화기애애한 타박이 쏟아졌다. 일단 내 이미지는 친근한 쪽으로 굳어진 것 같았다. 그게 무서운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작게 대꾸하며 정해진 대형에 서 있었다.
녹화를 떠나 기본적으로 못된 사람이 없었다. 하긴, 내 기준에선 악인이 더 드문 편이었다. …성선설을 너무 믿고 있나?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