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거기다 여긴 보는 눈이 사방 천지에 깔려 있었다. 이건 곧 새어 나가는 말도 많다는 뜻이었다. 탈락한다 한들 소문이 빠른 업계였다.
아이돌이 꿈일 테니, 데뷔하고 싶으면 조신하게 있어야 했다. 결론적으로는 바보 같아도 착하게 사는 게 옳은 길이었다.
거기에, 최전선에는 남현욱과 윤희경이 존재했다. 업계 내에서도 무서운 촉을 지닌 상사들이었다. 문제가 있는 연습생은 사전부터 그 선에서 걸러졌을 것이다. 제작진도 시사 면은 별로 안 좋아하던 게 떠올랐다. 그걸로 일이 생기면 뒤처리가 엄청나게 힘든 편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오늘도 일찍 들어가기는 무리인 것 같았다. 퇴소하면 잠만 자겠다고 다짐했다.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아이돌이란 건 정말 대단한 거였다.
* * *
정신없이 연습에만 매달린 며칠이었다. 최종 점검일인 날이 찾아왔다. 정보 유출을 막고자 했던 건지, 초반과 달리 블라인드 테스트였다.
커다란 대기실에 모여 앉아선 한 팀씩 방 안으로 사라지는 걸 구경했다. 말이 비밀이지, 결과는 표정들로 유추할 수 있었다.
혹평받은 연습생들은 죽상을 하고 나왔다. 숨기려는 것 맞아? 모르는 게 이상할 수준이었다. 가만히 다음 타자를 지켜봤다.
마침 상대 팀이 평가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큰 덩치의 윤명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아무래도 우리가 다음 순서인 것 같았다.
"저기 어떤 식으로 했을 것 같아요?"
"센터는 명이 형이 분명하고, 곡 분위기를 많이 바꾸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워낙 원곡이랑 음색이 잘 어울려서요."
"역시 그러려나."
문채민과는 오랜 이야기를 나눴다. 미션 곡을 제외한 오피셜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친분이 있었던 얘는 대강 파악한 그림이었다. 주저 없이 말하는 것에서 확신까지 느껴졌다.
다른 팀원들이 동조하듯 눈을 빛냈다. 자판기남의 실력은 모두가 알아줬나 보다. 남에 대한 건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쓸데없이 타격만 입고 싶진 않았다.
무던하게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의 김찬규를 목격했다. 덩치는 큰데, 내용물은 영 무르네. …하긴, 내가 할 말은 아니지. 아무리 봐도 얘가 이정원보다 연약한 것 같았다.
예전의 차가움은 그저 본능적인 생존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가만히 평가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얼마 안 돼서 트레픽 연습생이 방을 나왔다.
"얼티밋 나인(Ultimate'9) - Devastating Love 팀 준비해 주세요."
…뭔 생각 중인 거지, 쟤. 윤명은 디폴트가 멍한 타입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랑말랑한 얼굴이었다.
그 뒤로 나오는 멤버들을 쳐다봤다. 험악하진 않은 게 괜찮은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앞서 걷고 있던 트레픽 연습생이 윤명에게 장난을 걸었다. 이름이 우정환이랬나? 과연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긴장하지 말고, 하던 것처럼 하면 돼요."
다독임을 들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의 눈길이 우리에게 쏠렸다. 뭐가 됐든 저번보단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그걸로 만족하자며 정신을 집중했다.
최종 등급 평가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책상 앞엔 멘토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한 명씩 입장한 후 대형에 맞춰 정렬했다. 실력파인 앞 팀 덕분에 그리 험악한 낯들은 아니었다.
"여기가 Devastating Love 팀이죠."
"네! 맞습니다."
"저번에 서계현 멘토님한테 혼났다고 들었는데, 이젠 자신 있어요?"
"넵! 그렇습니다."
"좋아요. 그럼 준비합시다."
백승준의 말에 최영서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호기로운 외침에 서계현이 우리를 바라봤다. 저 멘트도 앞뒤 맥락이 맞지 않았다.
우리 팀이 아니더라도 돌려 사용했을 대본이었다. 그날 혼나지 않은 팀은 없는 걸로 알고 있었다. 시트콤 같은 광경에 긴장이 싹 다 풀려 버렸다.
다른 멘토들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여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형을 잡으며 정해진 위치에 맞춰 섰다. 편곡으로 바뀐 인트로가 나오고 있었다. 뭐든 되는 대로 하는 게 정석인 과정이었다.
* * *
최종 점검은 그럭저럭 무사통과를 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의 매뉴얼이란 게 정해진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울리는 걸 찾아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냈다. 예의상 해 주는 건지 헷갈려서 미소 지었다.
그래도 호응해 주는 원겸을 보니,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봐주는 척했지만, 실상은 아주 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진심이라고 믿고 싶어졌다. 망하지는 않겠다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정말 연습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 탑승을 위해 줄지어 서 있었다. 개인 물품을 챙기느라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가만히 머리를 비우고 그들을 기다렸다.
아직은 싸늘한 새벽 공기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밤하늘을 쳐다봤다. 도심이라 그런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풍경이었다. 먼 곳의 네온사인이 서울이란 사실을 깨닫게 해 줬다.
"늦어서 죄송해요!"
"얼른 와~!"
"이제 다 나온 거죠?"
"네! 그럼 버스 탈까요?"
지쳤음에도 제법 활기찬 팀원들이었다. 작게 끄덕이고는 몸을 물려서 버스에 탑승했다.
숙소로 들어가면 3시도 넘을 새벽이었다. 방향을 틀어 창가를 바라봤다. 지친 마음에 쓰러지듯 반대편으로 몸을 기댔다.
창문에 머리를 박고 가만히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아까 너무 오버한 게 아닐까 싶은 수준이었다.
"죽겠다……."
"지금 몇 시야?"
"3시 넘은 것 같은데?"
"우와, 3시래… 들어가면 4시간은 잘 수 있겠지……?"
"가자마자 바로 잠들면?"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 있었는데, 그분들은 밤새우는 걸까?"
"곧 나올걸. 연습실 마감 시간 다 됐잖아."
저 앞에선 큰 목소리로 별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기운이 없는 게 모두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다. 체력이 바닥나 잠이 든 척 눈을 감았다.
열의가 사라지자 재만 남아 있었다. 시야가 차단되기 전 마지막으로 상태 창을 확인했다.
평소와는 코인 캐기의 속도부터 다르다는 걸 느꼈다. 지갑 사정이 아주 궁핍했다. 예전과 비교하자면 할 말이 많았다.
동일 시간을 연습하면 두 배 가까운 비용을 벌었었다. 숫자로 기재된 시스템 머니가 참담했다. 버그 어쩌고 했던 게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 계속 이어진다면 등가교환 서비스에 손을 대야 했다.
초반부에 1억을 맞바꿨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정말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었다. 또 그런 손실을 겪어야 했다.
허탈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돌려받겠다고 도전한 건 좋았다. 근데 잘못했다간 당첨금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잖아. 시스템, 너 진짜 너무하다……. 조용히 정신을 다잡으며 결심했다. 내 건강을 갈아서라도 직접 벌기로 했다. 여기서 더 힘드나 덜 힘드나 비슷할 것 같았다.
* * *
막바지였던 탓에 바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성장 트리는 그냥 제쳐 뒀다고 봐야 했다. 저것만 보면 속이 별로 안 좋았다.
그래서 변화만 체크하며 무대에 집중했다. 연관성을 찾으려 들다가는 밤을 새워도 모자랐다. 나는 말 그대로 포기가 빠른 사람이었다. 수긍까지 잘해서 시스템을 따르고 있었다.
코인을 반 토막으로 캐서 허전한 주머니 사정이었다. 노동의 수치에 비해 적은 보상이 이어졌다. 이거 원, 구멍 난 장독대에 물을 들이붓는 격이었다. 콩쥐한테는 두꺼비라도 있었지, 내게는 나 자신밖에 없었다.
이런 것까지 빈털터리 인생이라 자신이 불쌍했다. 그래서 그냥 안 보이는 척 무시했다. 남들은 이런 걸 현실 도피라고 말했다. 모든 건 내 위장과 정신 건강을 위해서였다.
뭐가 됐든, 우리 팀엔 훌륭한 리더가 하나 있었다. 전체적인 총괄의 문채민이었다. 아직 내가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하늘은 모두에게 공정한 법이지. 저당 잡힌 돈만 빼면 좋은 인복이었다. …하지만 돈을 돌려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대망의 본경연 전날이 다가왔다. 침대에 누워 고민했던 걸 되짚었다. 가벼운 사정이라지만 피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아이템을 구매하기로 결단 내렸다.
[절대음감 실로폰 - 일회성 아이템]
버프: 정확한 음정을 맞출 수 있습니다.
BOX 상점에서 몇 안 되는 살 만한 금액대였다. 솔직히 이 코인이면 스킬을 뽑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효과가 바로 나올 리는 없었다.
거기에 스탯을 올리자니 해금법에 소요할 일정이 모자랐다. 무엇보다 한 단계 올라간다고 시선을 끌 것 같지는 않았다. 문채민이라는 강자가 같은 팀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랩 스탯이 높은 타입인데, 뒤에 붙는 싸비 파트를 불러야 했다. 처음에는 좋았으나, 나중에는 부담스러워졌다. 또 잘못 골랐어. 쟤랑은 조금 떨어진 곳을 택해야 했다.
괜히 나댔다가 고생을 배로 하고 있었다. 신해신 이 멍청아, 왜 이러고 살아……. 비교라도 피하자. 목표가 정해졌다.
그래서 단타에 가장 큰 효과를 찾고 싶었다. 수능 100일 남기고 1등급을 노리는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해 보기는 해야 했다.
['절대음감 실로폰'을 구입합니다.]
[아이템 보관함에 '절대음감 실로폰'이 저장되었습니다.]
[현재 쿠폰]
0매
[현재 코인]
2,205 코인
역시 밑 빠진 장독대였다니까. 죽도록 연습한 것에 비해 벌이가 적긴 했다. 고작 700코인으로 줄어 버린 소지 금액이었다. 장비빨이라도 타야지.
눈물을 머금으며 아이템 보관함을 바라봤다. 나는 장인이 아니었으니 도구라도 가려야 했다. 1차 배틀이 당장인 지점이었다. 긴장으로 잠들지 못할 밤이었다.
* * *
"와, 형네 팀은 의상이 화려하네요?"
"어, 왔어?"
"네, 노래 어려운 것 하던데, 기대할게요."
메인 스테이지 뒤의 분장실이었다. 의자에 앉아 낯선 손길을 받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한쪽 눈을 떠 버렸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은 이유준이었다. 본인 팀원들은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지. 강심장이라며 담력만큼은 인정해 줬다.
평소보다 화사한 차림새가 잘 어울렸다. 지금까지 저런 애랑 붙어 다녔던 건가?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싶었다.
퇴소해도 당분간은 댓글을 읽지 말자고 다짐했다. 왠지 모르게 계속 비교가 됐을 느낌이었다. 외모 얘기를 들을 건 알았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차이가 컸다. 난 분명 상처받는다……. 이렇게 생겨서 죄송합니다……. 벌써 대미지가 있었다.
"…유준이 형, 오랜만."
"아, 채민아……. 오랜만이야."
옆자리의 문채민이었다. 메이크업을 다 받았는지 일어나고 있었다. 어색하게 인사하는 게 남이 봐도 숨 막혔다. 조금 전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어쩐지 양쪽 다 언급이 적다 싶었지……. 안면이 있는 사이치고는, 서로를 거론하지 않았다. 유추해 보건대, 이유준은 트레픽 애들과 어색한 관계였다. 과거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 봐선 친분이 있다고 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