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구내식당을 이용하던 저녁 시간의 일이었다. 연습 중간에 있는 식사라 팀원끼리 밥을 먹었다. 왁자지껄한 소음을 느끼며 젓가락질했다.
자리에 앉아 있으니 상대 팀의 우정환이 다가왔다. 제 무리를 버려 두고 혼자 온 낌새였는데, 이내 문채민에게 헤드록을 걸며 장난을 쳐 왔다.
가만 있다 봉변을 당한 문채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아질까 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뭐야. 저리 가서 밥이나 먹어.'
'채민이는 너무 무뚝뚝해~'
'왜 갑자기 와서 난리인데, 뭐 잘못 먹었냐.'
'혈중 문채민 농도가 부족해서 왔지. 우리 팀은 너무 조용하단 말이야.'
'…너 때문에 안 그럴 것 같은데.'
'음, 이게 그리웠다니까?'
끼면 절대로 피곤할 것 같은 대화였다. 그래서 아예 벗어나기로 했다. 다른 팀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다들 눈치를 보며 의자를 뒤로 물렸다.
슬며시 식판을 정리하던 와중이었다. 일어나다 말고 멀찌감치 서 있는 이유준을 발견했다. 인사라도 할까 싶어 손을 들려던 찰나였다.
트레픽 이인방을 본 이유준이 고개를 틀어 버렸다. 어딘지 평소와는 다른 무표정한 인상이었다.
그때의 회상을 접으며 눈앞을 바라봤다. 미묘한 침묵이 장내에 감돌았다. 어색함에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준아, 너 오늘 멋있다. 무대 힘내."
"…고맙습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적당히 잘해줘. 너무 잘하면 내가 손해였다. 불편함에 몸서리치며 어깨를 툭 쳐 줬다. 이제 슬슬 너희 팀으로 돌아가란 의미였다. 리허설을 해야 한다며 인사하곤 몸을 돌렸다.
"저희도 들어갈까요."
"네."
문채민과 대화하며 대기실로 이동했다. 먼저 끝낸 팀원들이 모여 있던 장소였다. 입실하자마자 몇 명과 눈이 마주쳤다.
밝은 성격들답게 입에서 바른 칭찬이 터져 나왔다. …사회생활 좀 할 줄 아네. 소속사에서 교육을 잘 받은 모양이었다.
"둘 다 잘 어울린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다들 멋있네요."
여기도 카메라가 있었다. 좋은 말에는 좋은 말로 화답해 줘야 했다. 정해진 소파에 자리를 깔았다. 해당 순서까진 여유가 있는 일정이었다.
주변을 훑어보다 맞은편에 붙은 대형 거울을 발견했다. 어딘가 어색한 모습의 세팅이었다.
생전 입을 일이 없던 옷이기에 민망한 기분까지 들었다. 타이 없이 단추를 푼 턱시도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의 반이 넘어가 허전한 이마를 매만졌다.
"다들 지금까지 연습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채민아, 왜 벌써 마무리 멘트 해?"
"맞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런가요?"
타이와 베스트를 착용한 문채민이었다. 모두를 둘러보고 분위기를 정리했다. 가만 보니 어디 잘나가는 도련님 같기도 했다. 정확한 발음과 뛰어난 리듬감이 장점인 래퍼였다.
선이 그어진 듯 칼 같은 게 본인과 아주 잘 어울렸다. 과연 프로그램 내 인기 멤버 같은 외관이었다. 뭐가 됐든 관심도 높은 무대가 만들어질 것이다.
"오늘 한번 재밌게 무대 해 봐요!"
"아자! 파이팅!"
"…열심히 해요."
"찬규야, 기합이 작다!"
흥분한 팀원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귀가 아팠으나 태연한 척 가만있었다. 반대편 의자에 앉아 있던 김찬규도 입을 열었다. 개과천선이 저런 걸까.
본 무대 전 김찬규가 많은 고민을 떠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버스를 타고 돌아갈 때면 혼자 앉아 창밖만 바라보던 인물이었다. 이정원과 관련된 사건인 건 분명한데, 거기서 분노보다는 슬픔이 느껴졌다.
아니, 그걸 떠나 김찬규는 상대방을 신경 쓰고 있었다. 배척하는 게 아닌, 좋아하고 잘 따르는 사람에 대한 감정 같았다.
생각해 보면 얘도 아직은 어린애였다. 컨트롤이 되지 않으면 가장 괴로워 할 당사자란 뜻이었다. 팀원들에게도 보인 태도도 공격적인 것보다는 체념으로 인한 반사작용처럼 느껴졌다.
그걸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어느 순간 다른 연습생들도 김찬규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어색해하는 애를 두고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풀고 연습을 이어 나갔다.
거기서 얘는 뭔가를 깨닫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색하게나마 조금씩 모두에게 마음을 열었다. 원래도 연습 자체는 성실하게 참여하던 인물이었다.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담담한 안색을 보여줬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지켜봤다. 더는 걱정할 게 없다며 안도하곤 마지막 무대를 준비했다. 사실 날을 너무 세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짜깁기로 왕따설도 돌 수 있는 게 이런 프로그램이었다.
게다가 같은 곳을 목표로 고생했다. 이 나이대에선 친해질 수밖에 없는 루틴이었다. 청춘인가, 꼰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웃으며 턱을 괴곤, 티가 나지 않게 아이템 보관함을 불러냈다.
청춘은 청춘이고, 내가 돈 쓴 건 돈 쓴 거였다. 흑역사만큼은 꼭 방지해야 했다. 조용히 구매해 둔 아이콘들을 터치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일단 먼저 살고 볼게. 서바이벌에서 생존은 각자 하는 거였다.
* * *
당신의 아이돌 시즌 2는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남자 연습생이라는 시도가 색다르게 느껴졌다. 거기에 유례없는 높은 퀄리티가 관심을 끌었다.
K-POP 팬들은 이에 집중해 보고자 했다. 서바이벌이라는 소재는 아주 자극적이었다. 기피하는 자가 있더라도 궁금해지는 매력이 있었다.
그것 때문일까, 방청 현장은 열기로 뜨거웠다. 1화가 방영되지 않았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테마곡 무대와 연습생 프로필이 공개된 이후였다.
커뮤니티에서는 매일같이 공방이 이어졌다. 그로 인한 화력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침부터 방송국 앞이 팬들로 북적거렸다. 슬로건 등 자체 굿즈가 현장 여기저기 배부됐다. 리허설이 끝났을 무렵 팬들의 입장이 시작됐다.
"대충 하고 오니까 편하네."
"좋겠다. 여유로워서?"
"너도 탈케 하든가."
우리는 K-POP 팬덤 실친이었다. 근래 최애가 공계에서 럽스타그램을 했다.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아 부정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내, 불타 버린 재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이건 괘씸죄였다. 그래, 연애는 할 수 있지… 그래도 좀 안 들키려는 성의라도 보이든가. 그걸 공계에서 티 내? 어지간한 사건에는 단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큰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오만 정이 식어 탈케이팝을 시도했다. 구 최애가 나를 갓반인의 삶으로 이끌어 줬다.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참 고맙다, 개X끼야. 예쁜 사랑 하세요. 백년해로하는지 두고 보마.
그렇게 덕질도 접고, 티위터도 끊으며 다짐한 찰나였다. 옆의 친구가 유어돌 테마곡의 스트리밍을 봐 버렸다. 천년 픽을 찾았다며 난리 치던 과거였다.
그러다 친구에게 부탁받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동행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첨되는 게 쉽지도 않았으니 농담 삼아 허락했다. 안 될 거라는 보장하에 뱉어 버린 실언이었다.
"이게 진짜 되네……."
"이미 늦었어. 네가 되면 같이 와 준다고 했잖아."
한번 쏟은 물잔은 되돌아가지 않았다. 덕분에 나도 방송국행에 동참해야 했다. 좋아하는 연습생이 있다고 하니 봐준 찰나였다. 전 본진의 굿즈 폐기까지 도와준 친구였다.
투닥거려도 있는 고생 없는 고생 나눠 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정말 마지막 K-POP이라고 다짐했다.
더는 비공굿을 봐도 심장이 뛰지 않았다. 침착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간결한 소지품인 게 신선할 따름이었다.
바리바리 짐 덩어리가 없어 가벼운 몸이었다. 운동화를 신은 발끝을 쳐다봤다. 이것도 더는 못 할 경험이었다.
"난 이미 이 판 뜬 사람이야. 양심이 있으면 영업은 하지 말자."
"너 진짜 독하다. 탈케 그거, 가능한 거야?"
"넌 불가능할 듯. 카드값 내려면 퇴사하기 글렀다?"
"배신자야! 영케라며! 영원히 케이팝이라며!"
"그냥 갈까?"
"…얌전히 있겠습니다."
대기 시간을 기다리며 무대를 지켜봤다. 식은 사람이 봤을 때도 큰 팬덤을 형성한 것 같았다. 확실히 이번 시즌의 퀄리티가 남다르긴 했다. 엔넷이 사활을 걸었다며 모두가 말해 왔다. 제작비 괜찮은 거야?
남의 일인 걸 생각하니 시큰둥해졌다. 시큐의 눈을 피할 일도 없어 여유로웠다. 픽을 가진 친구만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저게 바로 업보지. 내 과거는 되돌아볼 마음이 없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장내가 어두워졌다. 시작할 기미였다. 조명에 불이 들어오며 고우림이 걸어 나왔다. 제작비의 큰 부분을 차지했을 인물의 등장이었다.
주변에선 알게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잘생기긴 잘생겼네……. 그동안 팠던 그룹들과 다른 외형이었다.
"용케도 섭외했네."
"왜 고우림은 아이돌 안 하지?"
"너 최애 따로 있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하긴, 나도 온 김에 얼굴 구경이나 해야겠다."
"배우로 갈아타게?"
"여기 떴다니까. 그만 집착해."
카메라의 빨간불이 켜졌다. 고우림이 그에 맞춰 인사를 했다. 큐 카드를 쥔 손을 다루는 게 아주 능숙해 보였다. 간혹 나오던 인터뷰에서도 입담이 장난 없던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마스터 여러분. 저는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 편의 대표를 맡은 배우 고우림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장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환호와 비명도 함께 있었다. 팬들이 원하는 게 어떤 건지 아는 것 같았다. 해당 판에서도 유명한 PD의 꼼수였다.
"오늘은 감춰져 있던 연습생들의 첫 번째 경연이 있는 날입니다. 우선 마스터 여러분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경연의 주제를 공개하겠습니다. 이번 무대는 바로 그룹 배틀입니다."
시즌 1 때와 같은 미션이었다. 친구는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시에는 나도 케이팝을 좋아했다. 여돌이라 방청은 가지 않았지만, 시청은 한 편이었다. 티위터 트렌드에 자주 올라간 프로그램이었다.
알기 싫어도 알아서 정보가 들어왔다. 그룹 배틀이라면 꽤 난감한 주제였다. 과정과 무대가 전부 험난했다. 이번에도 같은 걸 반복하다니. 방송 자체는 흥미진진할 게 분명했다. 물론 난 안 볼 거니까 상관없었다.
"연습생들은 현재 활동 중인 K-POP의 자랑스러운 선배 그룹 곡을 커버합니다. 두 개의 팀은 하나의 그룹을 선정하여 각각 다른 곡의 무대로 대결을 펼칠 예정이며, 승리한 팀에게는 스페셜 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스터님들께서는 두 팀의 무대를 보고 더 잘했다고 생각되는 팀의 버튼을 눌러 주시면 되겠습니다.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한 팀에게도 별도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많은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제 첫 경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 지금 바로 도약합니다!"
사방이 어두워지며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됐다. 사전에 정해진 순서가 있었나 보다. 낯선 얼굴의 연습생들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관련 팬들만 난리가 난 광경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게 긴장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친구의 픽은 없는 팀이었다. 평탄한 심경으로 구경할 수 있었다. 뭐가 됐든 일찍 귀가할 생각만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