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반복된 박자에 맞춰 품 안에 안기면 돼
Do you want to dance with me
That's all I wanna do
- (I Wanna Be With You)
(I Wanna Play for you)
허스키한 음색이 힘을 받으며 하이라이트에 도달했다. 그리고 하늘에선 금색 종이 가루가 뿌려졌다. 배경 스크린의 오페라관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규격 외로 순탄하게 꽂혀 드는 보컬이었다. 음정도 잘 맞추고 라이브가 좋았다. 어딘지 현역처럼 보이는 무대였다. 연습생이라고 하기에는 훌륭한 퀄리티였다. 쟤가 일반인이라는 게 신기했다.
- 새하얀 너를 물들여
이게 바로 널 사랑하는 나의 방식
Devastating Love!
고개를 튼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양 사이드 스크린에 잡혀 나온 장면이었다. 풀어 헤친 단추 사이로 목덜미가 움직였다.
체격 때문인지 도드라진 핏대였다. 찡그린 미간이 종이 틈으로 드러났다. 사나운 눈매가 진지하게 반짝거렸다.
- 나와 함께해
이 엔딩의 끝은 영원이야
- 절대 놓지 않겠어
Always for you
도입부와 같은 목소리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황금색 오페라관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자세를 취한 채로 셔츠 아래의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한쪽 손에는 반가면을 움켜쥔 상태였다. 종이 가루가 빛에 붉게 물들어 번쩍거렸다. 그걸 끝으로 무대가 다시 까맣게 암전됐다.
방청석은 온통 난리였다. 확실히 잘하는 사람들이었다며 박수를 쳤다. 지루할 틈이 없었던 4분이었다. 이거 이길 수도 있겠는데? 상대 팀이던 친구의 최애가 떠올라 옆을 돌아봤다.
"뭐야, 미친……."
"야, 이거 얘기해도 되냐?"
"…아니, 하지 마."
전세 역전이었다. 공연 전의 멘트를 반대로 하고 있었다. 작은 해프닝에 웃음이 터졌다. 윤명을 응원하던 친구는 머리를 싸맸다. 순탄하게 승리할 줄 알았던 앞의 팀이었다.
그런데 후발 주자가 강한 임팩트를 남겨 큰일이었다. 너 망한 것 같은데… 이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재밌었던 무대를 다시 한번 곱씹었다.
"이 팀 세네. 예상 외의 반전 같은 느낌?"
"아무 말도 하지 말랬잖아……."
"윤명 얘긴 안 했어."
"아, 존나 너무해……."
"탈케 친구 데려온 게 더 너무하네요."
"근데 그런 것치곤 너, 집중하더라?"
"음… 뭐……."
처음에는 너무 어려운 곡을 뽑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기기 힘들겠다며 지켜봤다. 상대 팀에는 이미 인지도 있는 윤명이 존재했다.
그 외에도 실력자가 많이 깔렸다며 혀를 찼다. 선곡부터 상대 팀을 위한 판이라고 외쳤다. 그런데 그것보다 흥미진진한 무대가 나왔다.
원곡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좋은 소화력이었다. 장점만 잘 수납했다며 즐겁게 봤다. 곡 내 서사도 잘 쌓아 놨다. 과몰입러들이 만족할 요소였다.
조금 더 두고 볼까……. 문득 다음 행보가 궁금해졌다. 입덕은 아니었다. 그냥 정말로 궁금한 마음, 딱 그 정도였다. 친구에게는 비밀로 하자며 말을 아꼈다.
* * *
백스테이지로 내려갔다. 아직은 얼떨떨했다. 인트로가 나오는 순간부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동안의 과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맞다, 나 진짜 고생했지. 어쩐지 진이 빠진 기분이었다. 팀원 전원은 숨을 고르며 헐떡이고 있었다.
문채민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무대를 바라봤다. 어딘지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 같았다. 드디어 하나 끝냈다.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당장으로선 내 몫은 해냈다는 게 가장 큰 위안이었다. 저당금을 신경 쓸 정신조차 없었다. 나 저거 받으려고 나온 건데,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우리 잘한 것 맞죠? 우와!"
"함성 봐. 미쳤나 봐……!"
아이템의 영향이 굉장했다. 여태까지 했던 것 중에서 최고로 능숙하게 움직였다. 표정, 안무, 제스처 무엇 하나 막힘없이 튀어나왔다.
직접 무대를 펼친 자신도 놀랄 수준이었다. 평소보다 고음이 쉽게 뻗어 나왔다. 정확한 음정에 맞춰 목소리가 들어갔다.
스탯보다 좋은 실력을 발휘했다고 생각했다. 비싼 데는 이유가 있었구나. 아주 조금만 이해해 주기로 했다. BOX 상점 안에는 구매했던 상품이 비어 있었다.
재구매는 불가능한 루틴인 것 같았다. 정이 참 없어 보였다. 하긴, 남의 돈 뺏어 가는 것부터 정상적인 사고는 아니었다.
"얼티밋 나인(Ultimate'9) 팀, 무대로 올라가실게요!"
스탠바이 하고 있던 'BEAT ON!' 팀이었다. 돌아보는 게 불편해 시선을 피했다. 인사를 위해 이동할 시간이었다.
반은 들떠 있었고, 반은 상기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문채민은 후자에 속한 편이었다. 이럴 때는 제 나이 같은 행동을 했다.
"…형."
"네?"
"너무 재밌었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터무니없는 대화였다. 하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니 몇백 명의 방청객이 앞에 있었다. 아까는 눈치채지 못한 인파였다.
우리를 보고 환호하는 것에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별다른 대화 없이 웃으며 무마했다. 보다 못한 고우림이 멘트를 이어 갔다. 연예인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정말 멋진 무대였죠? 'BEAT ON!'을 한 팀, 비트 팝과 'Devastating Love'를 한 팀, 피에스타분들을 무대 위로 모셨습니다. 다시 한번 우레와 같은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비명이었다. 그저 눈만 깜빡이며 인근을 훑어봤다.
"이제 마스터 여러분께서는 두 팀 중 더 잘했다고 생각하는 팀을 향해 투표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팀 비트 팝은 왼쪽 버튼, 팀 피에스타는 오른쪽 버튼입니다."
양측의 멤버들이 다양한 리액션을 선보였다. 저게 그 팬 서비스인 모양이었다. 나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소심하게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작게 움직이기만 해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건 처음인데…….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눈을 굴렸다. 일단은 최선을 다해서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걸 끝으로 다시 무대에서 내려갔다. 다음 촬영을 위해 이동해야 한다며 안내받았다. 무대에 대한 점수가 드러날 차례였다.
* * *
먼저 내려와 있던 윤명네 팀이었다. 말을 꺼내기 민망한 상황이었다. 평소에는 잘만 주절거리던 애들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낯을 가렸다.
상대 팀의 우정환이 문채민에게 말을 걸었다. 예전부터 장난치길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 옆으론 윤명이 쫓아 붙었다. 안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안 덥냐."
"채민아, 왜 이렇게 잘했냐."
"내 말은 무시하네……."
"잘할 수 있다더니 진짜였어. 아, 뒤통수 얼얼하다고."
"난 처음부터 말했어, 자신 있다고."
"매정도 해라. 친구야, 조금만 살살 해 줘."
"됐으니까 전력으로 덤벼."
"역시 승부욕의 화신 문채민, 이래야 너답지."
쟤를 보니 어딘가에 있을 권혜성이 떠올랐다. 다른 방향이긴 해도 유형 자체는 비슷했다. 일단 둘이 친한 건 알고 있었다. 친화력이 좋은 게 전형적인 인사이더였다.
하지만 저 대화 속에는 가시가 들어 있었다. 같은 소속사 동료임을 떠나 들춰 보는 기색이었다. 문채민도 그걸 눈치챈 것 같았다.
장난으로 넘기면서도 눈에서 레이저가 나왔다. 살벌도 해라……. 그 용호상박에 기가 약한 몇 명이 시선을 돌렸다.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나도 좀 배우고 싶어졌다.
"피에스타 짱! 아, 물론 저희 비트 팝도 짱입니다."
"우정환, 이미 늦었다."
"맞아~ 우우~."
"무대 멋있었어요! 비트 팝 최고~"
"맞아요. 편곡이랑 연출 둘 다 밝은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살랑살랑~ 예쁜 느낌!"
"에이, 또 그렇게 말해 주면 내가 기분 좋은 건 어떻게 알고. 그렇지, 명이 형?"
"…응."
셔츠 차림의 윤명이 한 마디 얹었다. 멍한 표정은 여전했는데, 그래도 눈은 조금 빛나는 것 같았다. 확실히 무대 위에서 살아나는 스타일이었다.
평소에도 무기력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저것도 능력이다 싶어 신기하게 여겨졌다.
다른 걸 떠나서도 동일한 연습생 신분이었다. 서로를 치하하며 훈훈한 장면을 이어 나갔다. 얘네… 카메라에 적응 완료한 것 같네?
그동안의 눈칫밥 덕분인지 분위기 파악이 빨라졌다. 이러면 나야 좀 더 편할 일이었다. 문제는 없겠다 싶어 정면을 봤다.
잡다한 생각을 이어 가며 걸음을 옮겼다. 제작진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방이었다. 의자에 앉자 모니터에 불이 들어왔다.
실시간으로 집계된 현황이었다. 실수 없이 해냈으니 미련은 없었다.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이자며 집중했다. 사실 경쟁 팀이 너무 강했다. 그래서 현재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후회해 봤자 내 속만 쓰릴 일이지.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보상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배틀에서 승리한 팀에겐 팀 무대 PR 영상 공개권을 드립니다. 해당 영상은 애플리케이션을 포함한 모든 공식 사이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이거였구나. 본방송 전에 무대 PR을 할 수 있었다. 이건 아주 큰 혜택이었다. 초반부는 스포일러도 제재할 무렵이었다. 다음 시즌을 생각해 보면 검열이 있을 기간이었다.
멤버의 직접 홍보는 타이밍 좋은 아이템이었다. 의상과 메이크업까지 풀로 갖춘 영상이었다.
강한 인상을 주는 게 가능할 느낌이었다. 캡처되면 커뮤니티도 돌 수 있었다. 팬을 만드는 것까지 이어질 찬스였다.
"와. 보상 엄청나게 크다!"
"후… 떨리네요."
소곤거리는 팀원들을 뒤로하고 제작진을 바라봤다. 여기 말고도 다른 보상이 존재했던 걸 기억했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팀에게도 무언가 주어졌다.
성향을 보면 그게 더 큰 것일 거다. 실질적인 혜택은 전체를 통틀어 톱에만 주어졌다.
서바이벌 방송에선 암묵적인 룰이었다. 쟤네도 힘겹게 상대했는데 1등이라… 그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팀도 잘했지만 타고난 인지도는 이기기 힘든 부분이었다. 관객석에 유독 많이 보이던 이름들이 존재했다. 그 연습생들이 있는 곳이 1등을 할 확률이 높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체 팀 중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한 팀에게도 엄청난 보상이 주어집니다."
"바로 팀원 전체 스페셜 베네핏. 각 1만 표씩이 부여됩니다."
"1만 표요?"
"대박, 1만? 1만?"
"헉… 대박 크다……."
…이럴 줄 알았지. 이걸 얻는 팀이 순위 발표식에서 유리했다. 1만 표라면 탈락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을 양이었다. 순위가 높더라도 인지도가 약하면 단비인 보상이었다.
그냥 무사히 끝낸 걸로도 만족하자. 가만히 화면만 바라봤다. 큰 욕심은 없는 편이었다.
"그러면 곧바로 얼티밋 나인(Ultimate'9) 두 팀의 배틀 결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 비트 팝 < BEAT ON! > VS 피에스타 < Devastating Love > ]
[ 271 : 314 ]
"1차 그룹 배틀의 승리자는 팀 피에스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우와악!"
"…우리 이겼어요? 진짜로?"
…진짜? 우리가 이겼다고? 근소한 차이지만 윤명네와의 무대에서 승리했다. 상대방은 좀 강한 상대가 아니었는데, 이겼다는 걸 들으니 마냥 놀라웠다.
그래서 어떤 결과도 담담히 받아들이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때마침, 시선이 마주친 윤명이었다. 가볍되 예의를 차려 인사해 줬다.
평소와 똑같은 얼굴인 걸 보니 타격은 별로 없는 듯했다. 얘도 안 그러는 척하면서 무적의 정신력을 갖고 있었다. 아닌가……? 대놓고 그랬나? 하여간에 구분이 안 되는 타입이었다.
씁쓸한 얼굴의 연습생들도 이내 미소 지었다. 축하해 주는 뉘앙스를 풍겼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저게 전부일 일이었다.
속에선 불이 나도 적당히 갈무리할 줄 알아야 했다. 애매할 땐 그냥 순하게 구는 게 최고인 프로그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