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저희 이겼어요!"
"엇… 네. 그러게요."
등 뒤에서 누군가 덮치듯이 매달려왔다. 묵직한 체중에 뒤를 돌아봤다. 평소와 달리 문채민이 상기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보다는 작았지만, 성장기의 남자애였다. 기우뚱 기울어진 몸을 다리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다시 고개를 돌려 모두를 훑어봤다.
승리에 대한 기쁨으로 환희에 찬 광경이었다. 어른스럽게 굴어서 그렇지, 아직 애들이 맞긴 했다. 손을 뻗어 앞에 있던 팀원의 등을 토닥여줬다.
이 모습에 다른 인물들이 엉겨 붙듯 뭉쳐 왔다. 무겁고 더웠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은 느낌이었다. 적어도 다른 애들한테 폐는 끼치지 않았다. 당장은 그것만 한 위로가 없었다.
* * *
PR 영상을 찍기 위해 모인 장소였다. 흩어진 매무새를 정돈하고, 메이크업을 손질했다. 풀어진 머리 세팅도 다시 받은 순간이었다. 처음보다는 덜했지만, 원상 복귀가 된 상태였다. 호명에 맞춰 이동하는 팀들이었다.
승리한 사람들 속에는 낯익은 인물들이 섞여 있었다. 당연하게도 상위 순위가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은근히 서로를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누가 주력인지 파악하는 눈길들이 이어졌다. 와, 부담스러워……. 팀원들에게서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안에는 많은 사람이 주시하는 데뷔조 멤버, 문채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얘하고만 멀어져도 숨통이 트였다. 1등은 더 심하겠다며 작게 웃었다. 무조건 상위권이 좋은 게 아니라니까.
"형, 무대 잘 봤어요."
"어. 너도 지금 왔어?"
이유준이 다시 한번 아는 척을 해 왔다. 평온한 얼굴로 좋은 공연을 보여 준 유형이었다. 적당히 하라고 했더니, 곧 죽어도 말을 안 들었다. 쟤는 대놓고 무서운 인간이었다.
"이긴 것 축하해. 잘하더라."
초반 평가에서 이정원과 한 팀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시너지를 낼 줄은 몰랐다. 의외의 조합이 괜찮은 호응을 끌어냈다.
편곡 무드도 잘 어울렸고 둘의 합이 괜찮게 느껴졌다. 고스탯 능력자들답게 본인 분야에선 역량을 발휘했다. 공생 관계의 포지션들이었다.
"고맙습니다. 형네 팀도 굉장했어요. 저희끼리 엄청나게 얘기했어요."
"…아, 그래?"
각 대기실에는 모니터링이 가능한 TV가 달려 있었다. 그걸 보며 서로를 체크하는 흐름이었다. 칭찬을 들었지만 그리 반갑진 않았다.
얘기를 했다는 건, 견제 대상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였다. 난 그리 높은 등수도 아니었다. 인지도도 크지 않은데, 경쟁 심리만 부추겨 버렸다. 불편해져서 주제를 돌려 버렸다. 보이지 않는 권혜성이 궁금하던 찰나였다.
"…그나저나, 혜성이는?"
"아, 아쉽게 된 것 같아요."
"…그렇구나."
아무래도 배틀에서 진 팀에 속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권혜성네 메보가 본경연 중 삑사리를 냈다. 상대 팀만 따져 봤어도 이기는 게 힘든 싸움이었다.
실력은 좋았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경연 결과와 상관없이 입지는 다졌을 인물이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 누군가를 신경 쓰는 것도 이상했다. 한 치 앞이 불투명한 건 나를 뜻하는 말이었다.
"팀 피에스타, PR 찍으실게요!"
"가야겠다. 나중에 보자."
"네. 이따 봬요."
스태프의 부름에 이유준과는 인사를 나눴다. 대충 손을 휘적거리고는 모두를 따라 움직였다. 일단 어쩌다 보니 승리한 연습생이었다.
어떻게 진행될까, 떨리는 가슴이었다. 배경 자체는 일할 때와 같은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익숙한 게 없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 * *
아쉽게도 전체 1위는 하지 못했다. 앞서 생각했듯이 타고난 천재들은 이기기 힘들었다. 그걸 떠나서도 인기 있는 연습생이 많았다.
인지도부터가 달랐으니, 시작 선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꽤 강한 임팩트는 남긴 것 같았다. 득표수만으로는 16개 팀 중에선 7등이었다.
이게 어디야. 남들이 봐선 이것마저 부러울 수 있었다. 심지어 나는 얼마 전까지 전혀 관련이 없던 사람이었다.
이런 내가 포함된 집단이었다. 얼렁뚱땅 진행된 것치곤 훌륭한 성적이었다. 물론 노력이 없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여기에 매달리며 쏟은 시간과 체력만 해도 엄청났다. 팀원들은 사활을 건 것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존재가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폐 끼치지 말자. 딱 그 일념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재밌었다. 그리고 응원받은 것 너무 좋았어요~"
"1등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열심히 했고, 그에 합당한 결과를 받았고!"
"맞아요. 우리 팀이 최고다~!"
시원해 보이는 얼굴의 팀원들이었다. 아쉬울 만도 할 텐데, 잘 갈무리하는 느낌이었다.
고생했다는 의미의 독려가 이어졌다. 그러곤 아까의 발표 장면을 떠올렸다. 1위로 호명된 건 강태오네 팀이었다.
자체 퀄리티도 좋았지만, 그 인물이 독보적이었다. 실력도 괜찮은데 외모가 톱급이었다. 케이팝은 얼굴이 반 이상 먹고 들어갔다. 다른 애들이 못생겼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혼자만 특이한 그림체를 지녔단 이야기였다. 배우를 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의 외관이었다. 그래서 더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놀라운 점도 하나 있었다.
바로 경력직 신입인 연습생과 순위가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2등을 받은 이민석은 데뷔했던 인물이었다. 초장부터 그걸로 화젯거리가 됐었다. 업계에선 살아남을 수 있는 스타일의 아이돌이었다.
하지만 소속사가 일을 너무 못해 묻혀 버렸다. 다른 멤버들과 같이 나오고 싶었던 것 같았다. 결과적으론 본인만 나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기존 팬층이 살아 있었다. 호불호가 갈렸지만, 원래의 팬덤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이민석을 강태오가 밀어냈다. 고만고만한 순위였지만 우리에겐 놀라웠다.
역시 얼굴인 건가……. 테마곡 스트리밍에서 본 댓글들이 떠올랐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못생기면 욕을 먹었다.
연예인이란 건 보여 주는 직업인 게 맞는 말이었다. 맞아, 얼굴이 개연성이고 서사지……. 쓸데없이 관계 파고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별다른 사연이 없어도 승승장구하는 유형이었다. 좀 잘생긴 게 아니라 이건가. 하긴 나 같아도 쟤가 꼬시면 좀 흔들릴 것 같았다.
아니… 뭐래. 아무래도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얼른 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이 점만 체크한 뒤 숨을 돌렸다.
"다들 수고 많았어요. 함께해 줘서 고마웠습니다. 다음 무대에서도 다시 만나요."
"해신이 형… 아쉬워요. 형 덕분에 재밌었는데……."
"재밌었다니… 일단 칭찬으로 들을게요."
"모두 살아남는 거예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얼추 마무리하는 분위기였다. 모두와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2차 미션을 가지 못할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게 내가 되지 않는다는 법도 없었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먹고살 길 찾아 떠나는 거지. 낮게 웃으며 인근을 돌아봤다.
어차피 다 같이 숙소로 돌아갈 일이었다. 고난 메이트가 꽤 깊은 유대감을 쌓았다. 연장자여서 어느 정도의 멘트를 해 줘야 했다.
문채민에게 상당 부분을 맡겨 놓은 점도 걸렸다. 한 발 뒤에서 지켜본 과오가 적지 않았다. 매너는 보여 주고 싶어 문채민과 말을 텄다. 막장 노 답 팀원보단, 그냥 노 답 팀원으로 남고 싶었다.
"문채민 연습생, 그동안 잘 이끌어 줘서 고마웠어요. 제가 부족한 형이라 많은 걸 맡겼었네요."
"아니에요. 형, 진짜 즐거웠어요. 형 아니었으면 할 수 없었던 것도 많았을 거예요."
하여간에 끝까지 어른스러운 인물이었다. 아직은 말간 얼굴이 살짝 시무룩했다.
경연이 끝나서 그런가, 평소 보이던 독기가 빠진 모습이었다. 우정환과 벌이던 탐색전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나는 저 나이 때 뭘 하고 있었더라. 아르바이트 하느라 바빴지…….
스쳐 지나간 과거에 쓰게 웃었다. 문채민은 못해도 파이널까진 갈 실력이었다. 뭐가 됐든 힘내 보라고 속으로 외쳐 줬다.
어깨를 두 번 토닥이고는 가볍게 팔짱을 꼈다. 나랑은 관련이 없을 걸 알아 할 수 있던 행동이었다. 돈이야 돌려받고 싶었지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확신이 사라졌다.
일단은 도전해 본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처음 입었던 충격도 많이 줄어 있었다. 저당금도 로또였으니 괜찮은 거였다.
원래 내 돈이 아니었던 걸로 치자. 예금, 적금은… 다시 구르면 모을 수 있을 돈이었다. 육체 건강하고 사지 튼튼한 걸로 만족해야지.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마지막 팀원을 돌아봤다.
"저기, 김찬규 연습생."
"…네?"
얘한테도 뭔가 말은 해 줘야 했다. 가장 예상외의 모습을 보여 준 사람이었다. 초반부에 너무 날을 세웠나 싶어 걸릴 정도였다.
이정원과는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해결될 규모라면 빨리 화해하는 게 나아 보였다. 미성숙하고 격동적일 나이였다.
감정의 변화가 큰 게, 심리적인 부담도 적지 않은 느낌이었다. 문채민은 규격 외 인간으로 두고, 본인 또래다운 사상을 가졌다고 둘러댔다. 물론 전부 생각만 할 뿐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말아 문 김찬규였다.
그러고는 시선을 내리깔며 눈치를 봤다. 이제 와서 내외하는 게 재밌는 광경이었다. 수다 삼매경인 다른 애들을 등지고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악수나 한번 하자는 취지였다.
고생했어, 불편해도 숨기는 법을 배우는 게 살기 편할 거야. 타인은 나를 쉽게 재단하곤 하니까……. 굳이 따지자면 나도 마냥 좋은 인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건 얘보단 내가 능숙했다. 남들이 들었으면 꼰대라고 했을 잔소리였다. 진심으로 모두가 몰라서 다행이었다.
"고생 많았어요. 다음에 또 인사 나눠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많이 얌전해진 모습의 김찬규였다. 처음에는 본인 성격을 주체하지 못하는 유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겉모습은 어디까지 겉일 뿐이었다.
양측을 다 알게 된 이후 뭔가의 배경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정원 쪽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큰 오해가 둘 사이를 갈라놨다며 혀를 찼다. 다들 참 힘들게 사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형."
"네?"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던 말이었다. 성장한 느낌을 풍기는 인물이었다. 꾸벅 숙인 고개에 문채민 때와 동일하게 어깨를 쳐 줬다.
인간이 변화하는 모습은 희한했다. 애들이라 그런가, 함부로 미워할 수가 없었다.
왠지 이상한 감정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얘도 그냥 평범하게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신해신, 앞으로는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자기반성의 시간이 이어졌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야 할 차례였다.
* * *
숙소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의상은 갈아입은 차림이었다. 하지만 여타 세팅은 남아 있었다. 우스운 꼴에 머리를 긁적였다. 셔틀버스 안은 초토화였다.
대부분 기절하듯 잠이 든 광경이었다. 초반까진 흥분으로 들떠 대화를 나누던 연습생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