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완전한 포지션은 못 밀겠지만, 눈에는 띌 그림이었다. 실력으로 욕먹을 구멍도 틀어막았다.
다행히도 보컬은 책잡힐 구석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반인이라 성장 속도가 남다르다고 넘겨 줄 게 전부였다.
"좋아, 올리자."
남아 있던 코인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다시 모아야 할 과정이 떠올라 속이 쓰렸다.
하지만 일단은 해야 하는 선택이었다. 너무 돈, 돈거렸나… 시스템 머니로 쪼잔하게 굴긴 조금 창피했다.
"스타 코인 스탯 해금, 외모와 보컬에 사용할게."
['스타 코인 스탯 해금' 외모, 보컬에 2,000 코인을 지불합니다.]
[현재 코인]
715 코인
[외모 스탯 해금 방법]
카메라에 100번 이상 담기세요.
[변화 가능 스탯]
외모: B+ → A-
[보컬 스탯 해금 방법]
스탯 난이도 이상의 노래를 30번 부르세요.
[변화 가능 스탯]
보컬: B → B+
이상한 지령들이 내려왔다. 슬슬 높아졌다 이건가? 어째 품이 많이 드는 방법이었다. 노래야 그냥 30번 부르면 될 일이었다.
카메라에 100번 담기란 게 의미 불명이었다. 프로그램 녹화도 100회는 안 됐다. 좀 더 융통성 있게 고민해 보란 뜻이었다.
하긴 가장 처음 지령도 애매했다. 팬이 아닌 사람이어서 번화가를 걷는 걸로 성공했다. 이것도 그런 식으로 우회하면 될 것 같았다.
시스템, 너 분명 카메라라고 했지, 방송이라고 안 했어? 바닥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눈에 띄었다.
셔터를 누르면 1회로 인정해 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간이 되는 김에 바로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으로 셀카를 100장 찍은 날이었다.
스탯을 위한 장치라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연사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어리바리한 표정에 흔들린 컷도 많았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알림음과 함께 업데이트가 완료됐다. 이걸로 반은 끝낸 무렵이었다.
띠링-
[첫 'A' 스탯이 오픈되었습니다.]
들려오는 알림음에 깜짝 놀랐다. 저게 무슨 소리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이 이상했다. 외모 스탯란이 금색으로 물들었다.
이건 본 적 없는 방식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뭔데 그래……. 하도 난리를 피워서 익숙해졌다.
[히든 스탯 오픈!]
[한계 스탯 'S'가 적용됩니다.]
…익숙해졌다고 하니까 다른 방향으로 괴롭히네.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읽어 봤다. S라고? A가 끝이 아니었다. 괜찮다고 생각한 스탯이 작아 보였다.
미션도 미리 알려 주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친절할 리가 없지. 이제는 하도 맞아 뒤통수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걸리는 게 있었다.
고우림을 비롯해 멘토들은 상태 창이 없었다. 길을 걷는 시민에게서도 볼 수 있던 건데, 그 사람들만 없어서 이상하다고 여겼다.
연습생들이 가진 실력을 상회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보여 주지 않은 게 분명했다. S 스탯을 지녔을 테니 가린 거라며 자조했다.
갑갑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엄청 복잡한 구성이었다. 끌어올린 게 아니어서 참담했다. 갈 길은 여전히 구만리였다. 에라이… 그래, 시스템 네 마음대로 해. 그냥 넘기기로 했다.
"…뭐, 잡고 있어 봤자 바뀌는 것도 없겠지."
외부 이벤트까지 휴식기는 일주일이었다. 첫날 돌아오자마자 해금을 한 건 잘한 일이었다. 이제부터 30번 노래를 불러야 했다.
스탯도 올리고 코인도 캐니 수긍했다. 게으름 부리기엔 업보로 돌아올 게 두려웠다.
이런저런 핑계로 위안 삼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렌탈 연습실에 방문했다. 예전에 왔던 그 작은 공간이었다.
장기간 빌리면 저렴하다고 설명 들었다. 당분간은 꼼짝없이 발이 묶인 처지였다. 보컬 스탯을 제외하고서도 코인은 벌어야 했다.
빈털터리에겐 한 푼이 소중한 입장이었다. 현실 돈이나 시스템 머니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이었다.
"…일단 해야겠지."
3일을 미션 기간으로 정해 뒀다. 목에는 무리가 가면 안 됐다. 하루에 10곡씩 부르면 끝낼 일정이지?
그 외엔 다른 안무 연습으로 몸을 풀자고 다짐했다. 비장하게 데스크톱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이벤트 촬영 전까진 외모도 보컬도 모두 올릴 계획이었다.
* * *
정해 둔 날에 보컬 스탯이 B+로 업데이트됐다. 상태 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해 둔 결과물은 모두 해낸 부근이었다. 연습실을 나서며 모자를 눌러썼다. 일찌감치 나온 탓에 해는 아직 중천이었다.
이제는 집에 가서 쉬자고 생각했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간의 전적으로 보아 아는 애들이었다. 이유준과 권혜성이겠다며 화면을 터치했다. 나중에 답할까 싶었지만 미루긴 신경 쓰였다. 길어지는 진동으로 봐선 메시지가 아닌 전화였다.
[권혜성]
"여보세요."
- 형!
"…어, 혜성아, 나도 귀 있으니까 볼륨 좀 줄여 줄래."
-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어제저녁에도 답장한 걸로 기억하는데……."
- 에이~ 그건 그거고요.
권혜성의 불같은 반응에 핸드폰을 바라봤다. 11:53AM, 지금으로부터 7분 전에 온 연락이었다.
얘, 나 진짜 잘 따르네. 강한 호감을 표현하는 상대였다. 나 좋다는데 거절하기도 민망하고……. 사실 따지고 보면 권혜성도 잔머리 캐릭터였다. 본격적인 녹화에 들어가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좋아서 붙는 것도 있겠지만, 촬영 중에 받아 간 힌트가 몇 개 있었다. 내 갈 길 가려다가 얻어 챙긴 케이스였다. 그래서 나랑 같이 있을 때의 메리트를 느낀 것 같았다. 하여튼 똑똑하다니까…….
아마 이유준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뭐가 됐든 얘네도 아이돌이 꿈인 연습생들이었다. 안 그런 척, 머리도 잘 쓰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점을 계산할 줄 알았다.
눈치도 비상해서 사건 사고에선 그럭저럭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연루되면 힘들어하면서도 어울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타고난 스탯이 있어 이득을 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직은 주목받지 못한 연습생이라, 시선에서도 제법 자유로웠다. 얘넨 뭐가 됐든 좋은 버스였다. 가끔 운전은 내가 했지만 말이다…….
적당히 대꾸해주자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있었다면 머리를 헤집어 줬을 것이다. 내용물로는 얘보다 7살 연상인 사람이었다. 한참 어른들이 보기엔 나도 어리겠지만, 나름 큰 터울처럼 느껴졌다. …꼰대가 돼 버린 건가.
"7분 전에 온 걸 말하는 거야?"
- 유준이 형이랑 9시부터 말 걸었는데요……? 형만 안 봤어요~."
"그건 미안한데, 나 그때 자고 있었거든."
- 자고 있었어요?? 그럼 죄송해요!"
미안해, 거짓말이야. 사실 안 자고 있었다. 일찍 대답해 주면 시간을 뺏을 것 같아 흘려 넘긴 찰나였다. 스탯 정비가 끝나기 직전이라 조바심이 들었다. 할 일은 다 하고 만나 자며 미뤄 왔던 일정이었다.
어째 이번에도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받기는 해야 했을 연락이었다. 피곤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집에 가기는 글렀다며 하늘을 쳐다봤다. 아, 속 쓰려…….
"그래서 뭐 때문에 전화한 건데. 본론부터 좀 들어 보자."
- 아! 다름이 아니고, 저희 2차 무대 얘기 좀 하자고요.
"…2차?"
그거에 대해 할 말이 있던가. 사이는 좋은 편이지만 결국은 라이벌이었다. 지금 내가 견제당하고 있는 건가 헷갈렸다. 권혜성이? 나를?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신기해했다.
무슨 이야기일지도 궁금하고, 한 번은 만나 볼까 싶었다. 핸드폰 너머로 신나게 외치는 권혜성이었다. 나온 김에 전부 끝내고 들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집에 가도 딱히 할 일은 없었다.
* * *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요즘 좀 바빴어. 넌 소속사에서 안 불러?"
"부르기는 하죠. 그래도 제가 주력 연습생은 아니었잖아요? 아시면서~"
"…그런 것치곤 밝아 보이네."
"힘들 건 없죠~ 제가 잘하고 있기도 하고요."
"아, 그래……."
만남 장소로 자주 이용되던 카페였다. 옆에는 이유준도 함께 있었다. 1+1이라고, 이럴 줄 알았다. 전화는 한 명이 했지만 만남에는 2명이 나왔다.
장난치는 애들을 보며 테이블 위로 턱을 괬다. 상태 창 하단에는 저번과 같은 확률 성장 트리가 남아 있었다.
저것만 보면 어째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시던 커피마저 내려놓으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사람이 점점 더 약해지는 것 같았다.
나이를 먹었나. 분명 막 입사했을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그 전 몇 년을 불태웠더니, 하얗게 산화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알아만 보자고 했던 게 이때까지 방치됐다.
쟤네야, 내버려 둬도 잘하니까 문제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결론은 나도 함께 경쟁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걸 제쳐 두고서라도 도와주는 건 오지랖이었다.
자신도 버거워서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 남을 챙겨 줄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뭐, 난 탈락할 수도 있는 노릇이고… 슬프지만 본인 앞가림이나 잘하면 충분했다. 나는 현실에 수긍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저희 말고도 친해진 연습생들끼리 자주 만난다더라고요."
"그건 또 어디서 듣고 온 거야?"
"혜성이 마당발인 건 다 아시잖아요."
"저 번호 왕창 땄거든요! 물론 만나는 건 형들뿐이지만요."
나를 불러낸 원인, 권혜성이 불쑥 외쳐 왔다. 아직 1화가 방영되지 않은 지점이었다. 마스크만 턱에 걸친 게 아주 위풍당당했다.
이목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차림새였다. 둘 다 테마곡 스트리밍에서 제법 눈에 띄었다. 지나치게 방심한 게 아닌가 불안했다.
캡 모자까지 눌러쓰고 있는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외출하면서도 연습실 가는 동선을 자주 바꿨다.
스태프로 일하면서 들었던 무서운 사건들 때문이었다. 근데 그게 전부 오버처럼 느껴졌다. 너무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얘네랑 어울리면 조심성이라는 게 소용이 없었다. ……자의식과잉이었나. 민망해.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근데 살 빠졌어요?"
"…어?"
"얼굴이 좀 달라진 것 같아서요. 기분 탓인가?"
"그러게요? 뭔가 좀 더 또렷해진 느낌? 뭐지?"
아차, 잊고 있었다. 분명 며칠 전에 외모 스탯을 올린 일이 있었다. 그래도 3일밖에 안 지나 다행이었다. 성형이나 시술을 내뱉기는 힘든 기간이었다.
대충 그렇다는 뉘앙스를 흘려보냈다. 먼저 적당한 방안을 꺼내 준 이유준에게 감사했다. 거기에 맞춰 탑승하면 넘길 수 있을 일이었다.
물론 이걸 받아들여 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그렇다는데 얘네들이 대꾸할 길은 없었다. 우리 그냥 넘어가자…….
"…체중이 좀 줄었지. 얼굴부터 빠지는 타입이라 달라 보이나 봐."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퇴소하면서 긴장이 풀리긴 한 것 같았다. 다음 녹화 전까지 변화를 주자고 다짐했다. 하고 다니던 세팅을 바꿔 볼 요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