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렇구나. 그래도 좀 잘 드세요. 저번에도 전부 남겼잖아요."
"굳이 따지면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유준이 형도 너무 조금 먹어요~ 아닌가? 그냥 안 먹는 건가?"
"그래도 난 체격 유지는 하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최초 평가 때보단 마른 것 같은데요?"
"…내가?"
살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살이 안 붙기는 했지만 작은 골격은 아니었다. 지금도 길을 걸으면 어지간한 사람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입소 후 연습생들과 같이 있으면 그 차이는 더 심했다. 업계 특성상 마르고 왜소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거기에 예쁘장한 얼굴들까지 겹치니 나와는 비교가 많이 됐다.
누가 봐도 여긴 기골이 장대했다. 하여간에 이상한 방면으로 사람 놀리길 좋아하는 애들이었다.
"…유준이 너, 나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안 크잖아. 그리고 혜성이 얘가 훨씬 왜소한데."
"에이~ 형, 저 안 작아요! 형들 어깨가 넓어서 그런 거죠. 아, 진짜 억울한데……."
권혜성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눈 위치는 고만고만했으니 맞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쟤가 나보다 작아 보였다. 춤추는 포지션이라서 그런지, 체구부터 날렵했다.
아무튼 이런 애들한테 잔소리 듣는 게 참 묘했다. 견제를 위한 만남은 아닌 것 같았다. 장난치기 위한 시간이 이어졌다. 오늘도 거하게 낚였네.
"네, 네… 많이 먹고 얼른 크세요."
"아, 형~! 저 성장기거든요! 형들 다 따라잡을 거거든요!"
"그래. 힘내, 혜성아."
"유준이 형은 바로 편 먹기 있어요? 해신이 형 놀리다가 완전히 말렸네……."
"야……."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다. 본론이나 들어 보자 싶어 주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혜성아 네가 말한 2차란 게 뭔데."
"음, 별건 아니고… 다음에는 같은 팀 하면 좋겠다 싶어서요."
"…진짜 너네 잊은 건 아니지? 이거 서바이벌이다?"
"형은 너무 정이 없어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권혜성 쟤가 또 능청을 떨었다. 1차 무대를 통해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말은 좋게 했지만, 그 속에서 뼈가 느껴졌다.
개인의 역량만큼 팀원의 구성이 크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확실히 나와 이유준은 팀 내에 합이 잘 맞는 연습생이 있었다.
여기는 문채민, 저기는 이정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좋은 퀄리티의 경연이 만들어졌다. 주목받기 힘들었을 환경에서 승리라는 결과가 도출됐다.
하지만 권혜성은 그런 연결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연결점은커녕, 합이 안 맞는 애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거기에 메인 보컬이 실수까지 해 버렸다. 그때의 일을 속에 담아 놓은 게 틀림없었다.
저거 완전 겉만 순둥이지, 속은 맹수잖아……. 헤실거리고 바보같이 굴어도 수를 쓰는 게 능숙했다. 억지로 나왔다더니 제법 공격적이었다. …제대로 해보자고 다짐했나?
아무래도 이번에는 팀원으로 나와 이유준을 점찍은 것 같았다. 자신과 시너지가 좋을 거라고 판단한 상황이었다. 포지션만 봐도 댄서에 래퍼, 보컬까지 고루 준비되어 있었다.
노리고 있는 입장에선 잘 차려진 만찬과 다를 바 없었다. …나도 이용당해 줘야 하는 거야? 알아챘지만 반박할 용기는 없었다. 쟤랑은 척지면 골치 아플 것 같았다.
"혜성이가 2차 미션이라고 말했어요?"
"응, 난 또 라이벌로서 체크당하는 건가 싶었지."
"에이~ 그럴 리가요. 저를 아직도 그렇게 모르세요?"
하여간에 참 능글맞았다. 아닌 척 돌리면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유준도 전부 눈치챈 것 같았다.
흐음… 턱을 괸 이유준이 콧소리를 내며 길게 웃었다. 쟤도 지금 계산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같이 하는 게 좋을지, 적당히 빠져나갈지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이거 완전 기가 강한 사람들 사이에 무른 희생양 하나가 섞인 꼴이었다. 물론 후자가 나였다.
진짜 괜히 나왔네… 집이나 갈 걸 그랬다. 나는 완전 뱀 앞의 먹잇감 신세였다. 잡아먹히고 싶지 않으면 항복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너덜너덜해도 살아 있는 게 나은 법이지…….
굳이 따지자면 얘네랑 있어서 나쁠 일은 없었다. 컨트롤만 되면 우수한 타입들이었다. 목숨 걸고 드라이브하게 생긴 참이었다. 깊게 파고들면 힘드니까 그냥 상부상조로 치자.
"…됐어."
"그나저나 같은 팀은 어떻게 하려고?"
"맞아, 너 다음 팀 뽑는 방법은 알아?"
2차 무대에 대한 실마리를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신기했다.
그래서 얘기나 들어 보고자 생각했다. 전직 스태프 앞에서 어쩐 헛발질을 할까 궁금했다. 사실 이렇게 라도 해야 속이 시원했다. 내가 너무 불쌍하다…….
"아뇨. 이제부터 짜야죠? 뭔가 유추하면 나오지 않을까요?"
"…너 진짜 대책 없다. 유준아, 너도 이럴 것 알았어?"
"…아니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요."
여기서는 이유준도 당황했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저번부터 느낀 점이었다. 얘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이끌었다.
혼자 구상하는 것보단 흐름을 잘 타는 나를 통해 방법을 알아볼 요량으로 만난 거였다. 제대로 이용당했네.
영락없이 다음 미션에서 얘들과 무대를 꾸려야 할 것 같았다. 망할 일은 없겠다며 위안 삼았다. 물론 신경 쓰이는 게 있었지만 그건 넘기기로 했다.
확률 어쩌고 트리… 반쯤 흐린 눈 하고 보면 남들 상태 창과 다를 바 없었다. 자동으로 모자이크 처리 하는 능력이 생겼다.
아무튼 이런 머리는 내가 굴려야 할 것 같았다. 대화를 경청하는 척, 과거를 떠올렸다. 시즌 3와 4 때의 무대들이 연상됐다.
그때 어떤 걸 했더라. 똑같지는 않더라도 도움이 될 영역이었다. 제작진이 같은 이상, 비슷한 루틴은 돌고 돌았다. 아, 시즌 2를 봤어야 하는 건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어?"
그때, 예전 선배와의 대화가 기억났다. 연출부원이지만 말단이었다. 손이 부족하면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미술 팀에게 끌려 나온 새벽녘이었다.
피로에 찌들어 세트 제작을 하고 있었다. 사다리 위에는 선임인 선배가 앉아 있었다. 소품을 설치하던 과정이었는데, 피곤함에 푹 잠긴 목소리였다.
잠을 깨기 위해서 대화를 거는 게 틀림없었다. 나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 대답해 줬다.
'설치할 것 진짜 많네. 앞의 시즌이 잘돼서 그런가, 이번에는 더하다, 더해~'
'그러게요.'
'그래도 시즌 2가 좋았는데.'
'막내들 없어서 잡일 다 하셨다면서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제작부 일만 빡셌는데? 그땐 새벽 망치질도 안 시켰지…….'
'진짜요? 미술 팀이 안 불렀어요? 와, 부럽다…….'
'나도 그때 신입이었는데 뭘 부술 줄 알고, 처음에는 힘쓰는 노가다 안 시켜.'
'…그럼 저는 왜 부르는 거예요?'
'네 연차면 신입 아니거든? 그리고 잘하면서 투덜거리기는.'
'에이…….'
'하여간에 그땐 방송 세팅 잡일이나 했어. 2차였던 것 같은데… 컨셉 포지션인가 뭔가 죄다 랜덤으로 하겠다고 종일 피켓만 만들었다. 평생 할 가위질 그날 다 한 듯.'
'그래도 그게 이것보단 나은 거죠?'
'당연한 소리. 손가락 부러질 것 같아도 새벽 출근보다 그게 낫지. 너 같으면 뭐 고르겠냐?'
'…손가락을 포기하겠습니다.'
'너도 안 그런 척하면서 참 특이해.'
분명 시즌 2의 2차 무대라고 말했다. 왜 이걸 잊고 있었지? 시시콜콜한 잡담 속에 힌트가 깔려 있었다. 돌아가는 포맷을 보면 유추할 수도 있겠지만 후보군은 많았다.
나는 그걸 좀 더 좁힐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컨셉 포지션에 랜덤과 피켓이라고 말했다. 이 조합이면 유추되는 게 하나 있긴 했다.
직장에서 돌아가는 방송만 3년을 봤다. 같은 사람 머리에서 나올 의견은 한계가 있는 편이었다. 목소리를 죽이곤 둘에게 손짓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주변을 점검한 것이다. 카페라곤 하지만 대낮에 사람도 별로 없는 가게였다.
"…무작위려나."
"네? 무작위요?"
"다음 미션 말하는 거예요?"
"응, 뭐 할지 파악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야."
테이블 위로 엎어져 있던 권혜성이었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우리를 올려다봤다. 이유준도 팔짱을 낀 채 나를 돌아봤다.
타이밍에 맞춰 적당히 추측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곤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너무 자세히 알려 주기에는 수상한 그림이었다. 그래서 안 되는 연기력을 긁어모았다.
몇 개 던져 주고 맞출 지경만 만들면 됐다. ……누구 좋으라고 하는 일인지 잘 모르겠네. 완벽하게 내 손해 같았다.
"그, 1차는 대면 상태에서 뽑았잖아. 서바이벌이니까 슬슬 비대면 소재를 쓰지 않을까? 너희 시즌 1 봤지? 거기에 비슷한 루틴 있었어?"
"저 그거 봐서 알아요! 한 방에 들어간 연습생끼리 같은 팀이었나?"
"맞네… 시즌 1 때도 3차 무대에서 그렇게 팀을 정했거든요."
저거라면 비밀리에 무리를 만드는 게 가능했다. 사전에 마련해 둔 공간으로 입실시키는 것이었다. 소재를 살리면서 사람들을 묶을 방법이었다.
내용은 고지해 주지 않는 게 기본값이었다. 그러면 연습생들은 작당 모의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럼 그런 식이지 않을까? 보통 시리즈물이라는 게 변형은 있어도 큰 틀은 가져가잖아."
"우와! 왜 이걸 몰랐지?"
너희 같은 방법은 잘 안 써서 그래……. 기 싸움을 하거나, 견제하는 방면이 흔한 거였다. 이렇게 자기 편으로 회유하는 건 쓰지 않았다.
다른 의미로 독해서 특이한 케이스가 됐다. 그나저나 문채민도 이러지 않았던가……? 시즌 2는 희한한 애들이 많이 있었다. 험난한 세상을 꿋꿋하게 이겨 낼 강인한 성격들이었다.
"그럼 이번에도 방에 들어가는 식으로 진행될까요? 저번처럼 뽑기면 낭패인데……."
"한 시즌에서 같은 건 반복 안 하지 않나, 유추되니까? 그 구성은 이미 하기도 했고……."
"하긴, 똑같은 걸 하면 말이 나오겠죠. 와, 형 잘 맞히네요? 되게 확률 높아 보여요."
"…그럼 다행이네."
메인 사단의 헤드들은 잘 알고 있었다. 시즌 내 같은 룰을 반복하기 싫어했다. 변칙적인 장면을 만드는 데 자부심 있었다. 연습생들을 당황하게 하는 거에 재미를 붙이곤 했다. 지켜봤을 땐 악취미라 넘겨 버렸는데…….
그걸 겪어야 하는 당사자가 되니 고약하다고 느껴졌다. 알고 있는 정보여서 안심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얌전히 휘둘렸을 것이다.
정말 내 편일 때나 든든하지, 남의 편이니 힘든 사람들이었다. 일단 큰 산 하나는 넘은 시점이었다.
"근데 그거면 미리 말 맞춰 놓을 수 있는 것 아니에요?"
"다른 룰도 같이 적용되겠지. 이렇게 쉽게 가 줄 리가……."
"다른 룰이요?"
"에이, 너무 포괄적이에요. 뭘 추가했으려나."
내 말을 들은 권혜성이 다시 엎어졌다. 이유준도 길을 걷다 막혔단 표정이었다. 제작진은 바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