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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39화 (39/328)

39화

남은 건 다음 성장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캐릭터는 점차 잡아 갈 게 분명했다. 그게 어떤 방향일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했다.

"유준아, 네가 고생하겠다."

"흠~ 어쩔 수 없죠. 애들이랑 얘기 좀 해 봐야겠어요. 그래도 적당히 빠져나갔네요."

"…그렇긴 하지. 대신 임팩트도 없다는 게 문제겠지만?"

"아쉽다. 난 형들 무대 좋았는데……."

"이번에 특이한 케이스가 많아서 밀릴 것 같기는 했어."

우리 둘은 그냥저냥 나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권혜성도 이해는 했지만, 뭔가 걸린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녹화 때부터 엄청난 실력파의 분위기는 풍기지 않았다.

앞의 연습생들이 망쳐 주고, 잔머리를 써서 유하게 빠져나간 것뿐이었다. …낫 배드. 아까 전 댓글을 곱씹으며 공감했다.

1차 미션은 이미 끝나서 돌릴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2차는 이제 시작인 순간이었다.

본격적인 강점을 드러내야 할 것 같았다. 실력을 보여 주자니 뭘 해야 할까 고민이 됐다. 정석적인 성장형을 노린 계획이었다. 추락하지만 않게 천천히 올라가자고 다짐했다. 다급한 건 조건과 입장이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나쁜 상황은 아닌데, 앞으론 좀 더 열심히 해야겠네."

"뭔가 무대에서 강한 걸 보여 줘야겠죠?"

"컨셉을 떠나서 실력파라는 걸 인지시켜야지. 그리고 넌 해결할 것도 있잖아."

"맞아요. 직관적이지만 그게 정답이죠. 앞으로도 할 게 많겠어요."

씌워진 시작 자체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끝을 봐야 했다. 며칠 전 같은 팀을 하자며 요행을 펼치던 권혜성이 떠올랐다.

…그거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당시에는 휘둘린다는 기분이었으나 지금은 좋은 힌트가 됐다. 뭐가 됐든 이 둘은 타고난 실력자였다.

잘 다루면 나 하나 정도는 커버를 쳐 줄 수 있었다. 져 준 게 장점으로 돌아온 것 같다며 신기해했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곤 그대로 다리를 끌어안았다.

"…혜성아, 유준아."

"네?"

"너네 같은 팀 하고 싶다는 마음 여전하지."

"당연하죠. 근데 운이라면서요."

"아니, 그렇기는 한데… 마음가짐을 좀 달리 먹어 보자고."

"형, 또 이런저런 생각 했죠."

"…들켰네."

"아무렴 어때요. 저는 좋은걸요?"

"…그럼 우리 꼭 2차는 같은 팀 해 보자?"

내가 성격은 물렀지만, 사회생활은 할 줄 알았다. 뭐가 편한 길인지 정도는 잘 아는 편이었다. 잘 가꿔진 포장 도로 놔 두고 굳이 산길을 걸을 필요는 없지.

나는 저 제작진 밑에서 잔머리를 터득한 사람이었다. 가진 패는 몽땅 쓰라고 있는 거였다. 그것도 나와 같은 목적을 지닌 패들이었다. …독한 건 좀 피해 다니지, 뭐.

* * *

순위 발표식에 맞춰 방영을 끝내야 했다. 그래서 이번 퇴소는 텀이 길었다. 별수 없이 주어진 휴식이었다.

연습생들로 가득한 장소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여기는 이벤트 촬영장인 중앙 야구장이었다.

본경기 전 특별 무대로 테마곡을 부르는 스케줄이 잡혔다. 홈팀의 로고가 박힌 상의 유니폼을 전달받았다. 관객으로도 온 적이 없어 생경한 환경이었다.

대기실에 앉아 주변을 구경했다. 꽤 인기 있는 구단의 홈구장이었다. 경기까지 빅 매치인 날인 것 같았다. 덕분에 야구팬들로 엄청난 인파를 이뤘다.

거기에 어떻게 안 것인지 찾아온 팬들도 많이 있었다. 먼 곳에선 언뜻 대포 렌즈도 보이는 것 같았다.

인기 있는 연습생들은 벌써 홈마도 붙어 있었다. 일단 나와는 별개인 이야기였다.

"이거 녹화만 하면 해산이랬나."

"네, 다시 셔틀 타고 방송국으로 간다고 했어요. 거기서 끝낼 것 같은데요."

"밤에는 집에 갈 수 있겠네."

…야구장에서 공연해 볼 줄이야.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무리에 섞여 있었다. 권혜성과 이유준이 내 옆을 차지하고 앉아 말했다.

등급까지 같고, 기존 순위조차 도레미인 삼인방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묶였는지 참 재밌는 인연이었다. 한껏 멋을 부린 연습생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방송물 좀 먹었다고 초반과는 다른 외관이었다.

아는 애들이 지나갈 때마다 눈인사를 해 왔다. …어라, 쟤는 염색했네. 얘는 귀를 뚫었잖아. 다들 화려해진 몰골을 자랑했다.

쉬는 동안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한 모양이었다. 앞머리 내린 것 정도는 그리 티가 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럼 나야 좋지.

그래서 더 마음 편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현장 스태프들이 분주한 게, 여유 있는 일정같았다. 타임 테이블만 확인해도 대기가 그리 짧은 편은 아니었다.

"…음, 나 잠깐 자리 좀 비울게."

"네? 어디 가시게요?"

"…화장실."

질문을 하는 애들에겐 적당한 답을 남겼다. 그러곤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사실 정말 화장실만 가는 건 아니었다.

잠깐 한숨이라도 돌리고 올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애들은 두고 나 혼자만 나왔다.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인근의 화장실은 줄이 너무 길었다. 기다릴 바에는 다른 데를 가는 게 현명할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내부 안내도를 보며 방향을 틀었다. 조금 떨어졌지만 갈 만한 위치에도 하나 있는 걸 발견했다.

화장실은 무사히 다녀온 참이었다. 주변을 구경하며 긴장도 가라앉혔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쯤이지. 돌아가는 길이 헷갈린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넋 놓고 걸었더니 이상한 곳까지 와 버렸다. 돌고 돌아 후미진 구석으로 판단 지었다. 시간은 있을지언정 난처해진 입장이었다.

그러다 우연찮게도 다시 한번 안내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몸을 움직이다 포착한 대화 소리였다.

본능적인 감각에 의지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지……? 코너를 앞둔 지점이었는데, 지금 내 촉이 여길 넘어가지 말라고 외쳤다.

가만히 숨을 죽인 채 등을 돌려 벽에 기대섰다. 입술을 말아 물고 호흡마저 조절하던 찰나였다.

"…그러니까."

"…응."

"아, 미안하다고!"

"…어?"

어째 둘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바빴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험악한 기운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건 일상적인 대화로 들리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둘은 인연이 있던 이정원과 김찬규였다. 초반부터 사이가 나쁜 걸로는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설마 얘네 지금 화해하는 건가?

실제와는 다른 성향의 둘 모두를 겪어본 일이 있었다. 여기가 방송국이 아니어서 행운이었다. 카메라라도 설치되어 있으면 큰일 났을 장면이었다.

쟤네 생각 이상으로 정신 빠진 애들이었네……? 구석이라지만, 조심성이라곤 밖에 내다 팔은 사람들 같았다. 이런 얘기는 소속사에서나 하면 될 일이었다. 긍정적인 흐름임에도 반갑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어째 관자놀이가 아픈 게 두통이 올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목에 서서 벗어나지도 못할 일이었다. 반대편으로도 가는 길이 있나…….

잠시 고민에 빠졌으나, 다른 길을 도전했다가 녹화 시간에 못 맞추면 대형 사고였다. 끔찍한 사례에 조용히 몸서리쳤다.

결국 쟤네들이 여길 뜨지 않는 한 같이 있어야 했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삼촌 때문에 등 떠밀려 나온 것도 너무 싫었어. 그런데 형이 감시꾼처럼 붙은 걸 알아서 더 배신감 느껴졌어. 그래서 삐딱하게 굴었어."

"…찬규야."

"알아! 형은 계약 기간 때문에 삼촌 말 들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그랬는데……."

"…내가 미안해."

"…됐어, 형은 이게 간절했을 것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사과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아니야, 결과적으론 내가 너한테 부담을 줬어."

"…이러니까 내가 더 삐딱선 탄 거잖아. 나 완전 이미지 쓰레기 된 것 알아?"

"그건… 내가 해명해 볼게……."

"…뭘 또 해명을 해. 기도 센 인간이 왜 여기선 설설 기어? 아, 모르겠다!"

제 머리카락을 벅벅 털어 보인 김찬규였다. 계속 궁금해하던 사실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진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한 거였다.

대충 들어 보니 예상했던 대로 원래의 관계는 나쁘지 않은 사이였다. …그러니까 쟤네 소속사 대표가 김찬규의 삼촌이고? 김찬규는 여기 나오기 싫었는데 등 떠밀린 거고? 거기까진 전부 이해가 됐다.

근데 문제는 이정원이 끼게 된 일이었다. 권혜성은 소속사 데뷔조 형들의 받침대로 출연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정원은 김찬규의 케어용으로 나온 인물이었다.

하기 싫었던 걸 지켜보는 눈까지 단 채로 나와 열이 받은 일이었다 원래도 저돌적이고 미성숙한 타입이었다. 섬세하게 컨트롤해도 휩쓸릴 인간을 제멋대로 하려고 들어서 발생한 사달이었다.

말하는 어조로 봐선 제법 친한 관계였는데, 그게 배신감으로 이어져 냉정하게 군 것 같았다.

돌고 돌아 쌓인 오해가 결국 저 둘을 고립시켰다. 김찬규는 못된 사람으로, 이정원은 낮은 평가로 이어져 버렸다.

쟤네 소속사 사장은 정말 감이 없는 인물 같았다. 한 번에 본인 소속 연습생 둘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라고 할 일이었다. 기왕이면 엔터 사업은 하지 않는 걸 추천하고 싶었다. 대표들이 문제인 게 맞다니까…….

"이왕 이렇게 된 것, 열심히 해 봐! 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볼 테니까."

"…너, 진심이야?"

"이미 나온 걸 뭐 어떡해. 그리고 마음이 좀 바뀌었어. …무대 자체는 재밌더라. 응원해 주시는 분들도 좋아."

"찬규야."

"이름 닳으니까 그만 불러. 그리고 난 사과했다? 삼촌한테 내 얘기 하지 마?"

"…그래. 나야말로 미안했어. 네가 부담스러워하는 걸 알면서 그냥 동의했으니까."

"나 적응 안 되니까 원래처럼 좀 굴어 봐. 할 말 다 하고, 말로 절대 안 지고."

"응, 이제 그럴게."

"어우… 여기 와서 평생 들을 뒷담 다 들은 것 같네. 나 욕 많이 먹었겠지? 진짜 오래 살겠어. 팀 미션에서도 못되게 굴었는데. 아… 망했다."

이정원의 사정도 대강은 이해됐다. 나이가 적지 않았으니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대표의 말을 따른 거라고 짐작했다.

알게 모르게 이정원도 김찬규에 대한 마음의 짐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별소리 없이 저 냉랭함을 전부 받아줬겠지.

결국 근원은 삼촌이라는 쟤네 대표였다. 그 인간 하나 때문에 애들만 고생이었다. 그리고 그걸로 나도 피해를 봤다. …1차 때 나랑 문채민이 분위기 잡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건 그냥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얘네들도 슬슬 자리를 뜰 기색이었다. 이정원은 이제 재평가를 받을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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