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감정의 골이 해결됐으니 제 실력을 발휘할 타입이었다. 김찬규도 저 마음가짐이라면 모두에게 새로운 인식을 쌓을 수 있을 거였다. 아직은 고작 1차 미션이 끝난 지점이었다.
소소한 기 싸움 장면은 방영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싸운 팀이 있었던 게 행운으로 다가왔다. …집중 타깃은 거기일 테니까. 화장실 가다가 별걸 다 알게 된 상황이었다.
* * *
이벤트 촬영 후 하루 이틀은 그냥 쉬었다. 다시 바빠질 걸 떠올리면 이런 날도 있어야 했다. 종일 누워 게으름을 피운 일상이었다.
…시스템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살 수 있었는데. 슬픔에 잠겨 천장을 바라보곤 한탄했다. 아주 잠시만 맛본 다디단 여유였다.
그다음 곧바로 할 일들을 처리해나갔다. 발을 담근 이상 멈추지 말고 직진해야 했다. 이번에도 코인을 벌기 위해 연습실을 예약했다.
버그로 자금줄이 반토막이 난 시점이었다. 현실 지갑과 게임 지갑이 비례해서 더 슬퍼졌다. 집은 연습할 환경이 되지 못해서 매번 돈을 써야만 했다.
층간 소음이라도 발생하면 골치 아플 사건이라고 확신했다. 돈 몇 푼 때문에 구설수를 만들 수는 없었다. 방송 매체를 탄 이상 나도 이젠 공인이었다.
그렇게 몇 주가 다시 흘러갔다. 입소를 위해 방송에 속도가 붙은 참이었다. 2화에선 1화에 나오다 만 등급 평가가 이어졌다.
여기서 큰 쪽으로 분류되는 소속사가 대거 등장했다. 화제성이 강한 연습생들의 연속이었다. 강태오와 윤명, 이 둘이 이 부분에 속해 있었다.
편집부터 힘을 준 게 티가 나 헛웃음 지었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은 제작진이지…….
강태오는 개인 인지도가 높은 연습생이었다. 실력도 괜찮은데, 얼굴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윤명은 소속사가 유명 중견 기업의 자회사였다. 언급도 많이 되는 인물이니, 주목도부터 남달랐다.
같이 일해 봐서 알고 있었는데, 사심 따위는 정말 감출 줄 모르는 제작진이었다. 좋게 말하면 똑똑하고 나쁘게 말하면 치사했다. 그래도 돈을 좇는 계산은 아주 비상했다.
나는 2화에선 별다른 분량이 없는 것 같았다. 간혹 나오는 리액션 컷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표정이 다채롭지 않아 아쉬웠다. 인근에 있던 이유준 덕분에 같이 잡힌 느낌이었다.
여기서 대활약한 건 바로 권혜성이었다. 작은 사건에도 풍부한 행동이 눈에 띄는 성격이었다.
잊을 만하면 화면에 잡혀 나와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다. 1화와 이어 환기 이미지가 완벽하게 굳어진 것 같았다. 재미 요소 삼기에는 적합한 유형이었다. …나도 아는 걸 남현욱이 모를 리가 없지.
최종 평가에서 B 등급을 받은 광경도 얼핏 지나갔다. 여긴 다이내믹한 성장을 보여 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나름 감수하던 장면이었다.
고생한 걸 보여 주지 않아 조금 씁쓸했지만, 그래도 서사만 구구절절 풀 순 없는 일이었다. 쉽게 갈 길이었으면 데뷔를 하지 못한 연습생도 없었을 것이다. 통편집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원래 방송이란 매우 냉정한 세계였다.
그러다 3화에서 재밌는 걸 목격했다. 바로 그룹 배틀의 초입 부분이었다. 이 편에선 내가 괜찮게 다뤄진 것 같았다. 이미지 관리하겠다며 뇌에 힘준 덕분이었다.
날카롭게 생겨선 의외의 허당미를 내세웠다. 티격태격했으나 결국은 당해 준다는 형식이었다. 사나운 외모와 큰 덩치로, 그렇지 못한 인자한 성격이 대비됐다.
경련이 날 정도로 웃고 다닌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얘네… 나도 환기 캐릭터로 낙점 지었나 본데? 새로운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방송 시점으로 보아하니 이건 초반 이미지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사실 이런 캐릭터 선정의 원인은 뭐 때문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인기 있는 연습생 중 하나, 문채민에게 3순위로 뽑힌 작용이었다. 당시에는 얼떨떨했으나 제작진의 눈에 든 배경이 된 것 같았다. 정말 운도 좋았다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1차를 준비하며 쓰러질 것 같았던 체력이었다. 고생과 결과는 일맥상통한다고, 꿋꿋하게 버티길 잘했다며 칭찬했다.
거기에 걱정하던 김찬규도 적당히 잘 숨겨진 듯했다. 초반의 무성의하던 기묘한 신경전을, 방송국 인간들이 써먹을까 봐 전전긍긍했었다.
아직 어린애인 김찬규가 걱정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반작용으로 같이 다뤄질 내 캐릭터가 무서웠다. 팀원인 이상 한쪽이 어긋나면 전체에 그 조건이 씌워질 수밖에 없었다. 분란의 아이콘… 그런 건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잘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문채민의 리드로 커버를 한 상태에서, 타 팀의 연습생 둘이 다퉜다. 거기에 포커스가 쏠리며 이건 안 쓴 느낌이었다.
소소하지만 큰 사건을 비껴 나간 현황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처음으로 순탄하게 풀린 방송같았다.
"…혹시 해프닝 실드?"
다급하게 끼고 있던 아이템을 바라봤다. 1차 미션이 완료된 후 받게 된 보상이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어 보였는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갖고 있던 상품이었다. 길 가다 돈이라도 주우려나 싶어 넘겼는데……. 이게 엄청난 쪽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그룹 배틀에서 승리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존재감이 크진 않았으나 분량이 괜찮아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아직은 절반도 오지 못한 구간이었다.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천천히 밟아 가기로 하고 속도를 맞췄다. 성급하게 굴어 봤자 나만 힘든 일이었다. 일단은 한숨을 돌려 기쁜 심정이었다.
* * *
"형, 저 3화 봤어요."
"괜찮았지?"
"채민이랑 둘이서 죽이 잘 맞던데요?"
"문채민 연습생? 신경 많이 써 주더라. 아주 어른스러웠어. 그나저나 너는 어때?"
"음, 연락해 봤어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래.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해신이 형, 그럼 저는요?"
"…어?"
"저는 어때요?"
"너도 뭐……."
"…왜 말을 하다 마세요? 저 서운해요!"
"…아니, 같은 팀은 안 해 봤으니까……."
"으음…. 진짜 그게 전부예요?"
"…우리 방송부터 집중하자."
대망의 3차 입소 날이었다. 동일하게 임시 숙소를 배정받았다. 발표식 이후 변동될 것을 염두에 둔 그림이었다. 6인 1실 체재가 이어졌다.
대충 방이 10개까지 줄어든다는 뜻이었다. 이 인원을 보는 것도 마지막인 밤이었다. 풀리지 않은 캐리어가 구석에 쌓여 있었다. 이게 은근한 긴장감을 나타내는 요소였다. 누군가는 그대로 저걸 들고 다시 떠나야 했다. …그게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게 문제지.
오늘은 4화의 방영일이기도 했다. 방송과 촬영 일정에 잡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발표식이 내일로 밀렸는데, 몇 번 겪어 본 사례라 담담한 편이었다.
이런 서바이벌은 일정 조율이 힘든 편이었다. 문제라도 터지면 단계가 전부 무너질 포맷이었다. 하루 정도의 변동 사항은 작고 소소한 규모였다.
그래서 제작진도 자연스레 얼버무리는 것에 능숙했다. 1차 배틀의 주된 무대가 공개되는 부분이었다. 말도 안 되게 짧은 투표 기간이 만들어져 웃겼다.
이 시간 내로 표를 끌기는 아주 팍팍했다. 인지도 있는 연습생들만 노났다며 상황을 지켜봤다. 초반인 만큼 나머지는 비등비등할 일이었다.
결국 본녹화는 불가피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늦은 저녁, 숙소 휴게실에 연습생들이 모여들었다. 멀끔하게 앉아서 진행을 기다리는 광경이었다.
코밑을 훑으며 정면을 바라봤다. 대형 스크린이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다 같이 본방송을 방청하는 시간이었다. 주변을 훑어보니 스태프는 몇 안 보였다.
다급하게 대체용으로 잡은 스케줄에 메인 제작진은 투표 집계로 바쁠 예정이었다. 구석에 설치된 카메라 몇 대가 전부였다.
아예 풀어진 모습은 아니었으나 빠져나간 게 있어 걱정은 되지 않았다. 물론 그만큼 눈에 띄지도 않은 편이었다. 반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현장에서 잘했으니 거기에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아니면 운명에 맡기는 거고.
대충 봤을 땐 상대방도 순탄한 흐름이었다. 대립 구도가 없는 안정적인 팀원과 유달리 독보적인 성향의 인물이 있었다. 문채민을 제외한 트레픽 연습생 우정환이었다. 특유의 유들유들함이 모두를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저런 유형, 어딜 가나 하나씩은 끼어 있지……. 실력이 좋은 대신 말이 없는 윤명이었다. 얘를 대신해서 리더 포지션을 맡아준 게 틀림없었다.
쟤도 문채민이랑 동갑이라면 아주 어렸다. 그런데 어째 여기는 나이가 적을수록 멘탈이 강하고 능숙한 성격을 지닌 듯했다. 트레픽 종특인가 싶다가도, 이유준을 보면 아니었다.
쟤는 강하긴 한데 다른 방면으로 특이했다. 이유준이 별종일 수도 있겠다며 자연히 넘겨 버렸다. 이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채민 연습생과 떨어지게 됐는데, 자신 있나요?]
: 채민이랑 떨어져서 아쉽긴 한데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저희가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요.
역시 이 둘로 경쟁 구도를 붙여 놨다. 남현욱은 트레픽 소속사에게 뭐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저번부터 알차게 써먹는 소재의 연습생들이었다.
내가 저기 사장이었다면 답답함에 가슴을 내리쳤을 일이었다. 경연 자체가 대립 관계이기는 했다. 하지만 좀 더 강하게 부추기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저기에 같이 앉아 있는 것 같았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문채민과 우정환을 발견했다.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댄 자세였다. 우정환의 대사에 문채민이 옆을 돌아보는 듯했다. 사이가 좋다지만 도발적인 멘트를 했기 때문이었다.
우정환은 그런 문채민에게 웃으며 장난을 쳤다. 딴청을 부리며 빠져나가는데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쟤네는 여기에 카메라가 없는 줄 아나 보다. 그래도 나보단 현명한 애들이라 별 탈 없을 것 같아 방송에 집중했다.
[문채민 연습생, 같은 소속사의 우정환 연습생이랑 떨어졌어요. 어떠신가요?]
: 경쟁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전 지금 팀에 자신 있습니다.
[의리로 일심동체! 트레픽즈!]
"하하!"
휴게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둘의 캐릭터를 이용해 예능적인 요소의 장면을 만들어냈다. 저 둘은 대충 봐도 오래 알고 지낸 관계였다. 하지만 경쟁에 있어선 절대 봐주지 않는 성향들 같았다.
그나저나 그 고생을 하고 자신 있었다고 말했다. 문채민, 쟤도 그다지 멀쩡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심하게 직진하는 경향인걸…. 저번에 얼핏 듣기로는 승부욕도 있다고 말했다. 실력은 있었으니 허세는 아닐 텐데…….
원래 천재들은 어딘가 좀 맛이 가 있기도 했다. 너무 똑똑해서 겪는 부작용이라고 넘겨버렸다. 일단은 나도 문채민에게 도움받은 전적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밉게 볼 수도 없는 애였다.
저번 화에서 나온 연습실 장면이 이어졌다. 초반인 만큼 모두 멀쩡한 상태였는데, 김찬규도 꽤 열심히 임했다. 특유의 말투도 중반부를 넘어서곤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아, 다행이다. 잘 빠져나갔네….
문제는 다음 장면이었다. 본무대 직전 다른 팀이 포커스됐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기가 싸웠다는 곳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