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인근을 돌아보며 분위기를 살피는데, 탈락의 갈림길에 선 만큼 어딘가 우중충했다. 밝은 성격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차분한 태도를 보여줬다.
이제서야 뭔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나와 얘네는 안정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최종 등급 평가의 순위를 지키겠다고는 하지 못했지만, 탈락하는 건 60위 이하라고 설명 들었다.
3년간의 스태프 경력을 털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는데 60위 밖으로 떨어질 애들은 아니었다.
솔직히 3화까지는 내가 조금 애매했다. 분량이 특출나지 않아 가려질 위기로 보였다. 하지만 4화를 보고서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본방송이 끝난 후 방으로 돌아가기 전이었다. 반응을 살펴보고 싶어 PC를 찾았는데, 핸드폰은 압수당해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너네도 갈 거야?'
'네. 저도 볼래요.'
'저도요!'
사람이 떠올리는 게 비슷하긴 한 것 같았다. 인파가 가득한 컴퓨터 앞으로 차례를 기다려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대강 여론을 살펴봤다.
자세한 건 훑어보기 빠듯한 시간이었다. 어차피 깊게 파고들면 욕도 같이 볼 일이었다. 큰 틀만 확인하고자 검색을 했다가 거기서 괜찮은 정황을 발견했다.
- 신해신 얘 무대 아래에선 너무 순하게 굴어서 잘할까 걱정했는데 노래랑 존나 잘 어울려 다크 섹시 개찰떡
- 상남자의 냄새가 난다 ㅠㅜㅠㅠㅠㅠㅠㅠㅠㅠ 엄마 나 쟤한테 설렜어
- 역시 겉가죽이 대활약했다.
- 아 ㅋㅋㅋㅋㅋㅋ 겉가죽이 대활약했대 ㅋㅋㅋㅋㅋㅋ 왜 이렇게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
- 신해신은 지금부터 자신의 겉가죽에게 감사하도록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무슨 뒤집어쓴 것도 아니고 ㅋㅋㅋㅋㅋㅋㅋㅋ 저기요 원래 저렇게 생긴 사람이거든요.
- 경연 전에는 얼레벌레의 의인화였던 것 같은데……?
- 맞아 기본적으로 착하긴 하더라.
- 얼레벌레는 모르겠고, 천적은 하나 있던데 최영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최영서 겁대가리 없는 것 봐 ㅋㅋㅋㅋ 쟤한테 덤비고 앉아 있네 ㅋㅋㅋㅋㅋ
- 우리 아기날다람쥐영서… 한입거리 였을텐데 봐줘서 고마워…….
- 내가 보기엔 영서가 이긴 듯
-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판정 최영서 완승
- 신해신 100번 싸우면 100번 져줄 것 같아 ㅠㅠㅠㅠㅠㅠ
- ㅋㅋㅋㅋㅋㅋ 차라리 사납게 생겨서 다행이다…. 먼저 시비 거는 애들은 드물 거 아니야
- 저기요……. 같은 팀에 대놓고 한 명 있는데요.
- 시비보단 장난인 것 같지만 괴롭히고 싶어지는 사람이랄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문채민이 종종 신해신 구해줌
- 문맏내 왕자님이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왕자님보단 구조대 같은데 덤덤한 눈으로 건져가더라
- 구조대 ㅋㅋㅋㅋㅋㅋㅋ 챔니 구조대야??
- 아니 무슨 물가에 떠다니는 나뭇잎도 아니고 뭘 건져가 ㅋㅋㅋㅋㅋㅋ
- 아 취급들 너무하네 ㅠㅠ 근데 공감된다 ㅋㅋㅋㅋㅋ
'…….'
'큽…….'
'…웃지 말아 줄래.'
'…형이 착해서 그런 거죠.'
성격이 더럽다는 얘기를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걸 떠나 내가 단호하지 못했다. 덕분에 팀원들과 쉼 없이 장난을 치게 된 일화가 있었다. 자의라기보단 타의에 의한 장면이었다.
항상 당한 입장이었는데, 그게 팀 내에선 잘 놀아주는 형 같은 캐릭터로 해석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단골처럼 찾아오곤 하는 연습생이 한 명 있었다.
…최영서. 수시로 나를 놀리며 재롱을 부리곤 했던 인물이었다. 정도는 지켰지만, 내가 지쳐 보이면 구해주는 문채민도 언급이 됐다. 이 관계성이 시청자들에겐 좋게 통한 것 같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거기에 평소와 비교된 무대 장면도 한몫을 해줬다. 곡이 나랑은 잘 어울렸던 듯했다. 이렇게 생긴 탓에 얻어 가는 이득이 있네. 왜지, 뭔가 슬픈 것 같았다…….
겉가죽 드립이 조금 살벌했지만, 소소한 화제가 되며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엄청난 활약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1차에선 탈락하진 않겠다며 안도했다.
* * *
"그럼 이제부터 1차 순위 발표식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59위는……."
탈락을 면한 연습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을 59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이미 지쳐 있었다. 아무렴,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피라미드의 좌석이 하나둘 채워졌다. 같이 무대를 했던 팀원들도 섞여 있었는데 호명되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가는 길에 눈이 마주치면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여전히 해맑고 친화력 높은 애들이었다. 물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수더분하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밤샘 연습에도 활기차던 연습생들이었다. 어쩐지 저 기력이 부러운걸…. 그때 익숙한 연습생이 한 명 등장했다. 문채민의 동료이자 또 다른 트레픽 소속의 연습생 우정환이었다.
"마스터 여러분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씩씩하고 능글맞은 소감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불려 희한하게 쳐다봤다. 확실히 잘하긴 했으나, 문채민에겐 묻히는 경향이 있는 듯했다. 1차 미션에서도 리더 역할치고는 분량이 적은 편이었다. 그건 윤명 때문이겠지……? 좋은 일 하고서도 아쉽게 묻혀 버린 인물이었다.
윤명은 말수가 적은 사람답지 않게 존재감이 강했다. 같은 팀을 해선 안 될 연습생 리스트가 새롭게 갱신했다.
우정환은 본인도 인재지만, 주변에 천재가 많아 손해 보는 캐릭터같았다. 당사자는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저걸 긍정적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쟤도 안 그러는 척, 독한 성격인 듯했다. 트레픽 애들은 뭘 먹고 자란 걸까…….
"그럼 이제 20위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8위는, 감미로운 보컬로 극강의 무대 케미를 보여 주신 분이죠? 축하드립니다, 이정원 연습생"
정신력 하면 대표 격인 사람의 등장이었다. 이정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최종 평가 때부터 조금씩 두각을 드러내며 눈에 띄었다.
그 당시도 화해 전이었지만 괜찮은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좀 더 무섭게 상승할 라인의 연습생이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스탯을 제대로 발휘할 일이었다.
이게 마지막 과소평가라며 눈을 깜빡였다. 여기 수준에서 그칠 만한 능력치가 아니었다. 덤덤한 얼굴로 본인 의사를 제대로 피력해 왔다.
역시 첫인상이 잘못된 게 분명했다. 저게 어디를 봐서 져 주는 사람인 거지……? 그때의 나는 많이 피곤했던 것 같았다. 시간이 되면 시력 검사를 다시 받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좋은 모습으로 보답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슬슬 20위 초반대에 들어가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선 내 이름이 불려야 할 일이었다. 권혜성과 이유준은 꽤 덤덤했는데, 떨 줄 알았던 것에 반하여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무릎 위로 올라간 손을 가지런히 정리한 채 정면을 바라보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나만 어색한 것 같지……. 불릴 건 알고 있었지만 불안해 하던 상태였다.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조용히 반대편의 일들도 그려 봤다.
비관적이어도 이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나를 책임져 줄 인간은 나 자신밖에 없었다.
"22위는, 반전 매력으로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신해신 연습생"
"해신이 형! 축하해요!"
…아, 불렸다. 깜짝 놀라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최종 순위보단 낮았으나 좋은 선방이었다. 역시 4화가 아니었으면 위험했을 것 같았다.
떨리는 가슴에 단상을 향해 걸어 나가기 직전이었다. 사방에서 같은 팀을 했던 팀원들이 축하의 인사말을 남겨 줬다. 문채민은 굳이 근처까지 다가와서 이야기했다. 그동안 같이 고생했다고 정이라도 든 것 같았다.
"형,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저 애는 반드시 불릴 수밖에 없는 연습생이었다.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부름에 맞춰 앞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봤다. 38위로 먼저 불려 앉아 있던 김찬규였다. 박수를 보내는 게 진심처럼 다가왔다.
고우림의 신호에 맞춰 소감을 발표한 찰나였다. 이런 게 처음이라 제대로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 우선, 이렇게 높은 순위를 받을 줄 몰랐습니다. 많은 분의 응원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신해신이 되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방에 깔린 수십 대의 카메라가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있던 곳은 언제나 저 뒤편 어딘가였다. 뜨거운 조명에 어색하면서도 허리를 숙여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피라미드의 위로 걸어 올라갔다. '22'라는 숫자가 적힌 의자였는데, 높게 보이는 풍경에 감회가 색달랐다. 여기는 말단 스태프였던 내게 너무 낯선 공간이었다.
그 뒤로도 발표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권혜성은 16위, 이유준은 15위를 차지했다. 둘 다 나름의 캐릭터가 있는 애들이었다.
앞의 인물은 밝은 성향으로, 뒤의 인물은 소속사 일로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본인 스탯에 비해 낮은 순위라고 받아들여졌다.
쟤네들도 뒤로 갈수록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천재였다. 남의 걱정을 해 줄 때가 아닌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빼고 전부 다 잘하고 있었다. 2차 미션은 진짜 이를 갈아서 해야 할 것 같았다. 녹화를 구경하며 앞날을 대비했다.
10위권대로 올라가니 분위기가 남달라졌는데, 높은 자리다운 치열한 공방이었다.
예상대로 전원 인기 있는 연습생이었다. 문채민은 5위에 안착하며 제 입지를 강하게 다졌다. 원래도 대단했지만, 다시 봐도 놀라운 애였다.
가끔 얽혀 오던 관계의 윤명도 호명됐다. 쟤는 6위에서 3위까지 올라간 성적을 보였다. 코어 팬층이 탄탄한 연습생다웠다. 빠른 스타일의 행보가 거칠기 그지없었다.
생긴 건 말랑해서, 보이는 건 참 터프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가?
그리고 1위는 모두의 예상대로 저 사람이었다.
"1차 순위 발표식 최종 1위는 바로, 축하드립니다. 강태오 연습생입니다."
"많은 사랑과 응원 보내 주심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묵묵한 표정의 강태오가 등장했다. 마이크에 대고 발표하는 게 능숙한 장면이었다. 연습생이라지만 태생부터 여유로운 타입이었다.
우직한 걸음으로 계단을 스쳐 올라가는데, 강태오에게선 항상 짙은 스타성이 느껴졌다. 이쯤 되면 방송에서 작정하고 죽이지 않는 이상 확실했다. 얘는 데뷔할 수밖에 없는 연습생이었다.
방금 막 마지막 60위가 불린 참이었다. 울고 있는 연습생 뒤로 탈락한 자들이 남아 있었다. 입안이 썼으나, 찾아와 버린 이별이었다.
엔딩이 가까워지는 녹화 속에서 아는 얼굴이 있나 열심히 찾아봤다. 마중은 어떻게 해 줘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알고 보니 나도 정이 든 모양이었다. 여기선 이성보다 감정이 우선시됐다. 함께한 시간이란 건 사람을 무르게 만들었다.
* * *
눈물 바람의 작별 인사가 이어졌다. 서바이벌 중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구간이었다. 숙소 앞에 서서 모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아는 인물이 섞여 있었다. 제일 처음 같은 방을 썼던 연습생 한 명이 탈락했다.
C 등급이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본경연에서 실수를 크게 해 버렸다. 하필이면 팀도 싸움이 났던 그 조였다. 모든 포커스는 부딪친 둘에게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팀원들은 제대로 나올 기회조차 없어 보였다. 그걸로 인해 피해를 본 경향이 강한 듯했다. 울먹거리는 애를 토닥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