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옆에는 권혜성도 함께 있었는데, 얘도 초반에 룸메이트였던 일원이었다. 아쉬움에 모두가 미련이 있었던 것 같았다.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
"울지 말라고 하는 건 잔인한 것 같네. 그냥 울어."
"형이 울라고 하니까, 눈물이 안 나와요."
"…그럼 울지 마."
뭔가 이상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달래 주던 권혜성도 우리를 쳐다봤다. 하여간에 사방이 온통 난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는 연습생들이 몰려왔다.
전부 같은 방을 썼던 연습생들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일부는 울고 있었는데, 누가 보면 자기들이 탈락한 것 같았다.
"야, 탈락한 나도 안 우는데, 왜 네가 울어."
"몰라, 이 멍청아, 얼굴 부으면 다 너 때문이야."
"와… 집에 가는 사람한테 하는 말 봐……."
"진짜 너네는 사이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이제는 정말 헤어질 시간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가는 인형들이 보였다. 얘도 그만 떠나려는 기색이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슬퍼하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곤 씨익 길게 웃어 보였다.
"탈락했다고 연락 안 받으면 안 돼! 내가 계속 전화할 거야!"
"…입소하면, 핸드폰 걷어 가는 것 잊었어?"
"그럼 퇴소했을 때 답장해! 다들 꼭 데뷔해요! 난 간다! 모두 화이팅!"
손을 흔들어 주며 연습생들과 인사를 나눴다. 우리는 다시 녹화장에 들어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뭔가 좀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걸 떠나서, 이게 간절했을 인물들이 많았다. 이런 부분은 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 * *
연습복으로 갈아입은 후 모인 장소였다. 확 줄어 버린 인원이 실감 났는데, 40명이 빠졌으니 5분의 2는 없는 거였다.
어딘지 많이 허전해진 세트장이었다. 서바이벌의 잔혹성에 혀를 내둘렀다. 스태프일 땐 정말로 모르던 부분이었다. ……내가 이렇게 냉정한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구나.
왠지 모를 회한의 감정이 들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무시하던 점이었다. 사람은 진짜 착하게 살아야 했다. 어쩌면 그 업보를 지금 돌려받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번 2차 순위 발표식에서 탈락하는 연습생은 25명입니다."
"아, 시작이다……."
"나, 심장 터질 것 같아."
쉬지 않고 들어오는 공격이었다. 조금 전에 지인들을 보내고 온 길이었다. 텀이라도 좀 주지… 참 너무했다.
살아남자마자 바로 좁아진 입구를 알려 줬다. 생존할 수 있는 인원은 35명이란 소리였다. 35위는 진짜 높은 순위였다.
1차에선 예측한 것보단 안정권에 진입했다. 물론 이게 계속된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여론은 단박에 뒤집히기도 했다.
나같이 배경 없는 유형에겐 더 심했다. 게다가 35위라면 22위와 그리 멀지 않았다. 데뷔조는 무슨, 파이널에 대한 확신도 없던 찰나였다. 일단은 계획대로 전진하기로 다짐했다. 솔직히 내가 택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본격적으로 팀 꾸리기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금부터 연습생 여러분은 대화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지켜보고 있으니,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60위 남형도 연습생부터 안내에 따라 이동 부탁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지시가 내려졌는데, 이에 연습생들이 당황하며 두리번거렸다. 말하지 말라는 신신당부가 엄했다. 어쩔 수 없이 눈치만 봐야 할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전부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모두 사전부터 염두에 뒀던 바였다. 고우림의 멘트에 양옆에 있던 권혜성과 이유준이 나를 돌아봤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양심에 찔려서 시선을 피했다. 얘들아, 제발 티 좀 내지 말아 줄래……. 이제는 말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적당히 눈짓으로 갈무리하라고 눈치를 줬다. 본인들도 이거일 것 같다며 말한 전적이 있었으면서……. 이제 와선 신기한 척하는 게 당황스러웠다.
…자기들만 발을 빼려고 하다니 너무해. 어찌 됐든 순전히 운에 따른 구성이었다. 짠 건 짠 거고, 밀리면 답이 없었다.
"자, 이번에는 22위 신해신 연습생 출발해 주세요."
많은 이가 먼저 사라진 곳이었다. 방향을 떠올리며 몸을 움직였는데 얼마나 걸었을까, 대형 캔버스가 나타났다. 1번부터 10번까지 10개의 패널이 붙어 있는 장면이었다.
그 안으로는 피켓들이 접착돼 있었다. 3분의 2 정도는 자국만 남고 사라진 듯 했는데, 아마도 먼저 출발한 연습생들이 가져갔을 것이다. 여기서 사전에 정해 둔 걸 찾아냈다.
"1번부터 10번까지의 숫자는 신해신 연습생이 들어갈 방의 넘버입니다. 각 방에는 메인 보컬, 서브 보컬, 메인 댄서, 서브 댄서, 메인 래퍼, 서브 래퍼 총 6개의 포지션이 정해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 중 하나의 포지션을 선택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미 선택된 것이라도 순위 싸움으로 상대방을 밀어내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걸 고르시겠습니까?"
아는 걸 전부 맞춰 보니 정답이었다. 이렇게 맞아떨어지면 나한테는 땡큐지. 제작진의 설명은 대충 듣고 흘려 넘겼다.
사전부터 짰던 부분이라 고민하는 척하는 게 고역이었다. 턱에 손을 올리고 신중히 바라봤다. 이곳에서 원하는 건 오직 하나였다.
우리가 사전부터 정해 둔 방은 1번이었다. 제일 앞 순서여서, 그나마 기피될 것 같았다. 그걸 노리고 저쪽에 가자고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포지션 관련일 걸 알아 그 부분도 정해 뒀다. 내가 노리는 건 바로 서브 보컬이었다.
보통은 메인이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이건 결국 경쟁이었다. 어떤 식으로 대결을 펼칠지 유추됐다.
그래서 서브를 선택하자고 마음먹었다. 능력 이상으로 욕심부리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지……. 자리도 그리 안정적인 순서가 아니었다.
남들이 조금이라도 덜 탐낼 걸 찾아야 했다. 그래야 뺏기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메인 보컬의 피켓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도대체 누가 가져간 거지? 의문이 들었다.
"1번 방의 서브 보컬을 선택하겠습니다."
"신해신 연습생은 1번 방의 서브 보컬 포지션을 선택하셨습니다. 해당 방으로 이동해 주세요."
다행히도 이건 아직 붙어 있는 피켓이었다. 캔버스 위에서 떼어 낸 걸 소지한 채 방을 찾았다. 셋 중에선 내가 제일 먼저인 순서였다. 애들이 오기 전까지 무조건 버텨야 할 입장이었다.
변수가 많은 작전이라 걱정됐는데, 내색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문고리 위로 손을 올리곤 타이밍에 맞춰 문을 열었다.
"어? 신해신 형이다!"
몇 명 없었지만,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넓은 공간에 앉아 있는 3명이었다. 천운이었는지 여기에 인파가 쏠리지 않은 듯했다. 주변을 돌아보며 팀원들을 파악했는데, 가장 먼저 날 반긴 건 모르는 인물이었다.
어려 보이는 얼굴과 활기찬 느낌상 권혜성 또래일 거라고 확신했다. 일단은 가볍게 마주 인사해 줬다.
"안녕하세요, 신해신입니다."
"안녕하세요! 배민형입니다. 18살이에요!"
역시 발랄한 게 분위기 메이커 스타일이었다. 일단 나랑은 접점이 없던 사람으로 눈짓을 보아하니 저쪽은 날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대충 흐름에 맞춰 같이 대화를 나눴다.
"형 무대 잘 봤어요! 디베럽 짱이었어요."
"아… 감사합니다."
1차의 무대를 통해 상대방에게 각인된 것 같았다. 민망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였는데 그러기가 무섭게 또 다른 사람이 말을 걸었다.
여기도 초면인 낯의 연습생 같았다. 배민형이라는 인물보단 성숙한 타입이었다. 성인이려나……? 타고난 딕션이 래퍼라는 걸 알려 줬다. 차분한 타입이라서 걱정은 덜었다.
"안녕하세요. 성신원이라고 합니다. 21살이에요. 신해신 형 맞으시죠?"
"아, 네. 안녕하세요, 신해신입니다. 22살이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 와서 그걸 마주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팀원들의 상태가 훌륭한 게 랜덤이라고 보기는 힘들 운이었다.
…혹시 이것도 해프닝 실드의 효과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금을 즐겼다. 여태까지의 태도를 봐선 순탄대로였다. 그때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었다.
"해신아."
"…어? 정원아, 너도 여기야?"
안면이 있던 이정원이 여기에 들어와 있었다. 놀란 마음에 사고가 정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 걸 먹다 훅하고 쓴 게 들어온 심경이었다. 얘가 있다면 그리 쉽지는 않겠다고 체념했다.
솔직히 이정원이랑은 대화해 본 게 한 번뿐이었다. 이름은 텄다지만, 관계 자체는 별거 없었다. 그래서 어색하게 웃으며 대처해야 했다.
다른 것보다 얘는 좀 무서운 기질이 있었다. 김찬규랑 화해했다지만 타고난 독기 인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 비어 있던 패널이 떠올랐다.
서브 보컬 옆의 사라진 메인 보컬이었다. ……이정원이 가져갔겠네. 이제야 모든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일단은 나랑 동일 포지션이 아니었는데, 그걸 위안 삼으며 주제를 돌려 봤다.
"잘 지냈어? 1차 무대 잘 봤어."
"응, 잘 지냈어. 너네 무대도 멋있더라."
"그래? 고마워. 이번에는 같은 팀이네."
"그러게. 같이해 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나랑? 왜? 의문만 떠오른 답변이었다. 기울어지려는 고개를 간신히 버텨 냈다. 안 돼, 신해신. 티 내지 마.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어투에서부터 기가 센 게 느껴져 많이 부담스러웠다. 서둘러 문을 보며 다른 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우리 팀엔 2개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권혜성과 이유준이 들어와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이게 전부인 것도 아니었다. 더 높은 사람이 와서 뺏기면 끝이었다. 모두가 입장을 끝낼 때까진 안심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정적 속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그때, 타이밍에 맞춰 문고리가 돌아갔다.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나타났는데 실루엣을 판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구지?
"…형!"
"어, 혜성아."
다행히도 정해 둔 대로 권혜성이 등장했다. 댄서 패널 중에서 메인이라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름 잘 차지한 모양이었다.
신나게 손을 휘적이며 달려오는데, 처음으로 권혜성의 얼굴이 반갑게 느껴졌다. 적막을 깨 줄 수 있는 지인의 등장이었다. 편안하게 자세를 고치며 긴장을 풀었다. 쟤를 보고 좋아할 일이 생길 줄이야…….
"안녕하세요! 권혜성입니다!"
다른 팀원들과 인사 과정을 거치면서도 친화력이 좋아서 금방 녹아들었다. 인싸 기질로 미묘한 어색함을 날린 권혜성이었다. 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이유준도 입장했다.
순위가 붙어 있던 조건이라 잇따른 차례였다. 느긋하게 걸어 들어오며 손을 흔들었다. 적당히 놀랐다는 표정도 함께 짓고 있었다.
…역시 이유준, 눈치와 더불어 여러가지로 비상한 인물이었다. 곁들여 오는 말까지 완벽한 수준이라 당황스러웠다.
"…형, 혜성아. 둘 다 여기였어?"
"…그러게, 셋이 붙었네."
"와~ 같이 무대 한다!"
능청스러운 태도로는 손에 꼽아 볼 수 있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너무 잘하잖아…….
의문 어린 표정을 짓는 게, 아주 뻔뻔한 성격이었다. 결국 얘네도 내 편이어서 다행인 사람들이었다.
"어, 유준아."
"…정원이 형? 형도 여기였어요?"
"응, 들어오고 보니, 아는 사람들이 있네."
이정원이 이유준에게 말을 걸었는데, 이번에는 진짜로 놀란 기색이었다. 저렇게 크게 뜬 눈은 처음 보는 듯했다. 이제 보니 둘은 조금 비슷한 부류인 것 같았다.
큰 틀은 다르나 결 자체가 흡사하게 느껴졌다. ……왜 내 주변엔 이런 애들밖에 없는 거지. 독하다 못해 숨 막히는 애들만 넘쳐 나서 탈이 날 것 같았다. 나와 비슷하게 잘 휩쓸리는 사람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