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45화 (45/328)

45화

"와, 다들 아시는 사이인가 봐요?"

"네, 해신이 형이랑 혜성이랑은 자주 붙어 다녔어요. 정원이 형은 바로 저번에 같이했죠?"

"그렇지. 이번에도 같은 팀이네. 잘해 보자."

배민형이 입을 가리며 호들갑을 떨어 왔다. 이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성신원이었다.

저 둘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대화하는 빈도 수만 봐도 우리보단 서로가 편했다. 들키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는데, 이유준이 잘 마무리 지었다. 이정원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특유의 어른스러움으로 주변을 눌러 버렸다.

…쟤는 좀 무섭다니까. 어쩌다 보니 강한 우연으로 기정사실이 된 것 같았다. 사실 반은 짜고 친 인연이었다. 불법은 아니었으니, 나는 떳떳했다.

이런 건 전부 안 걸리면 그만이었다. 불만이면 스태프로 3년 일하고 회귀하면 됐다. 아… 왠지 또 나만 타격 입는 것 같은데. 유리를 지나쳐 종이 같은 정신력이라 이래저래 많이 힘들었다.

* * *

- 아아, 고우림입니다. 모든 연습생의 입장이 완료되었습니다. 같은 방에 있는 6인이 2차 무대의 팀 메이트입니다.

알림음이 울리며 방송이 들렸다. 한쪽 구석에 설치된 스피커였다. 고우림이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위 순위 연습생들은 다른 방으로 입장한 것 같았다.

이 사실에 가장 낮은 순위였던 배민형이 안도했다. 여기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번 팀은 정말 괜찮아 보였다. 일부 인원 성격만 배제하면 말이다…….

실력 자체는 밸런스가 좋았는데, 파트도 크게 겹칠 일 없이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정원이 좀 걸렸지만, 얘는 결국 이유준과였다.

1차에서 같이해 본 전적도 있으니 이유준에게 담당을 떠넘길 생각이었다. 자고로 동류는 동류가 상대해야 했다. 같잖게 덤볐다간 쪽도 못 쓴다. 난 나를 너무 잘 알았다.

- 팀도 정해졌으니 2차 무대 주제를 공개하겠습니다. 이번 무대는 바로 '랜덤 컨셉 포지션'입니다.

"와! 포지션!"

배민형이 쥐고 있던 피켓을 들어 올렸다. 서브 댄서라고 적힌 게 권혜성과 같은 과였다. ……춤추는 애들은 죄다 저런 걸까 하는 편견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강태오가 떠올랐는데 아무리 봐도 걔는 이쪽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성격은 아닌 걸로 보였지만, 저렇게 활기찬 타입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외관과 어울리지도 않았는데 얘네만 그런 거라며 잡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포지션은 전부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확고한 캐릭터들이 보였다.

- 이번에는 팀 대결이 아닙니다. 바로 동일 포지셔닝의 경쟁입니다. 같은 포지션을 지닌 10명의 연습생들은 무대를 통해 순위가 매겨집니다. 1위부터 10위까지이며, 최상위의 연습생들에겐 스페셜 베네핏이 주어지겠습니다.

들고 있던 피켓을 바라봤다. 서브 보컬, 메인 보컬이 이정원에게 넘어가며 지닌 내 파트였다. 보통 주력 멤버들은 메인을 골라 가고 싶어 했다.

강자일수록 높은 단계를 지녔겠다고 염려했다. 그래서 걔네들과의 맞대결은 전력으로 피할 마음이었다.

도전할 바에는 처음부터 안전하게 가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순위에서 밀리면 뺏길 자리였다. 잘못해서 래퍼처럼 무지한 걸로 밀리면 큰일이었다. 이정원이 다른 팀에 갔으면 쟤랑 붙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A+의 압박감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뻔한 상황이었다.

팀 내 경쟁이 아니란 건 큰 이점이었다. 결국 혼자 튈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개인의 실력도 중요하나 큰 그림이 포인트인 대결이었다. 어차피 팬들도 전체적인 퀄리티를 중요시했다. 여러모로 머리를 잘 쓴 미션이었다.

내게도 이득이어서 괜찮은 기회가 만들어졌다. 이정원과 이유준 그리고 권혜성은 각자의 이점에 있어 상위 스탯을 지니고 있었다.

아직 과소평가를 받아 그렇지, 전원이 강자로 보이는 연습생들이었다. 방송 중후반에는 인지도가 달라져 있을 애들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이 점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일명 스폐셜리스트 팀 작전이었는데, 얘네들 사이에서 좋은 무대를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함께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초반 시선은 우리보다 상위 순위에 쏠릴 일이니, 반전 효과를 같이 노려 볼 수 있었다. 대다수가 20위 언저리였으니 관심도가 크진 않을 게 분명했다.

최소한의 바리케이드까지 세워진 경우였다. 착착 이루어져 처음으로 마음이 설렜다.

보상을 못 받아도 전체 퀄리티는 보장이 됐다. 이게 최선이자 최고의 지름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 포지션도 정해졌으니 이제는 곡을 선택해야겠죠.

가장 걱정하던 부분이 등장했다. 선배와의 기억을 이어 회상했는데, 귀찮은 마음에 흘려 넘긴 대화가 많았다. 덕분에 여기까진 유추할 수 없었다.

'그거 곡 고르는 것도 빡셌지.'

'…그래요?'

'뭔 참가자들 속여 먹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애들 불쌍해 죽겠어.'

'네, 네…….'

'너, 내 말 듣고 있냐?'

'…음, 네.'

'…이번 달에 세트 제작 4건 있대.'

'…….'

'야, 신해신! 안 듣고 있었잖아!'

그 뒤로는 잔소리와 함께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선배 얘기 좀 잘 들어 줄걸. 뒤늦은 후회로 더는 회상해 봤자 속만 쓰릴 일이었다. 이번만큼은 부디 무난하길 바랐다.

- 랜덤 컨셉 포지션은 10개의 준비된 컨셉으로 꾸려질 무대입니다. 각 방에 있는 연습생들은 대표 한 분을 뽑아 주세요. 그리고 대표분은 방 밖으로 나와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대표, 누가 하실래요?"

일단 난 안 된단 걸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성격과 맞지 않는 포지션이었다. 1차 때처럼 누군가를 밀어줄 요량이었다. 게다가 아직 운 스탯이 C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재빠르게 모두의 상태 창을 훑어봤다. 이중 가장 높은 연습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 윤명… 문득 어딘가에 있을 자판기남이 떠올랐다. 걔의 운만 빼 오고 싶었다.

"제가 갈까요?"

다들 반응이 없으니 권혜성이 손을 들어 자처했다. 바보같이 활발해 보여도 머리가 좋은 인물이었다. 본인 캐릭터 때문에 장기적인 리더는 되지 못할 거란 걸 아는 듯했다.

그래서 이 부분만이라도 챙기려고 나선 것 같았다. 대충 살펴본바 운 스탯이 특출난 인물은 없었다. 그나마 댄서 둘이 비슷하게 C+였다.

그래, 혜성아, 네가 가라. 운동 계열 항목으로 선곡을 지정받을 수도 있었다. 일단 메인 댄서인 쟤가 이득이었다. 모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괜찮다며 공감을 해 줬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때 스피커로 고우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혜성이 사라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 여기서 잠깐, 곡 선택에 앞서 여러분이 들어간 방 번호에 집중해 주세요.

이 패턴은 1차에서 본 적 있는 거였다. 말을 멈추고는 반전 혜택을 공표해 왔다. 마지막까지 남은 연습생들에게 최고의 선택권을 준 일화였다.

왠지 이번에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좋지 못한 흐름으로 전개될 듯한 기분이었다.

당황스러운 소식에 식은땀이 흘렀다. 방 넘버는 들은 적 없는 부분이었는데…. 선배, 이런 건 얘기 안 해 줬잖아요……. 특유의 유들거리는 얼굴이 떠올랐다. 도움을 줘도 꼭 주다 마는 사람이었다.

"…방 넘버?"

"우리 1번이었지."

"어… 그랬지."

"아, 또 뭐야~"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모두 당한 전적이 있어 그런 거였다. 사실 나도 암담했는데, 앞 쪽 번호는 남들이 기피할 것 같아서 고른 게 전부였다.

너무 별거 없는 이유로 택한 곳이었다. 어쩐지 수월하다 싶었지……. 밀리지 않고 모인 게 용한 지경이었다. 제발 그만해……. 시스템도, 제작진도 정도를 모르는 성격들이었다.

- 각 컨셉에는 10개의 후보곡이 있습니다. 연습생 여러분의 방 번호는 해당 미션곡의 선택지로 자동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1번 방에 계신 분들은 컨셉 후보군의 첫 번째 노래를 지정받습니다.

……큰일이다. 가진 인내심을 긁어모아 간신히 입 밖으론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던 입가가 경련으로 떨렸다. 완벽하게 당한 입장으로, 제작진의 손바닥 안에서 논 게 되어 버렸다.

차라리 나는 양반이었는데, 옆에 있던 이정원은 살벌한 기운을 뿜었다. 은은하게 생겨서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분명 웃고 있는 표정이었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웠다. 아무 말 없이 한 걸음 물러서곤 이유준의 근처로 다가갔다. 차라리 여기가 마음 편한 것 같았다. 이 팀도 어째 썩 평탄하진 않을 것 같았다.

"헉… 자동 선택이에요? 처음부터 신중했어야 하는 거네요?"

"그러게. 저희는 어떤 컨셉이든 첫 번째를 한다는 소리죠?"

"네, 그런 것 같은데요."

- 컨셉은 어떻게 정해지냐고요? 방금 차출된 각 방의 대표분들께서 추첨을 통해 뽑으실 예정입니다.

"우와……."

"와……."

"……."

이제는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었다. 메인 제작진은 사람 속이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창의적으로 놀릴 수 있는 건가…?

진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면이 계속 나오는 듯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소리였다.

전원이 말을 잃어 침묵이 맴돌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입장했던 문을 바라봤다. 조금 전에 나간 권혜성을 좇는 시선이었다.

이 단계 자체가 제작진이 깔아 둔 함정이었다. 과정별 꼬임이 끊임없는 루틴이었다. 이번 미션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유준아."

"네, 형."

"나 갑자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저도 비슷해요. …혜성이, 괜찮겠죠?"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등골이 싸늘했는데 권혜성, 안 그러는 척하면서 편법은 잘 썼다. 그래도 어딘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부디 여기선 차분하길 바랐다.

그 애의 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었는데 할 수 있는 건 초조하게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1차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시작이었다.

* * *

처음의 대강당으로 다시 이동했다. 연습생 전원이 모여든 광경이었다. 팀별로 모인 10개의 무리가 보였는데 어떻게 묶였을지 확인할 타이밍이었다.

은근슬쩍 슬쩍 눈을 굴려 정세를 파악했다. 나만 이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연습생 몇 명과 시선이 마주쳐서 뻘쭘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 없이 이건 나중에 확인하기로 했다.

"아직 발표는 안 된 건가?"

"표정들이 그런 것 같은데요. 내용은 모르는 것 같아요."

권혜성은 단상 위에 다른 팀의 대표로 보이는 연습생들과 함께 서 있었다. 품 안에는 정체 모를 피켓이 들려 있었다.

저게 아까부터 얘기해준 그 선택지인 모양이었다. 가운데에 있던 고우림이 손뼉을 쳐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원 모이셨나요?"

"네~"

고개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권혜성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렇지 않다는 냥 손을 휘적거리는 게 간도 참 큰 인물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제 팀원을 찾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제스처였다.

"이제 컨셉을 공개해 보겠습니다. 각 팀의 대표분들은 피켓을 들어 올려 주세요."

숨을 멈춘 채 권혜성을 지켜봤다. 하얀 피켓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뒤집어진 면에는 뭔가 적혀 있었다. 저번처럼 스티커는 없는 것 같았다.

스펠링이 한 글자씩 적힌 풍경이었다. 예상 못 한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팀의 경우에는 알파벳 'C'였다. 정체가 유추되지 않아 의문만 깊어졌다.

"어? C……?"

"그, 발음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하, 그게 뭐예요."

"C……."

"…정원아."

"어, 왜?"

"…아무것도 아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