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46화 (46/328)

46화

조용히 읊조리는 이정원의 모습에 흠칫 떨고선 시선을 피했다. 얘는 화해 이후 리미터가 풀린 것 같았다. 나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저도 모르게 놀라 버렸다.

……같이 있다가 논란이라도 생기는 것 아니야? 미션이 끝나면 바로 떨어지기로 결심했다. 아니다. 팀 내에서도 최소한으로만 어울리자.

"저게 뭘까요? A, B, C니까 세 번째?"

"그냥 표기 같은 것 말하는 거예요?"

"그랬으면 그냥 숫자를 썼을 거예요.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요."

서로 아는 바를 말하며 추리했다. 나중에 나올 시즌에서도 쓰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쉽게 도출되지 않는 결론이었다. 뭐가 됐든 사실 선택은 완료되어 있었다.

정답을 기다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제발 욕심 안 부릴 테니, 중간만 가고 싶었다.

"각 팀의 컨셉 피켓은 모두 확인하셨죠? 저 스펠링은 여러분이 해야 할 컨셉의 정체입니다. 그럼 곡을 동시 오픈 해 보겠습니다. 스크린 띄워 주세요."

"으악!"

"이렇게 한 번에요? 전부 다?"

"우리 노래 뭐야?"

고우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벽면으로 대형 스크린이 내려왔다. 저번부터 참 잘 써먹는 소재였다. 혼비백산인 연습생 사이로 번쩍 빛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화면 위로 표가 나타났는데 A부터 J까지 10개의 아이콘이 있었다. 그 밑으로는 후보곡들로 보이는 제목이 표 가득 적혀 있었다. 10개씩 총 100곡의 리스트였다. 저걸 다 준비한 것도 놀라웠다.

"헉… 곡 엄청 많다."

"C가 뭐지, 우리 것부터 찾아봐요."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읽어 나갔다. 이정원의 말대로 중요한 건 그거였다. 뭐가 됐든 2차 미션의 서두인 시점이었다. 이게 모든 결과를 뒤흔들 것이다.

"아, 저기 있다. 와, 열심히 해야겠는데."

"저래서 C였구나."

"오, 형들 괜찮겠어요? 난 완전 좋은데."

"배민형, 너 너무 좋아하는 것 아냐?"

"저도 마음에 드는데요?"

배민형이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이정원은 성격답게 호탕한 말을 했다. 얘네의 긍정적인 마인드, 진짜 부럽다…….

"그래요? 사실 저도 괜찮긴 한데, 걸리는 점이 있거든요……."

"아, 성신원 연습생 저랑 같은 부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선배님들 곡, 랩 파트가 없는 것 때문이죠. 저랑 같이 랩메이킹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맞아요.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어요."

저기……. 얘들아, 혹시 나만 걱정하고 있었던 거니? 침착하게 자신들이 나가야 할 길을 이야기하던 팀원들이었다. 원곡자의 팬들이 보고 있을 테니, 암담한 마음은 표현하지 못할 장면이었다.

"…나도 좋아. 발랄하잖아."

"전 형이 하는 게 제일 기대돼요."

"그래? 고마워……."

사실 하나도 안 고마워……. 어떻게 한 번을 편한 곡으로 못하는 거지……? 아닌가, 내가 너무 쉬운 길만 찾고 있는 건가. 하지만 쉽게 가고 싶은 게 죄는 아니었다.

피켓을 들고 있던 권혜성 마저 흥미진진한 선택을 했다는 얼굴이었다. 우리 팀이 해야 할 스펠링 C의 정체는 바로 'CUTE'였다.

귀여움으로 승부하는 선택지를 배정받았는데, 가장 위의 1번 곡은 들어 본 적이 있어 알고 있는 노래였다.

[윤&안 - '안아 줘(Pit a Pat)']

테이크원(Take#1)이라는 7인조 보이 그룹이 있었다. '윤&안'은 그 안에서 막내들로만 결성된 유닛이었다. 정규는 아니고, 수록곡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해당 멤버들이 많이 어렸던 것 같은데……. 그걸 메인으로 삼은 노래였기에, 스타일이 어떨지는 아주 확고했다.

"윤효 선배님이랑 조안 선배님 유닛이었죠?"

"이거 두 분 17살 때 활동했던 곡이네요."

성신원이 침착하게 분석 평을 내렸다. 소속사에 들어가 있는 연습생답게 박학다식한 면모였다. 쟤도 이 팀에선 3번째인 연장자였는데, 부담이 가는 연령대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태연한 얼굴이었다.

나와 동갑인 이정원까지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의에 불타올랐다. 안 그래도 조용한 인간인데, 독한 마음을 먹은 게 느껴져서 더 무서웠다.

- Pit a Pat girl

망설이지 말고

두 팔을 뻗어

나를 꽉 안아 줘

너를 많이 좋아해

가사가 엄청 살랑살랑한 느낌이었지……? 곡이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원곡자들이 밀고 있던 모티브가 신경 쓰였다. 17살 때의 활동 곡이라니, 내 진짜 나이와도 9살 차이다.

다른 애들은 좋아하니까 그렇다 치고, 내가 가장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키까지 180cm은 되는 덩치였는데, 변명할 여지가 없는 사나운 인상이었다. 하는 건 어떻게 한다 치자, 근데 잘해야 하니까 걱정인 거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팀 연습실로 들어온 뒤였다. 초면이라 어색한 정적을 뚫고 성신원이 질문했다. 아무것도 안 하기엔 시간부터 촉박했다. 나 혼자만의 고난이었는지 모두 괜찮아 보이는 안색이었다.

"일단 곡부터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아, 저 이 노래 잘 알아요! 저희 소속사에서 이걸로 연습하던 동생들이 있었거든요."

배민형이 손을 들곤 활기차게 이야기했다. 선곡에서도 만족스러워 보였는데, 잘 알고 있는 노래라 더 자신 있었던 것 같았다.

기타 사운드가 유니크한 댄서블 계열로 팝 장르인데 통통 튀는 노래라고 말했다. 원곡 가사는 소년들의 첫사랑이 메인이었다.

봄 같은 설렘이 주된 내용으로 보였다. 지급받은 탭에서 영상도 찾아봤다. 어째 연출이 심하게 들쩍지근했다. 발그레한 메이크업과 하트가 난무한 세트장이었다.

예상대로 둘 다 귀엽게 생긴 아이돌이었다. 빠지지 않은 볼살이 자연스럽게 매치됐다.

등을 마주 대고는 윙크하는 엔딩을 목격했다. 과할 수 있었지만 특유의 능숙함으로 잘 소화했다. 이걸 마지막으로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난이도도 난이도인데, 내가 할 각은 나오지 않았다. 속으로 조용히 혼자만의 비상사태를 엄포했다. 카메라 때문에 열심히 둘러대야 할 입장이었다.

"그럼 저희 일단 파트부터 나누죠."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역시 시작은 파트 분배죠!"

전부 나만 그런 것 같았다. 위풍당당하게 이어 나가는 팀원들을 지켜봤다.

* * *

"여기를 해 달라고?"

"…어, 네가 괜찮다면…. 추천하고 싶어서."

"메인 싸비니까 나야 좋은 일이지. 근데 이렇게 넘겨줘도 괜찮겠어?"

내 적극 추천으로 2절 싸비를 받게 된 이정원이었다. 미심쩍다는 듯이 여기를 쳐다보는데, 1차 배틀에선 브릿지를 맡은 인물이었다.

물론 그때는 자기 반성식으로 물러선 경향이 강한 편이었다. 김찬규와는 사이도 개선됐으니 본격적으로 달릴 것 같았다. 그러기 전에 좋은 걸 받아 신기한 모양이었다.

"…일단 포지션 미션이잖아. 네가 메인 보컬이고 또… 미성도 잘 어울리고……."

"흐음."

부담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재밌다는 듯 여기는 게 전부였다. 별로 말을 걸고 싶지 않은 대상이었다. 하지만 싸비는 무조건 메인 보컬이 해야 했다.

"일단 알겠어. 이렇게 주면 나야 고맙지."

다른 것보다 서브가 하이라이트를 가져가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무슨 욕을 먹으려고…….

심지어 쟤는 노래까지 잘 불렀다. 저런 애를 밀고 메인을 갖는다? 나락행 하이패스를 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내 자리에 맞춰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쟤가 맡아 부르면 무대 퀄리티도 올라간다. …이득만 받아 가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맞아요. 정원이 형, 음색도 잘 어울려요~"

"편곡이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형이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성격이 강해서 그렇지, 단정한 분위기여서 가만히 있으면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코디만 잘하면 괜찮게 소화할 수 있을뿐더러, 특유의 드센 기운도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팀원들도 전부 그걸 눈치챈 기미였다. 슬슬 발을 빼는 게, 비슷한 인물이나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이유준이 마무리용 호응을 보내 줬다. 한 번 같은 팀을 해 본 전적이 있었는데, 그걸 떠나 풍기는 아우라가 비슷했다. 1차에선 문채민에게 김찬규를 맡겼었다. 2차에선 이유준에게 이정원을 떠넘길 계획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저희 꽤 잘 정해지고 있지 않아요?"

"그러게!"

정신없는 사이 빠르게 호칭이 정해졌다. 죽이 척척 맞는 댄스조 둘이었다. 권혜성과 배민형이 공기를 순환시켰다.

삭막한 성인들에겐 둘만 한 극약 처방이 없었다. 그나저나 다른 애들도 협력을 잘해 주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순순히 메인 파트를 넘겨줄 줄이야…….

다른 걸 떠나 계산 자체를 잘하는 듯했다. 팀 퀄리티가 결과를 정한다는 걸 파악하고 있었나 보다. 치고 빠지는 게 앞으로도 답답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마 댄서 둘은 댄스 브레이크에서 양보하려 들지 않을 일이었다.

래퍼 쪽도 랩 메이킹 구간을 챙기려고 하겠지. 화합을 하면서도 모두 각자도생하고 있었다. 1차 때와는 다른 의미로 좋으면서 진이 빠졌다.

얘네를 어떻게 끌고 가지……. 앞의 애들은 은근히 맹해서 손이 간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과하게 기가 세서 순화시켜야 했다.

"파트도 정했겠다, 컨셉을 좀 고민해 볼까요?"

"기본으로 가되, 약간은 변동할 수 있는 거죠."

"네, 그런 것 같아요."

2차 무대부터는 초반 평가의 규칙이 변경됐다. 원곡 체크를 지우고 진행으로 전개된다고 말했다. 비교로 욕 먹이는 건 앞에서 다 썼다는 얘기였다.

본방송의 편집 점을 바꾸기 위한 룰이었다. 제작진을 위한 거였지만 우리에게도 좋았다. 이 노래를 원곡 그대로 평가받는 건 위험했다. 혼나는 수준으로 끝날 게 아닐 것 같았다. 짤이 되어 인터넷을 떠돌아다닐 대형 사고였다.

"모두가 잘 녹아들 만한 편곡 방향을 좀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동감입니다."

* * *

순위 발표식 촬영으로 잡아먹은 시간이었다. 간단한 논의를 끝내니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니라서, 이렇다 할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만 해산해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체력도 한계에 달해 있어서 잡고 있어봤자 좋은 게 나오지 않았다. 안 될 것 같을 땐 지체 없이 물러서야 했다.

팀원들의 공감을 사며 셔틀버스에 탑승했다. 오전 중 탈락한 인원들로 재배치된 숙소였다. 캐리어를 끌고 새로운 곳으로 발을 들였다.

사방은 온통 모르는 연습생들뿐이었다. 권혜성과 이유준은 한방을 배정받은 모양이었다. 나만 혼자 떨어진 곳으로 입실했다. 이게 얼마 만의 독립이지. 어색한 걸 떠나 프라이버시가 보장돼서 기뻤다.

걔네가 알았으면 서운하다며 난리 칠 내용이었다. 편하게 쉴 수 있어 반가운 심경이었다. 그래서 더 활짝 미소 지었다. 지친 연습생들은 일찍 잠이 들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선 잘 수 있을 때 무조건 자야 했다. 안 그러면 다이렉트로 수면 부족인 프로그램이었다. 이번 미션을 위해 시스템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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