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취침 전 매일같이 하는 루틴이었다. 성장형 연습생 수법이 나름대로 통하고 있었다. 이제는 좀 더 공격적으로 올라가야 했다.
쓸 수 있는 건 전부 활용할 계산이었다. 안 그러면 출연만 하고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초반에는 될 대로 되라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살아남으니 은근히 욕심이 났다. 상태 창 하단 끝의 스킬을 발견했다.
어제 새벽에 뽑은 '저세상 귀염둥이(D)'였다. 저거 보고 꿈자리가 사나운 일이 존재했다. 무시하자고 생각했는데, 정말 잊고 있었다.
…써야겠지? 떨떠름한 얼굴로 한참을 바라봤다. 거리감 있는 주제였지만 이번에는 저게 정답이었다. 안 그래도 나 빼고 자신 있다며 달려드는 팀원들이 있는데, 그 이상의 마인드는 갖지 못하더라도 장단 정도는 맞춰 줘야 했다.
어제는 코인을 버렸다며 암담해했다. 그런데 뭐든 갖고 있기 나름이었다. 얌전히 수긍하며 스킬의 전원을 켰다. 받아들일 줄 아는 것도 사회인의 미덕이었다.
그다음엔 또 뭐를 해야 하는 거지. 한참을 고민에 빠져 상태 창만 바라봤다. 결론은 스탯을 하나 해금하자는 것이었다.
히든 스탯의 오픈 소식이 조바심을 느끼게 했다. 좀 더 빠른 성장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런 무대에 최적화된 부분은 오직 하나였다. 품도 들일 필요가 없는 영역, 끼 스탯이었다.
['스타 코인 스탯 해금' 끼에 1,000 코인을 지불합니다.]
[현재 코인]
825 코인
[끼 스탯 해금 방법]
타인에게 퍼포먼스(보컬 + 댄스) 1회를 보여 주세요.
[변화 가능 스탯]
끼: B- → B
* * *
[신해신]
나이: 22
외모: A-
보컬: B+
댄스: B
운: C
끼: B
정보: 플레이어
이벤트: '당신의 아이돌, 그 시작' 진행 중
[보유 스킬]
'한번 보면 잊지 못해(F)' – On
'부릉부릉 운전기사(E)' - On
'저세상 귀염둥이(D)' – On
[현재 코인]
825 코인
아침 일찍 눈을 떠 권혜성과 이유준의 방에 찾아갔다. 식사를 같이 하자는 핑계를 댄 것이었다. 그렇게 얘들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구석에 들어가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안무를 확인해 봤다는 핑계도 덧붙였다. 민망하긴 했으나,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잠이 덜 깨 눈도 못 뜬 권혜성이 하품했다. 이유준은 처음 겪는 일에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둘의 앞으로 업데이트에 성공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지갑 사정과 정신 줄이 너덜너덜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얼굴 팔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철판 까는 게 가능한 지경이었다. 어째 사람이 점점 더 뻔뻔해졌다. 좋은 건가…….
"형, 아침에 그건 뭐예요?"
"……."
"아, 유준이 형은 처음 봤겠구나. 난 저번에도 한 번 봤는데? 해신이 형 가끔 그래."
"…어?"
"……."
"긴장 푸는 의식 같은 것 아니었어요? 난 그런 줄 알았는데."
"…대충 비슷해."
"재밌는 버릇이 있었네요, 형?"
"…이건 그만 얘기하자."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는 이유준이었다. 식판 위로 고개를 내려 숙였다. 쏟아지는 시선에 정수리가 뜨끈했다.
생각해 보니 권혜성은 테마곡 때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태연한 태도에 이걸 좋아해야 하나 헷갈렸다.
둘 중 한 명만 데려가는 거였는데… 하필 같은 방이어서 딸려 오듯 붙어 버렸다. 오늘도 고난이 예상되는 하루였다.
* * *
연습실에 가던 중 다른 팀과 마주쳤다. 딱히 친한 애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외의 조합에 눈이 커졌다. 강태오에 윤명? 거기에 우정환이었다.
저건 또 무슨 무리야. 마냥 신기했다. 실력자라고 할 만한 연습생들이 몇이나 붙어 있었다.
우리는 기대로 부담 가질 필요가 전혀 없어 보였다. 대놓고 어벤져스 취급 당하겠다며 불쌍하게 봤다.
그러다 등 뒤로 보이는 인물에 깜짝 놀랐다. …김찬규? 쟤는 왜 저기 있는 거야. 저번 팀에서 가장 큰 성장을 보여 준 연습생이었다.
나는 중간에서 커버 노릇까지 해 줬다. 편하게 바라보다 시선이 마주쳤다. 흠칫 놀라는 게 예전과 아주 달랐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더니 꾸벅 고개를 숙여 왔다.
"어……."
"안녕하세요. 형, 오랜만에 봬요."
"그래요. 잘 지냈죠."
"…넵."
…역시 개과천선했네. 그런 김찬규의 모습에 몇 명이 여기를 쳐다봤다. 대표적으로는 당황한 듯한 얼굴의 우정환이었다.
하긴, 쟤는 아주 예전에나 김찬규를 목격했다. 냉정하다 못해 찬 기운을 풀풀 날리던 사람이 예의를 차려 신기한 모양이었다. 너는 타이밍이 잘 맞아서 편하게 가는 거야…….
이걸 모를 테니 아쉬워졌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찬규야."
"아, 형. 해신이 형이랑 같은 팀이었어?"
"응, 이제 밥 먹으러 가?"
"응. 형은?"
"우린 먹고 들어가는 길. 오늘 너 좋아하는 메뉴 나왔더라."
"그래?"
우정환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 얘는 이 둘이 화해한 것도 모르지. 최초 등급 평가를 본 애들은 다 알 사건이었다.
이정원과 김찬규, 초반에는 무진장 사이가 안 좋았다. 안 좋다기 보다는 냉랭한 거였지만……. 그래서 여론이 좋지 못했던 연습생들이었다. 이제 와서 뒷북인 것 같아 쟤가 재밌게 느껴졌다.
넌 진짜 편하게 가는 거라니까……. 다시 한번 같은 생각을 했다. 둘에 대한 이야기는 새롭게 돌 예정이었다. 지금 상황만 봐도 유추되는 모습이었다.
"정환아."
"어……? 어… 유준이 형, 안녕. 근데 이게 무슨 일이지?"
이유준이 우정환에게 인사를 했다. 연락을 해 봤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방송에서 애매하게 선이 그어진 장면으로 연출됐다.
잘못 가면 양측 모두에게 좋지 못한 이미지가 씌워졌다. 그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주 직관적인 걸 채택한 것 같았다.
모두의 앞에서 친분을 노출하는 방법이었다. 단순해도 저게 최고인 일이었다. 편집으로 다뤄 주지 않는다면 밖에서 목격담을 생성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화 횟수가 많아졌다. 예전에 느꼈던 어색함은 사라진 후였다. 물론 문채민보단 우정환이 더 능청스러워서 그런 걸 수 있었다. 하지만 초반과 비교하면 딴판인 광경이었다.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형, 나중에 봐."
우정환이 대놓고 당황했다. 말을 얼버무리는 게 저기에 대해 물어볼 생각인 것 같았다. 쟤도 잘 모르는데… 헛발질을 크게 했다.
가볍게 웃고는 마저 이동했다. 연습생들이 멀어지자 성신원이 말을 걸었다. 작은 목소리에 아주 나직한 어조였다.
"…저 팀, 강하네요."
"그렇죠?"
"오, 엄청 세다."
그건 팩트였다. 실력자들이 뭉친 강자 팀이었다. 하지만 반대론 위험하단 소리이기도 했다. 인기 멤버가 독식되어 버린 그룹이었다. 윤명과 강태오로 주목받을 게 확실했다.
그걸 제작진이 그냥 넘어가 줄 리 만무했다. 우정환의 등이 터질 예정이었다.
은근한 고난이 그려지는 곳이었다. 분란 종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알고 있는 인물들을 제외하면 모르는 연습생도 섞여 있었다.
그중 열등감을 가진 인물이 존재할 수도 있다. 얘네는 편집으로 다듬어질 가능성이 컸다. …얽히지 말아야지. 안면은 트되, 딱 그 선만 지키기로 했다.
"쟤, 괜찮으려나……."
이정원의 혼잣말이 귀에 들어왔다. 김찬규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케어해 줄 사람도 주변에 없어 보였다.
물가에 혼자 둔 아이같이 느껴졌나 보다. 김찬규 덩치로 봐선,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이정원은 그걸 해 줘야 하는 당사자였다.
* * *
"혹시 편곡 고민해 보신 건 있으세요?"
"아, 전 아직 생각 중이에요. 분위기는 살리면서 적정선으로 시너지를 끌어 오는 게 어렵더라고요."
"저도요. 뭔가 팟! 하고 오는 건 없었어요……."
어제랑 비슷한 전개가 이어졌다. 자신은 있었지만 최선을 찾는 게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대로면 진척 속도가 안 날 것 같았다. …너네 이거 좋다며. 머리 좀 써줘…….
우선 곡에 맞춰 안무부터 습득하기로 했다. 2인조 유닛 곡을 6인으로 변경했다. 부지런히 움직여도 빠듯할 시간이었다. 구성을 제외하곤 메인 동작은 그대로 가져갈 요량이었다.
"여기서 메인 정원이 형이랑, 서브 해신이 형이 포인트 안무!"
"해신이 형 파트 다음이 정원이 형이니까, 동선상으론 두 분밖에 할 수 없어요~"
"그래?"
"알겠어."
권혜성과 배민형이 핵심 안무를 진행했다. 어떻게든 소화해내야 한다. 새벽 사이 다짐을 해본 마음가짐이었다. 이정원은 웃고 있었는데, 퍽 즐거워 보였다. 자기는 잘 어울린다 이건가……. 부러워라…….
성격을 떠나서라도 하는 짓을 봐선 어떻게든 해낼 사람이었다. 용기 내는 걸 떠나 잘하기 위해 머리 써야 하는 건 나뿐이어서 슬퍼졌다. 도전하는 건 상관이 없었는데 반응이 안 좋을 것 같아 두려웠다. 하는 게 전부가 아니고, 잘하는 게 관건인 프로그램이었다.
"좋아, 일단 해 보자."
"동작을 어떻게 살려야 할지 고민 좀 해야겠어…."
"와, 역시 형들, 멋져요!"
소심하게 가다듬는 나와 달리 이정원은 성큼성큼 과감하게도 움직였다.
겉모습 자체는 저쪽이 얌전했는데 성격부터 반대인 우리 둘이었다. 어째 내가 작아진 기분이었다. 키는 고만고만했는데, 왜인지 모르겠다.
체격이 아깝다며 헛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연습실 벽면 거울에 전신이 비쳤다. 스킬을 사용했는데도 어색한 그림같았다. 참담한 광경에 식은 땀이 흘렀다. 어영부영 댄서 둘의 서포트에 지도받았다.
그래도 기존의 귀여움을 많이 융화했다. 댄스 스탯 A는 남다른 것 같았다. 선곡으로 심란했으나 권혜성을 끌어들인 건 잘한 일이었다. 나름 기획한 방향대로 흘러갔다.
"정원이 형! 거기서 둥둥 탁! 하고 20도 더 돌아요!"
"어, 알았어. 이렇게?"
"네, 네!"
저기는 벌써 완벽하게 적응한 모양이었다. 원래부터 아무렇지 않게 춤을 췄으나 흡수하기 시작한 게 적응력 하나는 최고였다. 엄한 권혜성의 호통도 받아들였다.
이정원 이번 미션이 끝나면 눈에 띌 멤버로 보였다. 춤 스탯은 높지 않았지만 저런 마인드라면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뒤처지지 말고 해야지. 고민은 고민이고, 해야 할 건 해야 했다.
능력 차이로 인한 실력은 노력으로 메꿔야 했다. 이런 우리 둘의 뒤로 래퍼들이 보였다.
저기 멀리서 랩 메이킹을 고심하고 있었다. 랩 파트가 없는 노래라 프리 코러스를 들어냈다. 새로 창작하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었는데, 널려 있는 종이를 보며 래퍼가 아니었음을 위안 삼았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지…….
"해신이 형은 한눈팔지 말고!"
"어? 미안해. 집중할게."
"안 되는 곳 있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러면 이따 나랑 한 번 더 맞춰 보자."
"그래."
독려하던 이정원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갑작스러운 친근함에 크게 놀랐다. 얘… 좀 부담스러운 것 같아. 정말 생긴 것과 달리 와일드했다.
이 팀으로 발을 들인 이상 후회는 소용없었다. 이를 악물고 해 보자며 각오를 다졌다. 귀여움? 까짓것 나도 귀여워 보지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