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저도 갈래요……."
"형, 먹을 수 있어요?"
"…먹을 거야."
권혜성이 의문 어린 얼굴로 모두를 바라봤다. 누가 봐도 매점에 간다고는 하지 못할 안색이었다. 그런데도 이유준은 제법 필사적이었다.
그래… 너도 가라. 고개를 끄덕여 줬다. 권혜성은 트레이닝에 매진하느라 여기 있을 것 같았다. 쟤가 붙지 않으면 쉴 수 있는 타이밍이 만들어졌다.
"혜성아, 넌 여기 있을 거지."
"네~ 배 안 고파요~."
……모두 배는 안 고픈 상황이야. 괜찮다는 권혜성의 말에 서둘러 나가는 인원들이 안도했다.
"나도 여기 있을게. 대신 어차피 단체 안무 못 맞춰 보니까, 난 쉰다?"
"와… 네."
배민형이 치사하다는 얼굴로 여기를 돌아봤다. 대다수가 나가면 연습하진 못할 일이었다. 굳이 핑계 대며 나갈 이유는 없지…….
잘 다녀오라며 손까지 흔들어 주곤, 쉬기 위해 벽에 기대며 정면을 응시했다.
동작을 가다듬으며 계속 움직이는 권혜성이었다. 둘만 남아 어딘가 조용했다. 음악도 없이 입으로 박자를 맞춰 보고 있었다. 원래도 잘하는 애였지만 끈기가 남다른 것 같았다.
"안 힘들어? 좀 쉬어."
"음? 아니에요. 별로 안 힘든데요?"
카메라가 있어 적당히 질문하는 척했다. 너무 어색한 건 이상하게 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그 이유로 내가 여기 남아 있는 거였다. 한 명만 남기고 모두 나가는 건 애매한 광경이었다.
권혜성을 걱정하기 때문인 것 보다는, 방송국 사람들이 어떻게 쓸지 몰라서였다. 자료 화면으로 나갔다간 끔찍한 여론도 나올 확률이 있었다. 정말, 신경 써야 하는 게 너무 많았다.
침착하게 눈을 감곤 휴식을 취했다. 최소한의 방어는 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문제는 없겠지…….
"편곡 나오면 맞추는 게 끝이겠네.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입으로는 계속 대화를 걸고 있었다. 귀찮아도 이게 나중을 위한 일이었다. ……왜 내가 이 고생 중인 거지. 아무나 한 명 더 붙잡을 걸 그랬나 보다.
"그러게요. 참, 형, 저 있잖아요."
"…어? 왜."
"예전에 그 친구들 있죠?"
갑작스러운 주제에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앞에는 몸을 멈춘 권혜성이 서 있었다. 어딘지 신나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왜 눈을 빛내는 건지 몰랐다.
괜히 꺼낸 주제라며 후회했다. 부담스러운 낯인 게, 밖에 나갈 걸 그랬다. 잔머리 썼다가 덤터기당했네……. 자료 화면 같은 건 신경 쓰지 말아야 했다.
눈동자를 굴려 카메라를 확인하는 시늉을 했다. 눈치가 있다면 알아서 우회할 일이었다. 입술을 말아 물며 귀를 기울였다.
"그때 형도 들었어요? 애들이 2차 꼭 방청 와 준대요!"
"…아, 그 얘기였어?"
이거라면 나도 들어 알고 있는 거였다. 앞서 걸어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게 어지간히 좋았나 보다.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니는 걸 보면 아직 애였다.
적당히 응대해 주며 축하의 인사말을 남겼다. 별건 아니어서 안도하는 중이었다.
"좋은 일이네. 우리 잘해 보자. 컨디션 조절도 하고."
"네! 그래서 더 힘이 났나 봐요! 감사해요!"
쟤가 열심히 해 준다면 나야 땡큐였다. 안 그래도 무대 퀄리티는 올려야 했다. 묻히는 걸 떠나 좋은 반응이 기대됐다. 애매하게 시작했으나 성공의 전조를 보이는 작전이었다. 의미 없는 대화였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쉬고 싶었다.
* * *
"형, 혹시 쉬는 동안 보컬 트레이닝 받았어요?"
"갑자기……? 아닌데 왜 그래."
"노래가 좋아진 것 같아서요. 원래 음색도 좋았는데, 능숙해진 느낌?"
녹음하던 과정이었다. 내 몫의 파트를 끝내고 나왔다. 부스 밖에 있던 팀원들이 말했다. 다들 은근히 놀란 낯이었다.
왜 저 질문이 안 나오나 싶었다. 제대로 된 녹음은 처음이라 이제 알았나 보다. 여태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았다. 그래서 당당하게 철면피가 되었다.
회피 자체는 한두 번 하는 게 아니었다. 이런 건 이제는 식은 죽 먹기였다.
"연습실에 매일 출석 체크해 봐. 안 늘 수가 없더라."
……미안해. 사실 스탯 올렸어. 남들에겐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대처한 답변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속사정이지만 유추할 순 없을 것이다.
정 부러우면 당첨금을 뺏겨 볼래……? 시스템이란 게 생길 수도 있어, 물론 통장에 23억이 있어야 했다. 다시 생각해도 속이 쓰린 얘기였다.
"형은 휴식 기간에 전혀 안 쉬었어요?"
"해신이 형, 독해. 진짜 안 쉬어."
"난 그래도 안 늘던데… 비법 좀 알려 주세요!"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데……."
아무렇지 않게 만담을 넘겨 버렸다.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름을 넘기기 위한 행동이었다. 때마침 부스 안에는 이정원이 들어가 있었다.
쟤의 차례라면 포커스를 변경할 수 있었다. 성격 때문에 골치 아팠으나, 결국은 실력자였다.
이정원이 팀에 합류한 건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 아이디어의 핵심도 잡아 준 이정원이었다. 어째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전에도 괜찮은 미성이었는데 실력부터 놀라웠다.
수정된 노래에선 거의 제 곡같이 노래를 했다. 소화력이 굉장하다며 감탄을 내뱉었다.
이정원이 메인 보컬로 간 건 행운이었다. 다른 팀으로 갈려서 포지션이 겹쳤다면 난감했다. ……베네핏은 무슨, 그냥 압도당할 뻔했네. 문제들이 해결되니 거의 펄펄 날았다.
"정원이 형, 뭐야. 되게 잘 부른다."
"이거 라이브 맞죠?"
"와, 역시 메인 보컬……."
온몸으로 칭찬을 외치는 배민형이었다. 프로듀싱 엔지니어도 흡족하다는 듯 사인을 보냈다. 거의 원 샷 원 킬로 통과를 받아냈다.
얘는 데뷔해도 녹음하는 데 고생할 일은 없겠다. 밖으로 나온 이정원이 물을 마시는데,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얼굴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역시 저런 게 메인 보컬인가? 이기긴 힘들 것 같았다.
"이제 갑시다~ 다음에 뭐 해야 한댔지?"
"의상이요. 시안 짜서 넘기면 픽스해 준댔어요."
"할 게 넘치네. 빨리 끝내고 연습실로 복귀하자."
"아, 맞춰 볼 부분 있다고 했죠?"
연습실로 다시 이동하는 중간이었다. 초반에 뒤처진 게 뒷심을 발휘했다. 시시콜콜한 잡담을 들으며 길을 걸었다. 등 뒤에선 의상으로 열띤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각자 스타일에 맞춰서 입는 게 제일 좋겠죠? 혜성이 형은 안 봐도 나온다!"
"……나?"
"형은 후드 티만 입고 살 것 같아. 그러니까 그거 입어."
"…이렇게 정하는 거야?"
배민형과 죽이 잘 맞는 권혜성이었다. 둘 덕분에 분위기가 처지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나는 끼어 봤자 피곤할 거란 걸 알아 귀만 열고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평화롭네… 녹화 중 처음으로 해 본 생각이었다. 본무대까지 3일 남은 시점이었는데, 이젠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 * *
[확률 성장 트리]
미개화: ??? ???(??) (진행률: 50%)
……저게 뭐지? 지친 몸을 바닥에 누인 상태였다. 얼핏 보인 장면에 깜짝 놀라서 상체를 일으켰다. 권혜성의 상태 창에 신기한 변화가 있었다.
다른 연습생들은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어 관찰할 여유가 주어질 듯했다. 턱을 괸 채 그 부분을 쳐다보니 새로운 포맷이었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저게 무슨 뜻인데……. 진행률 50%? 무슨 마감 세일도 아니고… 뭔가 저 아래로 글씨가 비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물음표였지만 전과는 다른 형상을 띠었다.
하여간에 이 시스템은 설정이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파악하기를 손 놓은 참이었다. …어, 잠깐만. 갑작스럽게 한 가지 가설이 떠오른 참이었다. 권혜성에게 몇 번 들은 적 있던 일들 때문이었다.
"…혜성아, 친구들 방청 신청했대?"
"…어? 어떻게 알았어요? 이건 비밀인데… 핸드폰 수거당해서 휴게실 PC로 연락하고 있었거든요. 성공해서 이번에 응원하러 온대요."
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권혜성이 여기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속삭이듯 작게 설명했는데, 진짜였어……. 스스로의 추리 실력에 작게 놀라고 있었다.
뭔가 바뀌는 것 같아 얘가 갖고 있던 특징들을 떠올렸다. 확실하진 않겠지만, 예의 그 친구들이 관련되어 있겠다고 추정했다.
거기서 그게 해소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했던 찰나였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 시기가 딱 맞아떨어졌다. …이런 사이클일 줄은 예상 못했지.
별 탈이 없다면, 권혜성의 성장 트리는 곧 개화할 예정이었다. 이상한 곳에서 허술한 구석이 있는 시스템 같았다. 신경 쓰던 과거가 허무하네……. 아니지, 나 방치하고 있었지……?
"아……."
"네?"
"아무것도 아니야."
너네, 치사하게 이러기야…? 쟤는 도와줄 여지를 남겨 놨으면서,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모르겠다. 돈은 고사하고 부디 코인 캐기라도 처분되길 원했다.
권혜성은 저게 없어도 조금씩 눈에 띄고 있는 인물이었다. 앞으로는 펄펄 날아다닐 게 분명한데, 벌써 앞날이 걱정되는 것 같았다.
이로써 다시 한번 데뷔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다. 사실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희한하게 뭔가 손해를 입은 기분이었다. 그래… 일단은 팀 미션이니까 좋은 일이겠지.
긍정적인 면모를 끌어 올렸지만, 빼앗긴 당첨금은 멀게만 보였다. 사실 팩트를 따지자면 이럴 건 아니었다.
* * *
"이 팀 좋은데요. 개인적으로는 칭찬하고 싶어요."
"와! 감사합니다!"
민나연이 제법이라며 칭찬해 왔다. 컨셉이란 단어가 들어간 단계를 지나고 있었다.
경로를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어서 이런저런 애를 쓰고 있던 참이었다. 청춘으로 포장된 귀여움이 멘토들의 허용 범위 안을 통과한 것 같았다.
고민한 보람이 있는 반응들이라고 생각했다. 권혜성과 배민형이 칭찬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안무를 재정비하느라 유달리 고생했던 둘이었다. 남들보다 배 이상을 창작했단 소리이기도 했다. 저 한마디가 간절했겠지…….
"어울리는 걸로 잘 돌렸네요? 난 여기가 'C' 한다고 해서 놀랐는데, 재밌었어요. 중간도 잘 찾았고. 이 팀, 기본적으로 밸런스가 좋네요."
"그러게요. 여기 아이덴티티만큼은 확실한데요? 스타일이 딱 나뉘어서 더 재밌어요."
"감사합니다!"
민나연의 옆으로 베이스가 말을 얹었는데, 얼굴만 봐도 이 상황이 재밌는 것 같았다. 청소년들과 성인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았는데 심란한 건 나만인 것 같아서 더 슬펐다. 멘토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가설이 오간 모양이었다. 타고난 어깨들로 꾸려진 팀이 귀여운 걸 하게 돼서 흥미진진한 것 같았다.
정말 순순한 낯들이 기가 제일 센 것 같았다. 당사자로서 이건 전혀 기쁘지 않은 사실이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도 불안함이 가시진 않았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깊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데. 이제 더 이상의 사건 사고는 피하고 싶은 입장이었다.
"음, 컨셉 좋네요. 우리도 저런 걸 해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태서야?"
"뭐, 좋지."
"어라? 두 분은 지금 하기에도 안 늦은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다음에 한번 도전해 볼까요?"
원겸이 능청을 부리며 평가실의 분위기를 풀었다. 훈훈한 무드가 연출되는 장면이었는데, 저 둘은 연차가 있다지만 현역이었다.
아이돌의 관점에서 통과라는 건 우리에겐 큰 위안이 됐다. …그리 어색한 느낌은 안 들었나 본대. 이런 식의 진행은 결과적으로 좋은 의미였다. 걱정이 많던 2차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갈 기미를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