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이번 무대의 주제는 '랜덤 컨셉 포지션'입니다. 6인으로 이루어진 10팀의 연습생들에겐 랜덤으로 컨셉이 부여됐습니다. 하지만 2차 무대는 팀 내부 경쟁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타 팀 내 동일 포지션과의 빅 매치가 되겠습니다."
"투표 방식은 당신의 아이돌 take off 애플리케이션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지금 제 뒤에 나와 있는 특수 코드를 입력해 주시면 오늘 무대의 포지션별 연습생 리스트가 나타납니다."
"모든 팀의 무대를 봐 주시고, 각 포지션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되는 연습생에게 투표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또한, 전체 도합 표수가 가장 많은 팀에게도 스페셜 보상이 부여됩니다. 그럼 오늘도 마스터 여러분의 소중한 한 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 이제 무대의 막을 열어 보겠습니다.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 지금 바로 도약합니다."
시즌 1 때와 맥락 자체는 비슷한 걸 유지했다. 대충 모두 알고 있는 흐름으로 약간씩만 틀어서 속이나 보다. 엔넷이 그렇지 뭐… 흐린 눈으로 진행 상황을 구경했다. 팬들은 모두 투표에 목숨을 건 것 같았는데 나야 꽁표니까 별 의욕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무대를 구경하던 시점이었다. 보려고 목표한 사람은 나오지 않아 의도치 않게 자리를 지켜야 했던 시간이다. 여기까지 온게 아깝다며 오기로 버티고 있었다.
소품을 치우고, 다시 시작하기를 무한 반복 하는 게 중간 세팅이 길어져 체력이 떨어진다. 청량하고 밝은 무대가 많았던 1차에 비해 2차는 어째 어두침침했다. 귀라도 편했던 그 전이 좋은 것 같은데.
화려한 반주에 맞춰 튀어나오는 이펙트러 피로에 물든 두 눈이 통증을 호소했다. 이건 미션곡 선택지가 한쪽으로 쏠렸다는 증거이다. 아, 점점 더 집에 가고 싶어졌다.
"1차 때보다 별로인 것 같지."
"응, 이번에는 이민석도 많이 묻히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대화에 의욕이 넘치던 아까와 달리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하나같이 공감이 되는 내용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높은 순위가 예측되는 다크호스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게 부여된 컨셉에 비해 주제 자체가 별로인 듯했다.
거기에 포지션이 안 맞는 연습생들까지 있었으니 저런 반응이 이해됐다. 어떤 방법으로 정해졌는지는 몰랐으나 초반에 꼬인 게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2위라길래 좀 기대했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너무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 쟤 원래 댄서 아니었나? 왜 여기선 보컬 잡았지."
"글쎄, 밀렸나? 아니면 욕심 부린 건가?"
"이상한 방법으로 뽑아서 당한 걸 수도 있고. 하지만 이건 확실해. 오늘 헤메코는 영 아니다."
"맞아, 쟨 깔끔해야 잘생긴 얼굴인데. 엑케스가 코디는 잘했지."
대충 모두 이해가 되는 내용으로 사실 앞의 팀이 어쩌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 무대에 정진하기로 했는데 상당히 뒤 차례를 배정받은 모양이었다. 마지막 팀은 아닐 것 같은데…
"그럼 7번째 팀을 불러 보겠습니다. 윤&안의 '안아 줘(Pit a Pat)'를 하는 팀, 첫사랑입니다."
앞의 무대에 비하면 많이 밝은 곡이어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긴 완전히 귀여운 쪽인가? 어린 축에 속하던 원곡자들이 떠오른다.
그러다 단상 위로 올라온 인영들에 작게 기함하며 입을 벌렸다. 쟤가 왜 저깄어……? 어딘가 조금은 민망하다는 낯의 신해신이 서 있었다.
내추럴하게 세팅한 머리와 널널한 품의 니트가 달리 보인다. 곡 분위기에 비해선 장성한 연습생들의 집합소로 이거 뭐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미친, 쟤네 덩치 개커."
"근데 안아 줘를 한다고? 남현욱 이 또라이야."
"야, 이거 골 때린다. 왠지 재밌을 듯."
"도대체 선곡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주변의 반응도 비슷한 느낌으로 의외의 요소가 가득해서 집중되는 포커스였다. 뭐가 됐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무리인데 예전과 상반된 공연을 보여 줄 것 같았다.
하여간에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연습생이다. 이러니까 내가 또 보러 왔겠지. 대형에 자리한 신해신으로 자세를 바로잡으며 당장에 집중했다. 옆에는 페어였던 이유준도 함께 있었는데 최초 평가에서 본 장면이 오버랩됐다. 그때도 꽤 청량한 곡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의외의 취향이라며 신기하게 구경했다.
무대 위에는 벚나무 조화로 보이는 소품이 깔려 있었다. 그 옆에는 빨간 전화 부스까지 함께 놓인 상황이었다. 스크린 위로 파란 하늘이 떠오르고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벚꽃 비가 쏟아진다.
인트로는 가볍고 상큼한 멜로디였는데 그 위로 휘파람이 얹히며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박거리는 보폭의 사운드에 고개를 까딱거리자 둥둥 터지는 드럼 소리가 듣기 좋다. 미디엄 템포에 은은한 편곡으로 발랄한 기운은 살리면서 봄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 커져 버린 이 마음
숨길 수 없어
oh ohh ohh ohh-
시작되는 노래에 맞춰 연습생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가벼운 스텝임에도 칼군무인 게 느껴진다. 몸을 잘쓰네. 리드미컬한 박자에 맞춰 실행하는 안무로 바로 옆의 팀원이 합류하며 동작이 커져 있었다.
-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네 미소
따사로운 햇볕 아래
One step Two step
품이 큰 후드 티가 나풀거리며 다채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얘네는 잘하는 애들 같다. 저 멀리에는 해당 연습생을 픽한 걸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비명이 쏟아지는 게 여간 난리가 아니었다.
1차에서도 본 인물로 떠오르니 그때보다 훨씬 좋은 반응이 이어졌다. 이름이 얼핏 기억나는 것 같기도 했는데 권혜성이었던가. 신해신과 종종 어울려 다니던 연습생이었다.
- 사랑이란 이 감정 너무 벅차 떨려 와
그대로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이 순간이 영원히
멈춰 버렸으면 좋겠어
피아노 반주가 효과음으로 쌓여 가며 풍부해진 멜로디에 싸비가 가까워졌다. 동작이 빨라지는 게, 6명이 줄지어 선 대형으로 두 명씩 짝을 지어 안무를 추는 모습을 보인다. 가운데 페어 중 하나는 신해신이어서 어쩐지 집중이 잘 되는 기분이었다.
서브 보컬의 포지션을 갖고 있었던 모양으로 메인은 아니었지만, 눈에 띄는 편이었다. 이미지에 비해 소화를 잘해서 놀라고 있는 게 의상이 흔들리며 움직임이 커 보인다. 얼핏 드러난 허리춤에, 비명이 난무하는 사방이었다.
그때, 신해신이 한쪽 손을 높이 들어 올리니 이건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는 사인 같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크린 위로 다른 장면이 나왔다. 높은 하늘이 비치면서 시각적으로 풍부해 보이는 효과이다.
"…와."
드라마틱 한 전개에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행되는 곡의 흐름에 빠져들고 있던 찰나다. 살짝 올라간 눈매에 카디건을 입고 있던 연습생이 몸을 돌렸다. 센터 겸 메인 보컬로 보이는 인물인데 타고난 음색이 좋았고 능숙한 라이브 실력도 상당했다.
거기에 신해신이 호흡을 맞춰 화음을 깔듯 더블링해 줬다. 다른 결의 두 톤이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까지의 유명세를 따져 봐도 이상할 정도의 강자들인데 가만히 쳐다보니 아는 연습생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쟤는……."
저번 방청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눴던 인물로 여태까지 미미하던 인지도가 전부 이해됐다. 좃소라고 그랬지. 푸시만큼은 기가 막히게 못 해 주는 소속사 같았다. 그래도 신해신과 함께 묶여 너무 좋은 경연을 선보였다. 이번 턴에는 반드시 이름을 알릴 일이었다.
- 두근거려
안아 줘
그저 말없이
나를 한번 안아 줘
- 안아 줘 It better me now
너와 함께면
나는 항상 행복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잘해서 신기하다. 저 체격들로 어울리는 게 어이 없을 따름이었다. 평소보다는 많이 유한 인상이라고 느껴지는 게 리듬을 타는 것만 봐도 1차 때보다 즐기는 분위기다.
- 하늘을 나는 기분
In the sky high 꿈만 같아
달콤한 네게 취해
오늘만은 아무 생각 없이 Hold me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e
I'm so lucky I met you
- So sweet oh Beautiful girl
너와 함께 있고 싶은 Girl
그대로 Only one
모든 걸 알고 싶어
그 손을 잡고 걷고 싶어
- 이렇게 좋은 날
너와 발 맞춰 길을 걷고
그렇게 눈 맞추고 미소 짓고
이게 바로 사랑일까 Love u
이건 바로 사랑이야 More and more
박자에 맞춰 움직이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스크린이 전환됐다. 꽃잎이 휘날리고 햇볕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자전거 차임 벨 소리가 깔리며 설레는 마음이 샘솟았다.
하이라이트에 다가서자 소리가 풍성해진다. 어째 저번보다 훨씬 잘 부르는 낌새인데, 일반인이라 그런가 흡수하는 속도가 엄청났다.
2절에 가까워졌지만, 음정이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실력으로 욕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어느새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서 놀랐다.
- 두근거려
안아 줘
그저 말없이
나를 한번 안아 줘
안아 줘 It better me now
너와 함께면
나는 항상 행복해
깨끗하지만 선명한 미성으로 메인 보컬인 이정원이 마지막 임팩트를 남긴다. 팀원 전원이 서로를 바라보니 그와 동시에 무지갯빛의 알록달록한 꽃가루가 쏟아졌다.
어딘지 포근하고 아름다운 장면인 게 얘네는 진짜 연출을 잘하는 듯하다. 혀가 절로 내둘러지는 연속에서 무대 위에 서 있는 신해신을 바라봤다.
- 그대로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이 순간 영원히
멈춰 버렸으면 좋겠어
- Pit a Pat girl
망설이지 말고
두 팔을 뻗어
나를 꽉 안아 줘
너를 많이 좋아해
컬러풀한 향연이 이어지며 어딘지 무척이나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제야 뭔가 잘못되고 있단 걸 눈치챘다. 시야에는 활짝 웃고 있는 신해신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망했네……. 아무래도 나는 쟤한테 입덕한 것 같았다.
* * *
엄청난 환호성을 들으며 백스테이지로 내려갔다. 내가 뭘 한 거지. 인트로 이후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1차 때도 그랬지만 저긴 참 이상한 공간이다. 중간부터는 저도 모르게 호응까지 유도한 기억이 난다.
쉼 없이 두근거리는 게 감정 이입이 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며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너무 신나요!"
"혜성이 형, 여기 손 좀 올려 봐. 심장 뛰는 게 느껴지지……!"
"우리 동선에서는 실수 없었지?"
"그랬던 것 같은데……."
권혜성과 배민형은 무척이나 흥분한 얼굴이었는데 제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소리치는 모습이다. 영락없는 철부지들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 뒤로는 차분한 성향의 팀원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