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각 팀의 메인 보컬분들은 앞으로 나와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다녀올게."
"응."
고우림의 부름에 연습생 10명이 앞으로 나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위 순위의 인물들이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포지션 피켓은 순위로 강탈할 수 있었다.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면 좋은 걸 가져갔을 일이었다. 결국은 전부 메인을 지원한 모양이었다. 어찌 됐든 여기가 가장 피 터지는 전쟁터이다.
눈을 굴리며 모두를 쳐다봤는데 저런… 하필이면 강태오네 팀의 메보는 윤명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내심 반대로 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저렇게 되면 강태오가 내 상대일 가능성이 크다. 이정원은 둘보다 좋은 실력이라도 자랑했지, 난 저 둘과 엇비슷한 지경이었다.
대놓고 밀리겠다며 웃어 보인 게, 유명세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그냥 스타트부터 불리하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개인 베네핏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포기해 놓는 것이 나중에 입는 타격이 작기도 하고, 텄다는 생각이 큰 편이었다.
"그럼 메인 보컬 포지션 내 1위를 발표하겠습니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1위는 바로……."
이정원의 뒷모습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경쟁자들 틈에서도 절대 기가 죽지 않는 애였다. 도리어 꼿꼿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담담했지만, 어딘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사실 윤명이 아니더라도 인기 연습생은 얼마든지 있었다. 반대 방향에 서 있는 이민석이 대표격이었다. 쟤는 실제로 데뷔한 적이 있는 경력직 신입이었다.
그래서 원래 그룹의 팬덤이 크게 따라붙었다. 여태까지의 행보도 제법 순탄히 풀렸기에 나름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 판명 지었다. 하지만 조금은 의외인 점이 눈에 띄었다. 얘는 보컬 스탯보다 댄스가 높은 타입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나왔지? 그게 의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뭐, 고정 팬이 있을 테니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정원이 이민석을 상대할 수 있을까 염려스러웠다. 음색이 장점인 애들도 보이고, 시너지 효과가 괜찮은 무대도 존재한다. 결과가 도무지 예측되지 않는 경합으로 고우림의 발표만을 기다리던 찰나였다.
"축하합니다, 윤명 연습생."
결국 이렇게 됐구나. 윤명 쟤도 참 독한 사람이었는데 태평한 얼굴로 좋은 건 다 받아 가는 듯하다. 하지만 그에 따른 후폭풍도 있을 것 같은 게 이건 이민석의 팬덤에게 견제를 살 수 있을 일이었다.
안 봐도 당분간은 인터넷이 뜨거울 일이다. 저 둘의 팬덤이 제대로 맞붙게 생겼다.
윤명에겐 좀 미안하지만, 쟤는 강하니까 알아서 살아남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제3자라서 다행인 시점이었다.
저기 꼈다간 재가 되게 맞을 확률이 높아 보이지. 이쯤 되면 이정원도 이민석보다는 아래를 받는 게 편할 것이다.
분노의 타깃은 자연히 저리로 향할 수밖에 없으니 평화를 원한다면 그쪽이 나았다. 내가 눈치챈 부분을 이정원 얘가 모를 리도 없었는데, 살짝 틀린 고개가 이민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들은 전부 높은 걸 바랬지만, 우리는 낮은 위치기를 기도해야 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게 뭔지 잘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고우림의 손짓으로 등 뒤가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메인 보컬 포지션 1위는 윤명 연습생이 차지하셨습니다. 그럼 뒤에 있는 화면으로 전체 순위를 발표하겠습니다."
거대한 화면 위로 결과물이 송출된 그림이었다. 전체 순위를 한 번에 공개해서 꼴찌는 충격을 받을 듯하다.
감정을 추스리며 차트를 읽어 내려갔다. 이민석이 2위인 게 해피엔딩으로 3위는 이정원이 갖고 와야 했다. 현재 내 소원은 그것뿐이다.
"어! 정원이 형!"
"3위다! 헉, 대박!"
다행히도 내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졌다. 이정원이 제 스탯에 맞춰 실력을 발휘했는지 부족한 분량들 속에서도 당당하게 3위를 쟁취한 것이었다.
표수가 근소한 차이로 보이는 게 아슬아슬하게 2위를 뒤쫓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수준이면 가지고 있는 조건에 비해 굉장한 선방이라고 떠올렸다. 붙어 왔다는 것만으로도 파급력이 따라올 건 분명했다.
이정원의 등이 크게 오르내리는 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 같았다. 남들이 보기엔 단순히 기뻐하는 걸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쟤는 조용히 불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바라는 스스로에게 열이 받은 것 같다. 약소 소속사의 연습생이란 어쩔 수 없는 삶이었는데 그럼에도 분개하는 게 꽤 신기했다.
하긴 쟤는 지나치게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장군은 됐을 인물이다.
"정원아, 고생했어."
"응, 3위네. 기쁘다."
몸을 돌려 우리를 쳐다본 순간이었다. 말투 자체는 만족하는 뉘앙스였지만 그럼에도 눈 안에선 불꽃이 튀어 올랐다.
아, 제발 좀… 카메라를 등지고 있었던 게 천운이다. 얌전히 손을 뻗어 이정원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조금만 진정해. 이유준도 눈치챘는지 시선을 가리며 자연스럽게 무마했다. 그럭저럭 어떻게 빠져나간 듯하다.
스탯으로 따지면 1등은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쉬울 만하겠지. 때마침 두 번째 포지션에 대한 설명이 진행됐다. 서브 보컬을 가진 내가 포함된 곳이기도 했다.
"자, 다음은 서브 보컬 포지션 1위를 발표하겠습니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1위는……."
"축하합니다, 강태오 연습생."
여기도 이럴 줄 알았다. 견제 표니 뭐니 해도 결국은 쟤였던 모양이다. 사실 댄서로 갔을 줄 알았던 연습생이 보컬에서 나와 깜짝 놀랐다.
나중에 보니 원래 포지션의 연습생이 윤명의 음색과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올라운더 성향이 강한 강태오가 여기로 빠진 사태였다.
여러 가지 앞을 내다보는 스타일이었는데 그것도 실력이 되니까 할 수 있었던 모험같았다.
강태오는 어딜 가도 주목받을 타입으로 한곳에 묶인 나머지가 피해자였다. 다른 사람들의 득표수가 참담하겠다고 예견했으니 나는 별 탈 없이 중간만 가 있기를 기원했다. 거의 반쯤은 내려놓은 생각에 메인에 비해 평화로운 게 유일한 위로다.
"나머지 순위 발표하겠습니다. 서브 보컬 포지션 전체 순위 보여 주세요."
"…어?"
"어어, 어! 해신이 형! 형 2위!"
"…뭐? 나?"
강태오의 사진 옆으로 떠오른 건 놀랍게도 내 얼굴이었다. 저건 내가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어 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너무 놀라서 입이 절로 벌어졌는데 1위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 의미가 남달랐다. 우리 무대가 정말 좋긴 했나? 다행스럽게도 그게 큰 효과를 보인 듯하다. 서브 보컬에는 눈에 띄는 강자가 한 명뿐이어서 그로 인한 거저먹기도 없지 않아 있었다.
권혜성과 배민형이 세차게 내 등을 두들겨 댔다. 몸이 흔들리면서도 놀란 심정을 감출 수 없다. 베네핏은 물 건너갔지만 이건 큰 수확이었다.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점이다. 화제성이 강한 사람의 뒤를 따랐으니 남들에겐 인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럼 계속해서 다음 포지션인 메인 댄서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충분한 분량이 나왔는지 속도가 붙었다. 여기선 재밌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메인 댄서 포지션에서 권혜성이 2위를 차지한 것이다. 쟁쟁한 라이벌을 뚫고 저기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베네핏은 못 탔지만, 그저 놀라웠다. 사실 여기도 메인이란 단어가 붙은 곳이었다. 인기 연습생들이 은근히 깔려 있던 부근으로, 주변을 바라보며 전체적인 상황에 대해 분석했다.
권혜성보다 앞선 인물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비등비등한 순위의 연습생이었다.
그 덕분에 표가 분산된 경향을 띠었나 보다. 보컬에선 소용없던 견제가 이 파트에선 통한 듯하다. 운이 좋았다며 권혜성을 바라보니 아주 기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권혜성이 잘한 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밝은 노래를 한 것치고 안무 자체가 복잡했다. 댄서 파트의 둘이 디테일을 잘 만졌다는 뜻으로 미디엄 템포라고 믿기지 않게, 브레이크의 구성이 화려한 편이었다. 나도 연습하며 여러 번 느낀 점이었는데, 역시 이걸 염두에 두고 배치한 거였다.
안 그래 보여도 권혜성은 수를 잘 쓰는 사람이다. 거기에 때마침 성장 트리가 해결됐다. 별다른 방해도 없이 체력까지 좋아진 순간이었다.
최상의 컨디션에 반 이상의 지구력이 따라붙은 게 그러면 시작부터 끝까지 안무의 텐션이 떨어질 리 없었다.
완벽한 퀄리티로 완곡을 해냈다는 소리다. 계획에 이어 하나둘씩 조건이 갖춰졌다. 연쇄적인 행운이 큰 상황을 이끌어 낸 것 같았다.
"저 2위래요~!"
"축하해. 혜성이 너 진짜 잘했어."
"혜성이 형, 오늘 유달리 체력이 안 떨어지네요?"
"그렇지? 나도 신기해. 뭐랄까, 엄청 가벼운 느낌?"
방긋 웃는 권혜성의 모습에서 위기감이 들었다. 방심하고 있던 인물이 치고 올라온 장면이다. 얘도 이번을 기회로 눈에 띌 게 분명해졌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내가 끌려 내려가게 생겼네.
한숨을 참으며 나머지를 지켜보니 서브 댄서의 배민형도 높은 순위을 받아 냈다. 3위로 상당히 상위권인 위치였는데 곡 방향이 잘 어울렸던 게 장점으로 도드라진 듯했다.
거기에 동일 포지션 페어로 권혜성이 붙어 있었다. 같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보인다.
이거 괜찮은 것 아닌가? 다른 걸 배제하고도 문득 든 생각이었다. 포지션 베네핏은 잃었지만, 결과 진행 상황이 유리하게 흘러갔다. 현재까지 받은 순위들은 전부 상위인 편이다.
물론 우리보다 잘한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걔네는 팀 내 등수 편차가 심하게 널뛰었다. 1위를 받아도 다른 연습생이 10위면 평균은 5위다.
이게 이번 보상의 관건이겠지. 우리 팀은 전원이 3위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남들이 봐도 높은 표를 획득한 조합이었는데, 조금만 더 지켜보면 확실해질 것 같았다.
"메인 래퍼 포지션 전체 순위 보여 주세요."
"유준이 형! 2위!"
"내가 2위야……!?"
이유준이 화들짝 놀라 우리를 돌아본다. 이거 잘하면 진짜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원이 형, 우리 전부 다 잘 받지 않았어?"
"그러게. 결과가 좋은데……?"
물론 1위는 타고난 스탯의 문채민이었다. 실력이 실력인 만큼, 얘는 이길 수 없었다. E 피켓 'emotional'을 뽑아 유일하게 감성적인 노래를 한 곳이다.
문채민은 공격적인 스타일의 랩을 하는 유형이라 괜찮을까 오랜 시간 지켜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름값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마저도 완벽하게 소화해 내며 자신을 빛내 보였다.
문제는 문채민을 제외한 나머지 팀원이다. 발라드에 어울리지 않는 음색이 많은 게 탈이었다. 연습 과정에서 난관이 엄청났을 조건으로 강태오네가 난리여서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