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다행히도 어렵지는 않은 조건이었다. 팬이라는 명사가 붙지 않은 전제에 이건 예전처럼 길을 걸으면 될 것 같았다.
뭐, 모자를 눌러써도 될지가 의문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한번 부딪쳐 보자며 몸을 일으킨 게 평일인 탓에 종일 돌아다녀야 간신히 마주칠 인파이다.
그래서 조금은 무모한 일념으로 길을 나섰다. 쇼핑 타운, 오피스 단지, 지하철 등 한참을 걷고 또 걸은 하루였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주저 없이 움직였다.
수상쩍은 몰골이지만, 귓가에는 꾸준히 알림음이 울리고 있었다. 시킨 조건에 맞춰 숫자가 카운트되고 있다는 증거로 이 정도면 귀가하는 즉시 성공할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은 순간, 번쩍하고 시스템 창이 빛을 발산한다.
[신해신]
나이: 22
외모: A
보컬: B+
댄스: B
운: C
끼: B
정보: 플레이어
이벤트: '당신의 아이돌, 그 시작' 진행 중
[보유 스킬]
'한번 보면 잊지 못해(F)' - On
'부릉부릉 운전기사(E)' - On
'저세상 귀염둥이(D)' - On
[현재 코인]
1,315 코인
예상대로 무사히 통과한 해금법이었다. 이제는 외출을 통해 소문만 생성하면 될 것 같았다.
그 기회는 멀지 않은 시기에 찾아와 줬다. 때맞춰 밖에 나갈 약속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길게 진동하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니 역시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의 호출이다.
[이유준]
"여보세요?"
- 형, 안녕하세요. 혹시 오늘 바쁘세요? (해신이 형!)
"안녕. 혜성이랑 같이 있어?"
- 네, 인터넷으로 반응 좀 보려고요. 형 생각 나서 연락드렸어요. 괜찮으시면 형도 오실래요? (저희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엄청 많아요!)
"어?"
- 아, 혜성아. 잠깐만.
- 형, 저희 무대요~ 혹시 안 좋은 얘기 있을까 봐 먼저 찾아봤거든요. 방청 후기가 아주 좋은데요? 와서 같이 봐요.
"우리가?"
아무래도 이유준이 핸드폰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들뜬 목소리가 권혜성의 기분을 짐작하게 해 줬다.
대충 들어도 들뜬 듯한 음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1차 때도 괜찮은 반응을 이끌어 내긴 했는데 이번이 그때보다 상위 수준인 것 같았다.
어차피 나도 나가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혼자 보기엔 두려운 내용이 많은 언론이니까 겸사겸사 합류하기로 마음먹었다.
쟤네가 1차로 바리게이트를 쳐 주고 있었는데 나는 이런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다. 2차 미션 이후로는 참 여러가지 도움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걸로 친하게 지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너무 속 보이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금방 갈게. 기다리고 있어."
- 네, 조심해서 오세요!
벗은 지 얼마 안 된 외투를 다시 걸쳤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짐을 챙겼다.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을 매만진 게 어그로는 목격담이 생성될 수준이면 충분했다. 택시를 타기에는 사정이 좋지 못하니 나는 무조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음, 저것도 껴야겠지. 벽장에 걸려 있던 마스크까지 꺼내 들었다. 아까보다는 인구 이동이 훨씬 많아졌을 무렵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현관을 열었는데 부디 날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기를 기도했다.
* * *
"앗, 영서다! 귀여워~"
"한결같은 다람쥐 상 취향, 대단하다, 진짜."
늦은 오후라 만석에 가까운 지하철 안. 덜컹거리는 전동차에 몸을 싣고 앉아 있었다. 이유준의 자취방에 가기 위한 여정으로 평소와 같은 루트였음에도 긴장이 된다.
바로 옆자리에 있는 두 명의 여성 때문으로 스마트폰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귀에 들리는 대화가 아주 익숙하다. 훔쳐 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건 집중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내가 출연 중인 프로그램 '당신의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다.
벌써 기회가 찾아오다니, 이것도 해프닝 실드의 효과인가 싶어 신기했다. 밀폐된 대중교통 안이란 점만 빼면 완벽한 타이밍 같았다.
"난 유어돌 망할 줄 알았는데."
"아니야~ 얘넨 망할 수가 없지. 남 사단이 욕먹어도 마니아층이 있어."
"하긴, 얘네가 치고 빠지기도 잘하지."
"그래서 완전 대박 난 듯. 내 주변도 난리더라. 친구는 자기 그룹 홈마가 여기로 갈아탄 것 같다고 하던데. 홈 클로즈 했대."
"미친. 누구 픽인지는 찾았대?"
"못 찾은 것 같은데? 계정 갈았겠지. 사진 색감이랑 스타일로 구분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게다가 이름도 바꿔 버리잖아."
"저런… 근데 남 일 같지가 않네."
어딘지 조금은 숙연해지는 내용이었다. 이런 것까지 들어도 괜찮으려나, 애써 무시한 채 다른 걸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앞서 말한 영서라는 인물은 나도 알고 있는 그 애 같았다. 1차에서 같은 팀을 했던 최영서이다. 또랑또랑하고 힘이 넘쳐 분위기 메이커였던 인물로 장난치길 좋아해서 나와는 곧잘 투닥거렸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당해 주는 포지션이었지.
다른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지만, 왠지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같은 팀원에, 투 샷을 그렇게 잡혔는데… 모를 리가 없겠다는 추측이다. 괜히 긴장이 되는 것 같아 앞으로 팔을 끌어 모았다.
한참을 얌전히 앉아 있었던 무렵이었다. 목격담을 생성해 보겠다고 다짐한 건 좋았지만 시도하기엔 환경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냥 다른 날을 노릴까. 일반 시민이 많이 있어 힘들 분위기다.
"헉, 신해신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말했지, 얘 장난 없다고."
"실력이 점점 좋아진다? 처음엔 존재감도 별로 없었는데……."
"제작진 픽이 아니었잖아."
"영서가 장난치길 좋아해서 알고는 있었지… 근데 얘는 갭이 오지는구나."
"겉가죽이 대활약했다는 이야기 주인공이잖아."
"안 그래도 그거 봤어. 우리 애랑 분량 많던데."
"둘이 싸우면 최영서가 이길 것 같다고 했던 거 존나 웃겨. 다시 생각해도 골 때리네……."
"그러고 보니까 얘 요즘 캐릭터가 잡혔지. 그래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현장 입덕이 좀 많은 듯? 실물이 훨씬 잘났나 봐. 분량도 무난했으니까 여기서 이름 알리려는 것 같은데."
"그래도 넌 타 돌 파잖아."
"걔네도 좀 식었어. 리더가 연애하는 것 같거든."
"뭐, 미친. 설마 걔?"
"연애를 할 거면 들키지나 말든가. 상대편에서 존나 티 낸대. 인플루언서라서 안 들킬 수도 없어. 아웃스타그램을 메워야만… 갑자기 빡치네……?"
들려오는 대화가 살벌한 낌새를 보인다. 저도 모르게 헙, 하고 숨을 들이켰는데 잠깐이었지만 나도 언급이 됐던 찰나였다. 객관적인 팬들의 입장을 알게 됐다.
왠지 앞으로의 진행 방향이 유추되는 것 같기도 했다. 3차 무대에 대한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니 역시 분량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포맷이었다. 얼굴을 비추자니 거론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으로 이대로만 가면 생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역은 ○○,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This stop is ○○…….]
그렇게 주저하다가 내릴 역에 도착해 버렸다. 이 와중에도 한결같이 몰입하고 있는 두 명이었다. 관심을 돌릴 틈이 존재하지 않는 게 낌새를 보아하니 여기선 그른 것 같았다.
안 될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곤 하차하기 위해 출구 앞으로 다가섰다.
쓰고 있던 마스크를 매만지며 고치던 찰나,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뭔가 싶어 돌아보니 아까 앉아 있던 방향이다. 이야기를 나누던 한 명이 여길 바라보고 있었는데 미간이 한껏 찡그려진 게 뭔가 집요한 표정이었다.
"……."
"……."
설마, 알아본 거야? 선택을 정하기도 전에 그만 지하철 문이 열려 버렸다. 타이밍도 참 나빴지. 여기서는 그냥 나가기도 이상한데, 다른 생각은 할 겨를조차 없었다. 조금은 충동적으로 움직인 찰나였다.
황급히 손을 들어 모자챙을 살짝 올렸다. 눈만 약간 나오는 정도로, 그 틈에 시선을 마주했다. 상대방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지는 중에 깜짝 놀랐는지 어깨까지 들썩거린다.
"…어? 어?"
"뭐야, 너 왜 그래."
함께 있던 일행이 고개를 돌리던 시점이었다. 이 정도면 예의는 차린 것 같다며 안도하곤 지긋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문이 닫힐세라 서둘러 걸음을 옮긴 참에 시기 좋게 안내 방송이 들리며 출입문이 닫혀버렸다. 조금은 아슬아슬했는지 등 뒤로 옷자락이 막 빠져나간 순간이었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올린 모자챙은 다시 앞머리 위로 눌러 썼다. 스크린 도어 너머로 굳게 맞물린 문이 보인다. 창가에는 아까의 그 팬들이 상체를 돌린 채 붙어 있었는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게 어딘가 무척 흥분한 얼굴이었다. 뭐라고 말하는 건지 입을 뻐끔거리는 모습에서 들리지가 않아 재미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저게 긍정이라는 부분이지. 미묘한 기분이 들어 피식하고 작게 웃었다. 그러곤 지하철이 떠나기 전에 서둘러 허리 숙여 인사했다.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왠지 이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굉음을 내며 열차가 출발했다.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고서야 돌린 몸이었다. 고요해진 플랫폼 위로 걸음을 내디뎌 빠져나갔다. 어딘가 생소하고 복잡한 마음이었다.
* * *
"형, 혹시 오는 길에 들켰어요?"
"응? 뭐가?"
"커뮤니티요. 좀 전에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
집주인과 기타 1인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한 곳이었다. 하도 자주 와서 이제는 익숙해진 이유준의 자취방이다. 외투와 마스크를 벗어 걸고 소파에 앉으니 몸에서 힘을 빼기가 무섭게 권혜성이 질문해왔다. 얘기를 들어 봐선 아까 그 사람들 같다.
벌써 올려 준 건가 싶어 신기하다. 때마침 이유준이 다가오고 있었다. 작게 웃어 보이는 게 얘도 그 글을 읽은 모양이다.
"지하철 이거, 형 얘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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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덕할 뻔하다 실패한 썰 푼다 << 싢해싢 목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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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안녕 성덕할 뻔하다 실패한 썰 푼다
오늘 친구랑 놀러 간다고 지하철 타고 있었단 말이야
유어돌에 빠져있어서 블투 끼고 봤거든
내 최애 (앙킁상큼영람쥐 최영서) 분량 보면서 개 쪼개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젊은 남자 한 명이 앉아 있더라고
요즘 세상에 폰도 안 보고 가만히 있는 거 신기하잖아
(판별 못한 건 다 싸매고 있어서야 ㅜ 모자에 마스크까지 했더라)
뭐하는 인간이길래 저러고 있나 했지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길래 가나보다 하고 쳐다봤거든?
근데 어라? 뭔가 예사롭지 않은데? 출입문 앞에 서있는데 포스가 장난 없는 거야
얼굴 개 쪼그맣고 다리 길고 그 말랐는데 골격 짱짱한 스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