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렇게 다시 연습실에서 연습을 했다. 매일같이 코인을 캐고 스탯을 정비한 나날이었다.
권혜성은 근래 올라간 인지도가 높아 소속사의 단속을 받고 있는 듯하다. 간혹 기운이 없는 목소리로 전화가 와서 통화하는 게 전부였다.
이유준도 다른 일들로 바빠진 모양인지, 모두 얼굴을 보기 힘들어진 기간이었다. 옆에 있던 애들이 사라지자 혼자만의 시간이 길어진 휴식기다.
씻고 앉아 TV를 켠 찰나로 이 방송이 끝나면 다음 녹화를 준비해야 했다. 괜찮은 반응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어떻게 다뤄질지가 미지수인 시점이었다. 팀 승리로 얻은 혜택이 효과를 보였는지, 난해하지만 나름 좋게 나온 편이다. 애먼 걱정은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는데 적어도 3차 전엔 이미지 소비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8번 방에선 분란의 조짐이?]
: 하, 난 처음 하는 거잖아.
: 그래서? 망쳐도 좋다는 거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상황]
: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속도 좀 맞춰 달라고.
: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 그리고 우리 시간 없다는 것 잊었어?
[갈등이 발생한 래퍼 포지션]
: 경원이 형, 병건이 형. 좀 진정하세요.
: … (당황)
: … (한숨)
[인터뷰]
: 솔직히 화났죠. 처음에는 잘 알려 주겠다고 했는데.
: 조금 스파르타로 진행했는데, 투덜거리니까요. 저도 연습할 시간 빼서 하는 거잖아요.
6화에선 부딪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한 명은 강태오에게 패널을 뺏긴 연습생이었다. 남은 자리로 가며 서브 래퍼가 되어 있으니 말싸움의 상대는 그 연습생과 합을 맞춰야 하는 메인 래퍼였다.
이경원이네. 권혜성 때문에 알게 된 인레코드 소속의 연습생이다. 결국은 그때의 트러블이 그대로 방송을 타 버린 듯하다. 무조건 쓸 것 같았는데 역시 바로 이용한 제작진이었다.
큰 기 싸움이라서 일부러 무대 직전에 깐 것 같았다. 원래 이런 건 뒤에 나오는 게 자극적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식겁해서 입이 벌어지는 건 참기 힘들었다.
처음엔 화기애애하게 연습을 하는 듯했다. 낯선 파트로 조율을 하는 과정이 길어지자 뒤집힌 분위기다. 성격 차이가 확실해서 어긋나기 시작한 것 같다. 한쪽은 느긋한 성향이었고, 한쪽은 다급하고 엄격하다. 아무래도 그 간극이 좁혀지지 않아 발생한 다툼으로 보였다.
지금쯤 우정환은 어벤져스를 떠나 봉착한 위기에 속을 붙잡고 있을 것이다. 1위와 3위가 들어간 팀이었는데,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구간에서 어그로를 끌어 만든 포맷이었다. 제작진의 의도를 알 수 있었던 게 저길 뒤흔들어 뒤편까지 계속 보게 하는 작전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이경원 연습생]
[다급하게 뒤쫓아 나가 보는데]
[이병건 연습생은 강태오 연습생의 위로를 받아 남은 모습]
: 태오야……. (울먹)
: 일단 진정하세요. (토닥)
그 와중에 강태오도 놓치지 않는 게 눈에 띄었다. 은연 중에 파벌을 나눈 것처럼 다뤄진 게 해당 인물의 성격상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사람을 친목질 하는 타입으로 만들다니, 연계하는 수법이 장난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황 PD가 한 번 더 힘을 쓴 듯하다.
도리어 카메라가 붙기 직전의 저녁 식사 시간인 게 천운처럼 여겨졌다. 밥을 핑계로 어떻게든 벗어난 팀인데 우정환이 어색하게 웃으며 마이크를 빼고 나왔을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때 문채민과 함께 있을 수 있었구나. 중간에서 애를 쓰며 대처한 게 목격됐다. 팀원들 사이에선 멍한 얼굴의 윤명과 지쳐 보이는 김찬규가 같이 잡혀 나왔다. 김찬규는 마음을 먹자마자 고난에 휩싸인 듯하다. 저런.
: …저녁 드시고 다시 모여요. 다들 좀 식히시고요.
: …응.
[인터뷰]
: …좀 무서웠어요. 너무 살벌해져서 걱정스러웠죠.
: 둘 다 이해는 해요. 힘들었겠죠.
: …어려운 걸 하니까요.
: 아, 감정이 너무 상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이병건은 자신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당황한 얼굴로 강태오 주변을 서성거렸는 게 남아 있던 강태오는 골치가 아팠는지 지친 안색이었다.
그 와중에 본인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단 걸 전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우정환이 말해 줬던 부분이 정답으로 윤명과 김찬규는 열외를 시키는 게 안전할 일이었다.
"강태오 쟤도 고생했네. 저 둘만 안 싸웠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아니다… 이런 걸 보면 초반부터 타깃이었겠지."
안정권인 애들까지 묶은 위기가 여긴 그냥 기름을 들이붓는 단계였다. 다툼만 아니었어도 할 만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당분간은 SNS가 논란으로 뜨거울 것 같았던 게 반은 괜찮았고, 반은 난리였다. 팬덤을 떠나 이때다 싶었던 악플러들이 튀어나올 것 같기도 했다. 온갖 공방과 설전이 오갈 예정이었다.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도 당분간은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기로 했다.
"이민석이다."
때마침, 2위의 이민석이 등장했는데 가만 두고 보니 여기도 그리 좋은 풍경은 아닌 것 같았다. 원래의 팬덤도 고인물 파티라고 했지. 새로운 팬층 유입이 적어서 하락세를 탈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제작진이 원 톱 체제로 편집했다. 방송 자체에서 강하게 강조한 장면으로 다른 팬덤의 반감을 사게 만드는 위험한 장치였다.
해당 팀원들은 녹화할 땐 알 수 없었을 부분이다. 미묘하게 흐름을 맞추는 거니, 시청하는 이제야 알았겠지.
[인터뷰]
: 민석이 형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 준 것 같아요.
: 좀 강한 컨셉이어서 걱정스럽기는 한데…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 팀원분들이 수긍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내용만 봐도 화기애애했지만 이상한 타이밍에 써서 그런 게 정답이었다. 이걸 보니 이번 편은 상위 라인을 뒤흔드는 그림이라고 판명되었다.
다른 팀에 비해선 순해 보였으나, 은근슬쩍 여지는 남겨 두는 게 어째 발표식에서 많은 변화가 있을 거라고 직감했다. 유력 데뷔조 멤버들의 변동이 추측되는 시간이었다.
* * *
[신해신]
나이: 22
외모: A
보컬: B+
댄스: B+
운: B-
끼: B
정보: 플레이어
이벤트: '당신의 아이돌, 그 시작' 진행 중
[보유 스킬]
'한번 보면 잊지 못해(F)' - On
'부릉부릉 운전기사(E)' - On
'저세상 귀염둥이(D)' – On
[현재 코인]
1,040 코인
[블랙 쿠폰]
1매
2주 가까이 지나서 촬영을 위해 입소하러 가는 길이었다. 업데이트로 갱신이 된 스탯을 읽어 나갔다.
주 5회 이상 연습실에 출석 체크를 하며 코인을 캐고 금액을 모았다. 덕분에 삼천대를 넘긴 게 눈에 띄었다.
안정권에 들어가자마자 운 스탯의 해금법을 오픈했는데 다른 부분에 비해 장기간 내버려 둔 파트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스치듯 읽은 댓글 하나가 신경 쓰여 올리기로 한 부분이기도 했다.
'쟤는 어려운 것만 하네.' 내 말이 그 말이다. 1차부터 한 번을 편한 걸로 하지 못했지. 솔직히 경연이라 어느 정도는 포기한 부분이 있었다. 남들도 쉽다고는 장담하지 못하니까 그러려니 하며 넘긴 편이었다.
그래도 이건 조금 너무한 것 같았다. 내가 지나온 곳은 확실한 가시밭길들이었다. 매 절차마다 난이도가 심한 편이라고 확신한 게 어렵지 않으면 난감한 컨셉만 부여받았다.
그래서 다시 시작할 무대마다 예측하는 게 두려워졌다. 어쩐지 머리가 아파 두통이 올 것 같았다.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운 스탯밖에 없어 보였다. 윤명을 보며 깨달은 점이기도 했다. 사실 올린다고 크게 변할 거란 확신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 애도 1차에 비해서는 2차가 힘겨워 보이긴 했다. 반은 그냥 심리적인 안정 효과라고 다독였는데 이래도 안 변하면 팔자인 거라며 포기하기로 했다.
올린다고 티가 날 타입의 스탯이 아니어서 품을 들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코인을 투자하며 낮은 것보다는 높은 게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계 자체도 높지 않아서 그랬는지, 해금법의 조건이 까다롭진 않았다.
[운 스탯 해금 방법]
오늘의 별자리 운세 3위 안에 들어가세요.
[변화 가능 스탯]
운: C → C+
[운 스탯 해금 방법]
오늘의 별자리 운세에서 주어진 행운의 아이템을 소지한 채로 생활하세요.
[TIMER: 24 : 00 : 00]
[변화 가능 스탯]
운: C+ → B-
곧바로 인터넷을 켜 해당 별자리 순위부터 확인했다. 불안한 감이 있는 조건이었는데 이렇다 할 방법이 없어 실행해야 했다.
이미 쓴 코인이라 후회도 소용없고, 시스템이 융통성 있게 해결해 주기를 기도했다.
천운이었는지 그 날 액정 위로 떠오른 내 별자리는 3위 자리 안에 올라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업데이트를 알리는 창이 새롭게 떠올랐다. 남은 건 맞는 아이템을 챙기는 일뿐이었다.
'이게 되네? 3위 물병자리, 오늘의 아이템은.'
적혀 있는 단어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난감하게 머리를 긁적이다 집 안을 뒤적거렸다. 방구석에 위치한 서랍 속에서 원하던 걸 찾아낼 수 있었다. 들어 올린 물건이 정답이었는지 해금법 아래쪽의 타이머가 움직였다.
[TIMER START!]
[TIMER: 23 : 59 : 59]
'장난하냐. 이걸 어떻게 종일 갖고 있어.'
손에 들린 물건은 고리가 달린 뽑기용 곰 인형이었다. 예전 알바처에서 강제로 하사받은 짐이기도 했다.
회식 후 취한 동료가 내게 던져 준 것이 떠오르는데 운세 하단에 적힌 문구를 바라보니 반드시 달고 다녀야 할 것 같았다.
예상대로 타이머는 아주 정확했다. 몸에서 인형이 떨어질라치면 바로 정지했다. 진짜 24시간을 지니고 다녀야 할 상황으로 쓸데없이 체계적이어서 한숨을 쉬었다.
'집에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고민 끝에 손을 쓰지 않고 갖고 다닐 수단을 고안해 냈다. 그냥 바지 벨트 고리에 걸어 놓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하면 떨어지지도 않는 데다가 이동도 가능했다. 움직이기도 편할 것 같은 게 연습실을 가야 할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외출을 시도하던 무렵이었다. 어차피 모자와 마스크를 낀 상태였으니, 나인 걸 알아볼 인물은 없어 보였다. 조금은 수상쩍은 인간이 만들어졌는데 이건 그냥 해프닝 삼아 무시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이유준과도 연습실 이용이 겹치지 않는 추세였다. 상대 쪽이 바쁜 탓에 마주치는 게 더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과거였다. 강하게 자신하고 있었던 찰나, 들어가기가 무섭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름이 돋았다. 다급히 발걸음을 멈췄으나 운 스탯 올라간 게 맞는 건가 의심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