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64화 (64/328)

64화

방송을 안 보던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건 성공적인 흐름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대충 사이트의 한 바퀴만 돌아봐도 알 수 있는 게, 우리 팀 팀원들에 대한 유입이 많아진 걸 확인했다. 잘하면 이번 발표식에서 약간의 순위 상승을 노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벌써 서바이벌의 절반이 진행돼서 이제는 무조건 안정권엔 진입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는 게 일단 발을 밀어 보기로 결정했다.

어떻게든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다른 것보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열심히 하는 자신이 가장 어색했다.

* * *

촬영 시간이 가까워지자 숙소 내에 있던 연습생들이 하나둘씩 방을 나섰다. 대충 매무새를 정리하고 그에 합류하며 쫓아 나갔다.

방문을 닫고 몸을 돌린 찰나, 저 멀리서 걸어오던 인물과 눈이 마주친다. 자세히 보니 문채민이었다. 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손을 들어 반갑게 아는 척해주니 상대방에게서 화답이 들린다.

"형, 안녕하세요."

"안녕."

어쩌다 보니 퇴소 후 말을 놓게 된 사이였다. 알고 지낸 지도 제법 돼서 괜찮을 느낌이다.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거리다가 일행이 없어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복도를 거닐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데 주된 건 휴식 기간 동안 뭐 했냐는 이야기였다.

"연습하고, 뭐 연습하고, 음, 연습밖에 없었네."

그동안 했던 일은 정말 연습뿐이었다. 뭐가 됐든 내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 차분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가끔은 바람도 좀 쐬세요."

"여유가 생기면. 일단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아서."

티를 내지 않아 그렇지, 매일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스탯 신경 쓰랴, 코인 벌랴, 몸이 세 개는 돼야 할 스케줄이었다.

"오늘도 바로 발표식이겠죠?"

"투표는 끝난 것 같으니까 그러지 않을까? 인원이 또 줄겠네."

"쉴 틈 없이 3차겠어요."

이건 강인한 멘탈의 문채민에게도 빠듯한 일정인 것 같았다. 방송에선 절대 보여 주지 않는 낯이다.

"힘내자."

"네."

사실 팀 선정 방식을 몰라 난감한 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유추되는 곡 정하기는 반쪽짜리 지식이 전부다.

원래는 3차 미션 전에 박지수를 찾아 담당 컬러의 깃발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단체로 이동하는 진행 통제로 깔끔하게 포기한 시점이었다. 이번에도 그냥 맨몸으로 부딪치게 생겼다.

입구가 가까워짐에 정체가 생겼는데 버스에 탑승하는 과정이 길어진 것 같다.

늦게 나온 탓에 우리는 한참 뒤에 서 있었다. 저 멀리 카메라가 보이는 게, 슬슬 이야기의 주제를 골라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상대가 문채민이라 다행이다. 별말 안 해도 사릴 줄 아는 인물이었으니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현재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단어들을 캐치 했다.

"역시 휴식 때도 소속사로 출근하는구나."

"하교하면 거의 그렇죠. 그래도 가끔은 휴가 받아요. 그때 다른 사람들도 좀 만나고요."

"아, 맞다. 너 학생이었지. 몇 학년이더라."

"저 고 2요."

"가끔은 네가 혜성이보다 연하란 사실이 놀라워."

"하하, 그런가요?"

"그나저나 다른 사람?"

"아, 유준이 형이요. 정환이랑 셋이 자주 만났거든요. 솔직히 저희가 초반에는 많이 어색했죠."

1차 무대 전까진 조용하던 사이의 트레픽 관계자들이었다. 그것도 얼마 안 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우정환은 이유준을 꽤 친근하게 부르곤 했다. 역시 성장 트리 수치가 변화한 건 이것 때문인 모양이다.

걱정은 뒤로한 채 유리문 너머를 바라봤다. 왠지 남 일을 신경 쓸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나저나 걔는 또 뭐가 나오려나. 어딘가 부러운 심경에 사로잡혔다. 그게 없어도 뛰어난 애들이란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채민아, 형."

"해신이 형, 오랜만에 보네요?"

"어, 안녕. 그나저나 너희 왜 뒤에서 나와?"

"유준이 형이 미적거려서 꼴찌로 나왔어요."

"…혜성이 네가 내 캐리어 쏟았잖아."

때마침 등 뒤에서 아는 연습생이 대거 나타났다. 아까 전과 다른 시끄러움이 이어지는데 투닥거리는 둘의 모습에 고개를 내젓다가도 미소를 지었다. 뭔가 익숙해진 기분이 든다.

* * *

대충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그래도 한 번은 해 봤다고 적응을 하긴 했나 보다. 숨이 막히지는 않았지만, 긴장은 했던 게 오늘 여기서 스무 명이 탈락할 예정이었다.

우선 당장은 떨어지진 않겠다고 장담했다. 문제는 얼마나 상승했냐는 점이다. 연습생이 줄어들면서 팬덤의 입지가 단단해진 부근으로 영향력을 보여야 유입이 공고해질 것 같았다. 투표 시스템으로 생존까지 정해지니 여러모로 참 힘들었다.

이건 팬의 힘이 필요한 부분인데 확실히 내가 여기 남아 있는 것도 전부 그 사람들 덕분이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던데."

"…갑자기요?"

"이런 말이라도 해야 덜 긴장해."

머쓱하게 웃으며 스탠바이를 대기했다. 아무 말이나 해야 마음이 평온해진다. 촬영 전까지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인근을 둘러봤다.

아는 연습생들이 배치된 광경이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인연이 있는 인물들도 발견됐다. 이정원과 김찬규는 같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제는 다른 애들도 저 무리에 대해서 적응한 것 같았다. 초반에는 둘을 보고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나온 걸 확인했다. 그것도 계속 반복되니 익숙해졌는지 덤덤한 기색이었다.

역시 사람은 단순한 동물이라고 적당히 무마된 게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스탠바이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에 자세를 고치자 조명이 켜지면서 엄숙한 얼굴의 고우림이 나왔다. 이 장면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게, 여기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그냥 경건한 마음으로 정면만 바라봤다.

"그럼 이제부터 2차 순위 발표식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39위는……."

저번과 같은 방식으로, 이번에도 마지막 생존자를 제외하고 불리는 듯하다. 커트라인이 30위대이니 꽤 위험해 보였다. 연습생들에겐 은근히 공포로 다가온 시점이기도 하다. 호명된 연습생은 안도감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저 다음 발표식에선 위험한 위치란 걸 상기한 얼굴이다. 조금은 복잡한 심경을 품은 채 고개를 숙여 소감을 발표한다. 울지 않은 게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 시즌의 출연자들은 정신력이 강한 타입이 많은 것 같다.

그렇게 계속 이어진 녹화로 1차에서 많은 인원이 떨어져 저번보단 여유가 있다. 중간에는 뜸까지 들이는 모습이 포착됐는데 분위기를 제어하려는 듯 제작진과 고우림 사이에 신호가 오간다.

애써 의연한 척 가만히 앉아 있었으나, 머릿속은 빙글빙글 돌고 있는 중이었다. 아는 애들이 20위대에서 잔뜩 불려 나가고 있으니 개중에는 김찬규도 섞인 모양이었다. 의외로 심지 굳게 잘 버텨 낸 인물이다.

단호한 면이 있던 애답지 않게 조용한 구석이 있었고, 나와는 다른 방면으로 멘탈이 약한 타입이었다.

기가 센 인물이 많아 티가 나는 성격인데 그걸 선호하는 시청자들도 꽤 존재하는 듯했다. 잘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위치를 되새기니 남 걱정 해 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20위 초반에 들어가고부터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저번엔 이쯤에서 불렸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기 언저리일까 눈치를 보는데 불리면 탈락은 면한 거고, 안 불리면 탈락 리스크를 품고 가야 할 처지였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단상을 구경하길 한참이었다. 후자였는지, 내 이름은 계속해서 나오지 않고 있다. 성신원과 배민형도 자리에서 일어난 게 방금 막 생존한 걸 눈앞에서 목격했다.

여기는 파이널에 갈 수 있는 안정권으로 같이 인기를 끌었다는 게 실감 나는 대목이었다. 기억 속 커뮤니티에서는 많은 지분을 차지하기도 한 애들이다.

수더분하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조용히 웃어 줬다. 뭐가 됐든 저 애들의 결과가 좋다는 건 내게도 희망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제 10위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폭 줄어든 합격의 문이 나타났다. 유명세를 탄 게 진짜인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상당한 상위권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유준과 권혜성도 아직까지 건재하다.

좌석의 절반은 채워진 상태로 여기서 15위에 우정환의 이름이 불렸다. 소소하지만 계속 상승 중인 인물로 특유의 호탕하고 솔직한 면이 인기를 끈 편이다.

권혜성과 둘이 묶여 리액션 장인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쾌남을 좋아하면 저 연습생이 주된 픽일 것이다. 2차에선 어른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줬으니 타당한 자리였다.

"지치지 않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런 우정환이 되겠습니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제 12위를 발표하겠습니다."

슬슬 타이트하게 조이는 판국이다. 탈락할 실력들은 아니었는데 진짜 좋은 저력을 보여 준 것 같았다.

"12위는, 1차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무대를 장악하신 분이죠? 축하드립니다, 이유준 연습생."

동시에 놀랐다는 표정의 이유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가 나진 않았지만, 상당히 올라간 순위다. 제 심경을 풀면서도 차분함을 유지하는 게 외모부터 성격까지 인기를 끌 만한 요소가 많은 타입이었다.

"이렇게 높은 순위를 받을 줄 몰랐습니다. 응원해 주시는 모든 분께 정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활짝 웃는 안색이 예전보단 훨씬 밝은 기운이다. 뒤에서 나오는 저력이 엄청나다며 혀를 내두른 게 얘네와 조금은 멀어져야 한다는 가설이 맞아떨어졌다. 이 속도라면 앞으론 더 빠르게 치고 올라갈 것이다.

그나저나 이제는 정말 될 대로 돼라다. 이유준은 넘기고, 다른 애들은 어디까지 갈지 예측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아직 불리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거 위험한 것 같은데. 반응이 좋았던 걸 떠나 문득 내 자리가 위험하게 느껴졌다. 눈에 띈 것만으로도 천운이라 여겨야 하나.

생존이 아니라 탈락인 걸까 하는 고민이 들던 부근이다.

"11위는, 매 무대마다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 주시는 분이죠. 축하드립니다, 신해신 연습생."

그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볼 심산이었는데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난처하다. 우선 입가를 쓸어내리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 우선 지금 이 자리가 꿈만 같습니다. 정말 많은 분의 응원과 사랑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항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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