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65화 (65/328)

65화

마이크에서 한 발짝 걸음을 물리며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해야 할 것 같다. 조용해진 좌중 너머로 누군가 박수를 쳐 준다. 퍼져 가는 호응을 들으며 뒤를 돌아 움직였다. 전보다 너무 많이 높아진 숫자가 보였이는 게 목표했던 것에 가까워진 자리여서일까, 복잡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다른 의미로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누군가 이것에 대해 정의를 내려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8위는 뛰어난 댄스와 구김 없는 명랑함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권혜성 연습생."

펄쩍 뛰어오른 권혜성이 달려 나갔다. 우리 셋 중에서는 제일 튼튼한 인물이기도 했다.

마이크를 쥐곤 고우림을 바라본 게 뭐라고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 모습이다. 잔머리를 쓰는 구석이 있었으나, 성정부터가 구김살이 없는 유형이었다. 얘를 미워할 수 있는 인간은 드물 게 확실하다.

"어… 어… 지금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안 나와요."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역시 쟤 덕분에 지금 이 환경이 유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8위라… 말이 8위지, 저건 곧 데뷔권이 코앞인 자리였다. 쟤는 정말 노력파인 성실한 연습생인 게 정답이다.

"너무 감사합니다. 항상 꿋꿋하고 꺾이지 않는 권혜성이 되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허리 숙여 인사하는 권혜성에 특유의 곱슬머리가 나풀거렸다. 안도하는 기색으로 생글생글 미소 지었는데 큰 보폭의 걸음에서 그 심경이 느껴진다. 하여간에 내 주변에는 재밌는 애가 많다니까.

"…형들!"

"축하해."

지나가면서도 말을 걸어오니 그에 화답하며 입 모양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나와 이유준보다는 약간 위에 위치한 공간이었다. 발을 동동거리는 게 어지간히도 기쁜 것 같다. 그 상태로 계속해서 나머지 진행을 구경했다.

"7위는, 뛰어난 보컬리스트로서의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 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정원 연습생."

때마침 공격적인 성향의 이정원이 불려 나갔다. 얘의 엄청난 상승세에 모두가 감탄한 것 같았다.

실질적인 숫자로는 거의 20계단을 뛰어오른 인물이다. 과연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메인 보컬감의 등장이란 굉장한 힘이었다.

박수를 치면서도 시선을 뗄 수 없는 심기 굳은 얼굴이었다. 이건 그냥 집념의 승리처럼 느껴지는 게 첫 만남부터 어딘가 심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한번 목표 삼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이제는 그냥 경이로운 수준이다. 거리를 둬야 하는 인물로 급부상시키며 위험 리스트에 쟤의 이름을 넣었다.

다들 많이 놀랐는지 뒤돌아 올라가는 이정원을 향한 눈길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얼핏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역시 어딘가 조금 부담스러운 성향이었다.

민망함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틀어가며 피해버렸다. 쟤는 진짜 내 성격으론 감당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다.

"축하드립니다, 문채민 연습생."

다음 순번으로는 문채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2차에선 한 단계 떨어진 등수였지만 서운하지도 않았는지 깔끔한 태도를 고수한다.

참, 부모님이 어떻게 키운 건지 궁금하네. 미련도 없이 단정하게 소감을 발표하며 의연한 자세를 유지한 문채민이었다. 데뷔조 중에선 안정권이라고 할 수 없었으나 그런 건 이 애를 뒤흔들기에 부족한 것 같았다.

드디어 막바지에 도달했는지 속도가 붙은 발표였다. 기존에 강세를 보인 상위 순위들이 쓰러져 나가는 게 확인됐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민석으로 하락세를 탄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굉장히 눈에 띄는 변화이다.

강태오와 함께 견고하던 투 톱 레이스가 깨진 상황이었다. MC이던 고우림조차 놀란 표정을 짓는 게 예상하기 힘들었던 흐름이었다.

이민석은 4위에 안착하며 소감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번 데뷔했던 경력이 어디 안 갔는지, 암담한 심경을 잘 가리는 행색이다.

나는 이게 본격적인 순위 변동의 시작이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 뒷 시즌에서도 흡사한 일이 있었으니까 어렴풋인 보이던 그림이다. 이민석한테는 미안했지만, 강자 무리에 지나치게 오래 섞인 게 악수로 돌아온 걸 거다. 실력 자체는 괜찮았는데, 주변 인물들과의 상성이 좋지 못했지. 맞지 않는 포지션까지 했던 일이 큰 타격을 입혔을 거라고 생각했다.

치고 올라갈 만한 연습생이 가득해서 다른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이상, 미끄러질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 와중에 윤명과 강태오는 자신의 자리를 공고하게 지켜 냈는데 분명 같은 팀에서 싸움이 일어났었다. 노선도가 흔들릴 큰 위기였지만, 꿋꿋하게 잘도 버텨 낸 듯하다. 그때의 미묘한 편집에서도 살아남은 애들이었다. 팬덤의 입지가 단단했는지 어지간해선 탈이 나지 않을 것 같다.

1위는 당연한 것처럼 강태오에게 주어졌다. 바로 아래 2위로는 윤명이 불려 나갔다. 이민석을 완벽하게 밀어낸 모습으로 보이는데 어쩐지 저 둘의 팬덤은 사이가 좋지 못할 것 같았다. 이곳의 상위권은 그냥 괴물들뿐이다. 내가 여기서 버티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상으로 2차 순위 발표식을 마치겠습니다. 연습생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탈락한 연습생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장면인 게 사방에서 카메라가 돌아다녔다. 일부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며 머쓱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호명된 연습생들도 다급하게 좌석에서 일어났다. 저건 전부 자신의 지인들을 찾아 나서는 행동이었다.

나도 아는 애들을 체크해 봐야 할 것 같아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2차 팀원은 전원이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차에서 같이했던 연습생이 떨어진 걸 목격했다.

정신력이 괜찮은 유형이었는데도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위 칸에 있던 문채민이 나를 바짝 쫓아 붙는 게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좋지 못하다.

"진성아."

"진성이 형."

"어? 형, 채민아. 하하, 이거 엄청 뻘쭘하네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맞이해 준다. 왠지 그게 더 안쓰러워서 움찔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문채민이 서둘러 서진성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얼굴을 매만지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말을 골랐다.

그러는 사이 등 뒤로는 김찬규가 다가와 있었다. 안 그러는 척했지만 여기 있는 모두는 전부 다 같은 입장이었다. 저 일이 내게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조차 할 수 없으니 남의 탈락이라고 무시할 순 없다.

한숨을 쉬더니 그것도 잠시, 다시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울음기는 있었지만 뭔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다. 가볍게 인사를 하며 정든 사람들을 향해 예의를 차렸다. 의견 차이가 없었다고는 못 할 사이지만 어찌 됐든 동고동락한 팀원이었다.

"아~ 어쩔 수 없지. 전 여기까지인가 봐요. 모두 꼭 데뷔하기야?"

"진성이 형……."

"찬규 너 이 자식, 순위 많이 올라갔더라? 요즘 보기 얼마나 좋아."

"…네."

"기운 내. 그리고 이왕 살아남은 것, 끝까지 가 봐."

"…네. 꼭 그럴게요."

김찬규와 서진성의 대화는 못 들은 척 넘겨 버렸다. 안 그래도 은근히 많이 부딪쳤던 둘이었다. 물론 그게 사라지면서 가장 친해진 무리이기도 했다. 적지 않은 정이 들었는지 세심하게 챙겨 주는 모습을 보인 게 기억났다.

다사다난했던 그동안을 떠올리면 좋은 끝맺음을 지은 마무리였다. 해피 엔딩이라고 자신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이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 * *

3차 촬영을 앞두고 버스에 탑승했다. 아까 전보다는 많이 호전된 분위기였다. 미묘한 침묵은 남아 있었지만 탈락한 애들이 더 재롱을 부려 댔다.

어째 역할이 반대 같다며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봤다. 하차하는 즉시 숙소가 재배정될 예정이었는데 10분만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쉬기로 다짐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익숙한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시간 관계상 더 이상 인사하기도 힘들 느낌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떠나는 연습생들로 바깥이 소란스럽다.

정리된 짐을 보다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방을 이동한 찰나였다. 이제는 이 찜찜한 잔여물을 전부 털어 내야만 했다. 담담하게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나가니 3차 미션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바닥에 가까운 편이었다.

팀원을 꾸리는 과정은 무슨, 소품 담당이던 박지수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각오를 다져야 했다. 손을 들어 가볍게 제 뺨부터 토닥거렸다. 정신 차리자, 신해신.

"형, 뭐 하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멀지 않은 침대에 앉아 있던 이유준이었다. 40명 남은 인원으로 지금부터는 5인 1실을 배정받았다.

지정받은 곳의 문을 열자 아는 얼굴이 대거 나타났다. 11위였던 나부터 15위까지가 룸메이트인 것 같았다. 더는 엮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몽땅 입실해 있었다.

먼저 와 있던 이유준을 선두로 우정환까지 둘이나 있다. 우정환 쟤는 15위로 아슬아슬하게 같은 방이 된 모양이었다. 그나마 위안인 건 나머지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단 점이다.

"어? 유준이 형! 해신이 형도 같이 계시네요?"

"아, 정환아. 안녕. 같은 방이네?"

"안녕하세요."

"에이, 형. 이젠 반말할 때 되지 않았어요?"

"그래."

권혜성을 피하니 똑같이 시끄러운 애가 들어왔다. 사운드 보존의 법칙 같은 운명이라고 되새겼는데 문득 문채민의 피곤한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머리를 잘 쓰고 승부욕이 강하며, 실력적인 면에서 탄탄한 게 비슷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성향은 갈린 둘이기도 하다. 한쪽은 흐름을 세심하게 조절했고, 나머지 한쪽은 호쾌한 걸 밀어서 이끄는 타입이다.

이렇게 다른데도 상대를 했던 게 짐짓 대단하게 느껴진다. 잠깐의 휴식 시간마저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대충 옷을 갈아입으며 상황을 판단했다.

"다들 알고 지내시는 사이인가 봐요?"

"아, 안녕하세요. 신해신입니다. 22살이에요."

"안녕하세요, 김호원입니다. 21살이에요."

13위를 받았던 연습생이 가볍게 인사해온다. 최종 등급 평가에서 7위를 받은 예전 데뷔조의 인물이다. 기억하기로는 꽤 높은 시점에서 시작했는데, 본격적인 방송 이후부터 조금씩 하락했다.

말쑥한 인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량이 크게 안 따라 준 모양이었다. 운이 없는 사람이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럭저럭 수더분한 태도가 괜찮았는데……. 같은 방을 쓰기에는 좋은 사람 같다.

* * *

출연자들과 녹화 직전이 되어서야 세트장에 들어갔다. 돌아가는 카메라를 피해 열심히 눈을 굴린다. 절망적이게도 소품으로 추측되는 깃발은 이미 세팅되어 있는 장면이었다.

하긴, 타이밍상 모든 걸 준비해 놨을 일이었다. 한발 늦었음을 얌전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유일하게 아는 부분마저 활용 가치가 사라진 게,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가만히 제작진 무리를 지켜보다가 그 속에 섞여 있는 박지수를 발견했다. 과거 연출부원으로 보이는 스태프들과 함께 있는 광경이었다. 이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지 멀끔한 차림의 외관이다.

망했네. 결국 나도 다른 연습생들과 다를 바 없는 시작점이 주어졌다. 난감한 선택지가 섞여 있다는 건 분명해서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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