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안녕하세요. 충분한 휴식이 되셨나 모르겠네요."
여기서 가장 밝은 안색을 지닌 건 대표, 고우림이다. 의상을 갈아입고 멀끔하게 등장했는데 3차 미션의 초반부에 들어선 걸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까 괜히 숙연해진다. 그래도 예상보다 좋은 순위를 받아서 기분은 많이 나쁘진 않은 편이었다.
"다음 순위 발표식에서 생존하는 자리는 20위까지입니다."
파이널 전 단계인 만큼 압박감이 느껴지는 위치다. 현재 인원에서 깔끔하게 절반이 사라진다는 소식으로 들렸다.
토털 100명에서 진행된 프로그램인 게 20위라면 확실한 실력자들의 구성이었다. 끝이 날 듯 끝나지 않는 게 마치 경쟁 사회의 압축판처럼 보인다.
"이번 3차 미션 주제는 뉴 장르 프로듀싱입니다."
"…프로듀싱?"
"헉! 왔다!"
저건 여기서 만든 자체 제작곡을 말하는 거였다. 시즌 중 파이널을 제외하면 한 번쯤은 신곡을 가져와 줬다. 외부 작곡가와 콘택트 해 곡을 받는 과정으로 저작권과 함께 붙을 관심이 적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스트리밍 사이트에도 업로드될 수 있는 기회니 모두의 각오가 남다를 예정이다. 고난이도의 선택지를 피하고 싶어 박지수를 찾고 있었던 거였는데, 유추했던 시나리오였지만 초장부터 어그러졌다.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정말 빛 좋은 개살구가 따로 없다.
"프로듀싱이란 건 신곡 말하는 거죠?"
"이거 저번 시즌에서 봤어요! 와, 그럼 저희도 스트리밍 사이트에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 것 같은데."
앞날을 모르는 둘은 들뜬 표정이다. 침착한 척하고 있었지만, 대다수가 흥분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맞장구쳐 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데뷔를 하지 않는 이상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테니 말이다. 내 이름이 걸린 노래라, 신기한 마음이다.
"그럼 팀을 꾸리기 전, 곡부터 공개하겠습니다. 스크린 오픈!"
앉아 있는 상태에서 조명이 암전됐는데 시야는 확보되지만, 전에 비하면 어두운 수준이다.
단상에 서 있던 고우림이 사이드로 물러나며 거대한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웅성거리던 연습생들이 하나둘씩 집중했다. 팀원 구성도 중요하지만, 노래의 컨셉이 핵심 포인트다. 소화할 수 있는 선에서 흥행도가 따라올 곡을 받아야 했다. 물론 그게 뭐가 될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난제였다.
"오오……!"
"헉, 이 노래 만드신 분들이라고?"
영상이 송출되고 그 위로 히트송이 흘러나왔다. 해당 작곡가가 만든 걸로 유추되는 게 척 봐도 타이트하고 빠른 비트의 노래들이다.
대충 어떤 곡이 나올지는 예측이 되는 듯했다. 짤막한 오프닝을 끝으로 남녀 페어가 등장한다. 자신들에 대해 소개하는 게,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작곡가 'NEW REVEAL'의 텐과 제이미입니다. 저희가 선물해 드린 곡은…….]
그렇게 계속 반복되는 영상을 지켜봤다. 수가 제법 되는 게, 한 팀당 대인원으로 나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왔던 노래들은 모두 괜찮은 분위기의 댄스곡이었다. 무난함으로 따져 보자면 세 번째로 나온 디스코 비트가 좋아 보인다.
러브 송에 가사도 유행을 타지 않는 계열이라고 확신해서 후보군으로 담아 두고 있었다. 앞에서 어려운 선택지만 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이번만큼은 조금 쉽게 가고 싶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작곡가 '22century'의 이화와 백민주입니다. 저희가 이번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 팀께 선물해 드릴 노래는 퓨처 EDM 장르의 'Snare'입니다.]
다섯 번째로 등장한 팀은 연출부 선배들에게 들은 적 있는 작곡가 그룹이었다. 시즌 3에서 대히트한 메인곡의 제작자들이기도 하다.
시즌 2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알고 있었다. 차트 상위권에 진입하며 성공했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쫓고 쫓기는 타이트한 관계성을 말하는 가사로, 도입부에서 넘어가는 신디사이저와 힙한 베이스 사운드가 중독적이고 다이나믹한 곡입니다. 그럼 여러분의 멋진 무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흘러나오는 인트로가 컨셉추얼 한 게 심상치 않다. 가이드 녹음본에서도 난이도가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귀에는 잘 붙지만 어려울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레벨이면 리스너들이 없는 게 이상하지. 많은 연습생이 선호하던 딥하고 파워풀 한 비트로 느껴진다.
"헐, 나 이거!"
"너무 멋있다."
"대박……."
새로운 곡이 소개될 때마다 연습생들에게서 흥분 어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본인에게 어울릴 법한 무드가 나오면 바로 티가 나는 형식이었다. 이 곡을 탐내는 애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았다.
확실히 무대에 서서 부르면 멋있을 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넘겨 보자고 다짐했는데 되도록이면 경쟁이 강한 건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거 멋있다."
"유준이 형도 여기 지망이야?"
"음, 아직은 고민 중이야."
의외로 이유준도 여기를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저음의 목소리가 저 곡의 정취와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러곤 다음으로 나오는 영상을 지켜봤다. 지금까지 나온 곡의 수를 봐선 마지막이라고 예상되는 팀이었다. 그런데 왜 뜸을 들이지. 미묘하지만 간극이 느껴지는 시간 차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스태프 경력으로 쌓인 촉이 외친다. 이건 뭔가 준비되어 있다고 알려 주는 것이었다.
그때, 곧바로 화면이 전환됐다. 디스토션 효과가 들어간 멜로디컬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배경으로 깔린 뮤직비디오가 낯이 익은 게 등장인물 중 둘이 아는 사람이었다.
"어? 원겸 멘토님? 공태서 멘토님?"
"…와! 멘토님들이다."
"저거 인클루 선배님들 속도(Bring It On)이잖아."
여긴 멘토인 원겸과 공태서가 속한 그룹이다. 심지어 공중파 음악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 타이틀 중 하나로 추정됐다. 저 노래가 왜 나왔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그 뒤로도 해당 작곡가가 만든 곡들이 나오는데 이상하리만치 전부 인클루의 앨범이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머쓱하게 웃으며 전력으로 현실을 회피했다.
얼마 가지 않아 주변에선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다. 영상들이 사라지며 베일에 가려져 있던 작곡가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실체를 확인하자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희는 인클루의 프로듀싱을 담당하고 있는 멤버 서은휘, 김가온입니다.]
"헉… 은휘 선배님이랑 가온 선배님이야……."
"우와! 선배님들이 노래 만들어 주신다고?"
마지막 팀의 규모가 너무 커서 놀란 참이었다. 설마 멘토가 있는 그룹에서 곡을 넘겨줬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지.
원겸네 그룹에선 프로듀싱을 담당한 멤버들이 작사, 작곡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앞의 작곡가들도 유명했지만, 진짜 흥행 보증 수표는 여기였다.
일단 현역이다 보니 어그로성 홍보는 깔고 들어간다. 1군은 아니어도 2군에선 괜찮게 이름을 알린 그룹이었다. 팬덤이 꽤 탄탄하단 소리기도 했는데 여기서 이 사람들의 노래를 하라니, 리스크가 커도 너무 큰 구간이었다.
멘토들이 있는 이상 채점 기준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게 원그룹의 성향으로 봐선 난이도까지 있을 거라고 추정됐다.
원겸과 공태서는 안 그러는 척하면서 고난이도의 테크닉을 섞어 내는 인물들이었다. 지금까지의 타이틀만 들어 봐도 직접 하기엔 제법 아찔한 연출뿐이다.
위험성을 안고 인지도를 받을지, 그보단 무난하되 안전하게 갈지의 양자택일이었다. 참고로 난 무조건 후자다. 그러는 와중에도 해당 곡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저희가 여러분께 선물해 드릴 노래는, 댄스 팝 장르의 <달리기>입니다.]
[청춘의 빛남을 표현한 가사로, 초여름의 계절을 상쾌하고 시원하게 다룬 댄스곡입니다. 그럼 연습생 여러분의 멋진 해석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댄스 팝이라면 평소 인클루의 모토와는 반대되는 곡이었다. 화제성만큼은 두 배로 받고 갈 것 같네.
진짜 어그로에 어그로를 더해 버렸다. 들려오는 멜로디가 청량하고 중독성 있었는데 후크 송 구성으로 흥행이 보장된 라인이다. 계절과 잘 맞는 청량한 기운이 감돌고 거기에 트렌디 함까지 놓치지 않은 명곡처럼 느껴졌다.
"와, 나 이거!"
"무조건 하고 싶어……!"
그룹 내 메인 보컬이자 멘토인 원겸이 가이드까지 해 준 상황이었다. 특유의 고음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온다. 래퍼 공태서가 더블링까지 입혀 줬다. 방송에 나가는 임시 녹음본이 완벽한 퀄리티여서 난처하다.
이런 걸 시청자에게 들려 주다니 어지간히 잘하지 않는 이상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좋은 선택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박지수의 담당 깃발에 대한 사안이 기억났다. 틀림없이 이 노래가 해당 소품의 선택지였을 것이다. 녹화 직전에 찾아냈어야 하는 거였는데. 오늘도 뒤늦은 후회가 따라왔다.
"이거 곡이 좋은 만큼 어려울걸요."
"그렇지. 피치 차이가 엄청 커."
"거기에 템포도 빨라요. 텐션 조절이 중요하겠어요."
이유준과 권혜성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비트부터 난항인데, 시청자와 팬덤의 기대치가 높을 거란 명제였다.
얼핏 나온 공태서의 랩에 이유준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 스탯 좋은 애들도 막막하다고 여기고 있다. 다른 걸 떠나서라도 최대한 피해 보자고 결심하게 됐다.
스크린이 꺼지며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고우림이 중간으로 걸어 나와 마이크를 고쳐 잡는다.
"이렇게 모든 영상의 공개가 완료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해당 곡들을 셀프 프로듀싱 하여 무대를 꾸리셔야 합니다. 정해진 것은 단 한 가지, 작곡가분들께 선물받은 미션곡뿐입니다. 연출부터 컨셉과 안무, 모든 영역을 여러분의 손으로 완성해 주세요."
사방에서 탄식에 가까운 비명이 쏟아졌다.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몰랐으나 이 상황에서 연출까지 해야 했다.
물론 1, 2차의 연출도 우리의 손을 거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원곡자들에게 힌트를 받아 진행한 단계였다. 밑바탕이 있는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도화지와 도구만 쥐여 주고 끝까지 완성하라고 말한다. 제작진 너넨 작작 좀 해라.
"각자 마음속으로 지망하시는 노래를 정하셨겠죠?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모든 전제 조건은 랜덤입니다. 곡 선정부터 팀원까지 이번 미션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시간을 가져 보겠습니다."
멘트 하나하나가 경쟁심을 부추기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티는 안 냈지만 남현욱의 성격이 잘 드러난 대본이었다. 미션 룰 중 알고 있는 포인트는 컬러 깃발이 전부이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