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미션곡은 총 6곡으로, 7인조 4그룹과 6인조 2그룹으로 편성됩니다. 이것 역시 여러분에게 선택지는 없습니다."
"우선 전원 쪽지를 뽑습니다.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은 비밀로, 제가 확인해 달라고 하기 전까진 열어 보시면 안 됩니다. 그럼, 쪽지 박스 나와 주세요."
쪽지라니, 여기서는 깃발이 나올 타이밍이라고 짐작했었다. 의문이 듬과 동시에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가 카트 위에 실려 나타났다. 투명해서 속이 훤히 비치는데, 그 안으로는 작게 접힌 쪽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예측하지 못한 소품의 등장에 생각이 많아진다. 정말 운에 맡겨야 하는 시스템이라고 장담했다.
수군거리는 연습생들 사이로 고우림이 1위인 강태오부터 호명했다. 평소와 다르게 위부터 시작하는 과정이다.
"강태오 연습생, 뽑아 주세요."
무심한 낯의 강태오가 손을 뻗어 쪽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안내를 받아 반대편 벽으로 이동했다.
"아차, 제가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뽑은 쪽지는 연습생 여러분들끼리 자체 교환이 가능합니다. 대신 펼쳐 보시면 안 됩니다. 정체를 알기 전까지만 가능한 부분입니다."
"…교환이 가능해?"
"헐, 뭐야. 완전 아수라장이겠다."
깜빡한 게 아니잖아. 능청스러운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사전부터 제작진에게 지정받은 행동이다.
기껏 한 명씩 뽑게 한 뒤 교환하는 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저 종이로 정해지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팀 구성인지, 선곡인지, 둘 모두인지 전부 미지수이다.
이 상황에서 혼란을 가중할 여지를 던져 놨다고 장담했다. 정말 잔머리 굴리는 걸로는 톱급인 사람들이었다.
방송 각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을 줄 알아서 짜증나. 시청자 입장에선 흥미진진한 걸 떠나 궁금해질 사항이었다. 아이템 선정만큼은 인정해 줘야 하는 사단으로 당사자들만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렇게 앞 순위부터 박스에 손을 넣었다. 내 이름도 호명이 됐다.
"자, 하나 뽑아 주세요."
"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쪽지 한 장을 뽑아 들었다. 운 스탯을 올렸다지만 특출난 효과는 보지 못했던 매일이었다. 교환도 가능하다고 하니 간결한 동작으로 마무리했다.
속이 비치지 않는 종이를 보며 치밀함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선택을 완료한 무리에 합류하니 나보다 높은 순위를 받은 권혜성은 이곳에 먼저 와 있었다.
"형, 뭐 뽑으셨어요?"
"그냥 다 똑같이 생긴 종이 아니야?"
"아, 맞다."
"…교환하면 큰일 날까요? 어째 좀 무서운데, 이거 하나로 완전히 뒤바뀌는 거죠?
대화를 듣고 있던 문채민이 한마디 거들었다. 여기도 여간 복잡하단 표정이 아니다. 다들 제가 뽑은 내용물을 유추해 보는 현장이었는데 교환하는 게 유리할까, 아니면 버티는 게 좋을까. 계산하기 바쁜 눈빛들이 이어진다.
쪽지를 뽑는 과정에서 인원들이 늘어났다. 무리가 커지면서 소란스러워진다. 개중 몇은 큰마음을 먹은 듯했다. 친분이 있는 지인과 바꿔 드는 게 목격됐다.
이건 전부 방송국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장면이었다. 선택으로 인한 격차 발생 시 비교 자막이 들어갈 것이다. '찰나의 순간으로 뒤바뀐 운명!' 이런 식이겠지.
제작진 뜻대로 움직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들고 있는 이게 최악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신중해야 하는 순간이었지만, 알고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어서 난감했다. 룰을 너무 잘 꼬아 놔서 머리가 어지럽다.
"저기……."
"…네? 저요?"
고민하던 찰나,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린다. 나보다 한참 먼저 와 있던 연습생으로 그건 곧 상위 순위라는 소리다. 3위인 박승경이었나. 친분이 없는 상태라 영문을 몰랐다. 시선을 마주하니 조용히 질문해 온다.
"저랑 쪽지 교환해 보실래요?"
"…저랑요?"
"네."
어딘가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당황스러워서 말을 더듬으니 주변을 가리켜 보인다. 지인끼리만 하는 건 아니었는지 의견이 맞으면 교환하는 풍경이 나타났다.
고민에 빠져 박승경의 상태 창부터 확인했다. 운 스탯을 따지고 보니 나보단 한 단계 높은 수치다. 내 것에 대한 확신도 없는데, 왠지 괜찮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교환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다른 사람과 바꾸면 될 일이었다.
사실 저 사람이 3위인 연습생이란 게 이 선택을 부추겼다. 안 그래도 인기 멤버인데 카메라 앞에서 함부로 거절하기가 민망하다.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보이는 게 전부인 방송이었다.
어쩔 수 없지. 좋지 못한 여론은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허락해줬다.
"그래요."
"어? 진짜요? 감사합니다."
서로의 쪽지를 바꿔 들었다. 이게 얼마나 큰 후폭풍을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일단 현재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손에 들린 종이를 보며 골똘히 고민했는데 뭐가 됐든 전부 랜덤인 상황이다. 에라, 모르겠다.
"형, 교환했어요?"
"응, 일단 한 번만. 이거 횟수 제한은 없는 거지? 언제까지 허용해 주는 거야?"
"분위기를 봐선 마지막 연습생 순서까지가 아닐까요?"
"그럼 얼마 안 남았네. 빨리 결정해야겠다."
"그거 계속 갖고 있을 거예요?"
"글쎄. 바꿀까, 그대로 있을까."
어느덧 반대편에는 10명 남짓만이 남아 있었다. 서둘러 정해야 할 타이밍으로 운 스탯이 더 높은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볼까 망설였다.
그것도 이내 스탯이 정답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전부터 이곳에는 미친 운빨의 소유자가 존재했으니 말이다. 윤명… 쟤는 무려 A+의 스탯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2차에서 팀 선정으로 난항을 겪은 적이 있다.
그걸 보면 높은 단계라도 의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급하다는 이유 하나로 정신없이 움직이고 싶지 않다. 이게 더 큰 화를 불러들일 수도 있지. 반복된 학습으로 알게 된 점이었다. 나보다는 제작진이 한 수 위인 게 정답이다.
눈치 싸움이 오가는 현장을 지켜봤다. 현재 파트도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그냥 이 선택지를 끝까지 갖고 가 볼 심산이다. 결국은 이것도 다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있었다.
"마지막 쪽지는 자동으로 김환 연습생에게 주어집니다. 1분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교환은 이 이상 불가능하니 서둘러 주세요."
고우림의 멘트와 동시에 남은 연습생들이 분주해졌다.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 대다수는 나와 비슷한 결정을 내린 것 같다. 얌전히 서 있었던 중이었는데 이유준이 권혜성에게 질문한다.
"혜성아, 나랑 바꿀래?"
"어? 진짜요? 갑자기 왜요?"
"아니, 그냥. 불편하면 괜찮고. 강요하는 건 아니야."
"음, 사실 같은 팀 되는 게 제일 좋은데, 혹시 모르잖아요? 저희 둘 다 동일해서 제자리일 수도? 좋아요. 바꿔 봐요."
친분이 있는 애들로 확률을 따지자면 동일한 내용물을 들고 있는 건 힘들어 보였다. 이걸로 뭐든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해맑게 웃고 있는 권혜성을 바라보니 뭐든 상관없다는 긍정적인 태도였다.
"그만, 이제 교환 시간은 끝입니다. 더 이상은 안 돼요."
고우림의 외침에 모두가 굳어 있었다. 애매하게 타이밍을 놓친 연습생들이 있는 것 같았다. 울상을 짓는 게 교환을 목전에 두고 실패를 했나 보다.
안쓰럽기는 했지만 룰은 룰이다. 단호하게 넘어가야 할 부분으로 그보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게 남아 있었다. 한참 전부터 뒤쪽에 설치되어 있던 컬러 깃발이다.
"쪽지의 내용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종이 안에는 6가지 컬러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1위인 강태오 연습생부터 한 명씩 공개할 예정입니다만."
"여러분, 여기 있는 이 깃발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스크린 영상을 보기 전부터 줄곧 세팅되어 있던 소품이었다. 저게 이번 미션에서 중요한 선택지인데, 언제쯤 설명해 줄까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시한폭탄처럼 느껴지는 6개의 깃발이 안 그래도 심란한 기분을 지하까지 떨어트렸다. 아, 박지수… 진짜 먼저 찾았어야 했는데.
"이 깃발은 사전에 공개된 미션곡의 선택지입니다. 방금 뽑은 쪽지 안에 적혀 있는 컬러와 동일한 색상의 후보군 6가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연습생 여러분은 한 명씩 공개되는 색상에 맞춰 이 깃발 뒤로 서 주시면 되시겠습니다. 그걸로 3차 미션의 팀원과 미션곡이 모두 정해집니다. 더 이상의 정정 기회는 없습니다."
"…팀 구성이랑 미션곡이랑 둘 다야?"
"이거로?"
"와, 한 번 더 바꿀걸……!"
"으악, 단박에 정해졌네."
주변이 아우성으로 온통 난리였다. 둘 중 하나만 정해지는 건 줄 알았더니 한 번에 묶어 고르게 하는 수법이 나왔다. 제작진에게는 하도 많이 당해 충격이 덜할 지경이다.
결과물을 따라야 한다면 얌전히 수긍하는 게 나아 보인다. 이 작은 종이 쪼가리 하나가 내 운명을 좌지우지한다고……? 왠지 열받는 것 같은데.
"그럼, 우선 1위인 강태오 연습생부터 공개해 주세요."
"Purple입니다."
"첫 순서로 Purple이 나왔습니다. 강태오 연습생은 해당 컬러의 깃발 뒤로 위치해 주세요."
대충 돌아가는 루틴을 파악했다. 순차적으로 확인해 팀이 만들어지는 구성 같았다. 실시간으로 강자를 만날 수도 있었다. 미묘한 관계와 엮이게 되면 난감한 표정이 나올 듯하다. 리액션이 주된 포인트이니 여러 감정이 오갈 현장일 거라고 추측했다.
"…Blue입니다."
2위인 윤명은 강태오와 떨어진 팀으로 배정됐다. 저번과 달리 어벤져스라는 호칭은 붙지 않을 것 같았다. 경쟁하는 입장에서도 그게 좋은 편이다.
부담감을 떠나 실력자 모임인데 데뷔조 멤버들이 묶여 버리면 당황스러웠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도 아주 골치가 아플 것이다. 주목도의 시작 선부터 다른 싸움이다. 여러모로 좋은 그림이 이어지는 시간이었다.
"다음은 3위인 박승경 연습생, 공개해 주세요."
"Yellow입니다."
나와 쪽지를 맞교환한 박승경이었다. 말을 걸지 않았다면 저 팀에 가게 될 사람은 나였을 것이다. 현재까진 대략적인 구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게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노란 깃발 뒤로 이동한 사람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계속 주시해야 하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민석 연습생, 컬러를 말해 주세요."
"…Yellow입니다."
"헉……!"
"저기 어벤져스 되는 거야?"
"와, 초반부터 둘이 한 팀이네."
주저하는 기색의 이민석이 말을 했다. 그에 맞춰 사방에선 감탄과 탄식이 쏟아진다. 이건 3위와 4위가 같은 팀으로 묶인 그림이었다. 박승경의 뒤로 향하는 이민석이 보이는데 친분은 있는 것 같았지만 반갑지는 않았는지 어색하다. 서로 머쓱하게 바라보다 대화를 이어 나간다. 멀리서 보기에도 왜 여기 왔냐는 동작이었다.
"형, 쪽지 바꾼 것 아니었어요?"
"…어, 아마 저게 내 거였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