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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68화 (68/328)

68화

기쁜 티를 낼 수 없어 담담한 척 표정 관리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 박승경이 갖고 있던 저 쪽지는 내 것이었다. 교환을 요청해 오는 상대방에 의해 바꿔 든 일이었는데, 운 스탯을 올린 효과가 이렇게 찾아온 듯했다.

하락세를 탔다고는 했지만 데뷔조 순위인 이민석을 피했다. 왠지 이번 미션은 느낌이 좋은 것 같았다. 잘 풀릴 것 같다며 단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다음은 문채민 연습생 차례입니다."

"…전 Green입니다."

인근에 서 있던 문채민이 쪽지를 펼쳤다. 확인 후 곧바로 깃발을 향해 걸어 나가보니 강자들을 잘 피한 느낌이다.

초록색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온 게 의지는 했지만, 쟤도 결국 고위험군인 연습생이었다. 꾸준히 데뷔조 안에 들어가고 있는 저력을 보여 줬으니 피해야 할 인물 톱텐 안에 들어간다.

"7위, 이정원 연습생도 Green 팀으로 합류합니다."

쟤도 저기라니, 순위상 그리 멀지 않은 위치의 이정원이 포함됐다. 의연한 척 단상 위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 방향은 문채민이 먼저 서 있던 곳이었다. 저기도 상위라고 할 수 있는 연습생들이 묶여 버렸다.

게다가 미묘하게 비슷한 느낌이기까지 하다. 이성적이고 현명하되 직진하는 스타일의 이인방이었다. 어쩐지 조금은 기가 센 페어가 만들어진 것 같았다.

"권혜성 연습생도 공개해 주세요."

"저는 Purple입니다!"

"어?"

"뭐야! 저 조합!

"어벤져스가 왜 이렇게 많아?"

"와… 이거 뭐야. 어떻게 되는 거야."

권혜성이 외치다 말고 놀란 낯을 지었다. 바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에 서 있던 사람 때문이었다. 강태오라니, 정말 상상이 가지 않는 조합의 연습생들이었다.

한 명은 과묵한 걸로 추정된 게 나머지 다른 한 명이 지나치게 활발했다. 저기도 무척 다사다난할 것 같다고 예측했다.

권혜성은 놀랐는지 입을 벌린 채 눈만 깜빡거렸다. 마치 어색해서 죽겠다는 몸짓이다. 이게 바로 강 건너 불구경인가. 어찌 됐든 내 일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혜성아. 미안하다. 넌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제작진분들, 박스 덜 섞으신 건 아니죠? 마스터 여러분, 저희 조작 아닙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우연입니다."

조작 여론을 신경 썼는지 타이밍에 맞춰 고우림이 능청을 부렸다. 애드리브인가 싶어 주변을 살펴보니 제작진 쪽의 대처가 눈에 띈다. 작가들이 열일하고 있는 광경으로 세팅된 프롬프터 위로는 지시어가 줄지어 서 있었다. 얼마나 다급하게 타이핑했는지 평소 같았으면 보이지 않았을 오타도 섞여 있다.

[조작 아니ㅁ을 강조! 정말 우연이에요! 박스 5분 넘게 섞었어여ㅛ! ㅠㅠ]

배우는 배우인 걸까, 잠깐 사이에 저걸 캐치 해 냈다. 능동적으로 풀어 소화해 내는 게 대단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덜 섞은 게 아니냐는 위트 넘치는 전제를 깐다. 자연스럽게 이어 나가는 게 정말 프로다웠다. 진행을 하면서도 재밌다는 얼굴을 지으니, 순식간에 놀란 척 연기해 보인다.

과연 저 정도로 뻔뻔해야 남현욱 사단의 신임을 얻는 거였구나. 하나같이 너무 독해서 그 기에 바싹 마를 것 같았다.

"하하, 박스는 5분 넘게 섞으셨다고, 억울하다고 하셨습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다시 팀 선정을 재개해 보겠습니다."

"신해신 연습생, 쪽지를 확인해 주세요."

표정을 갈무리하며 손안에 있는 종이를 펼쳐 들었다. 관심이 쏠린 게 느껴져 서두르던 찰나였는데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사이에서 서서히 글씨의 형태가 드러났다.

기왕이면 누구도 받은 적 없는 팀으로 배정이 되고 싶었다. 제발 Red나 Orange. 아니면 데뷔권 순서가 한 명만 있는 팀으로 보내줘.

10위권 밖이었으니 나 이후로는 조금 부담이 적어졌다. 5분 같았던 5초가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모든 단어가 드러났다. 나는 보이는 내용에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신해신 연습생?"

"…저는 Purple입니다."

"…형!"

"Purple? 거긴 분명……."

이유준이 놀란 표정으로 내 어깨를 마구 뒤흔들었다. 팽팽 도는 시야 너머로 가야 하는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서 있던 권혜성이 팔을 번쩍 들어 올린다. 그 앞에 있는 인물도 여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군거리는 연습생 사이에서 고우림의 멘트가 귀에 꽂혀 들어 온다. 제발 그만해. 회피하고 싶었던 걸 잔인하게 확정 짓는 그림으로 다 들리니까 부디 조용히 했으면 좋겠다.

"신해신 연습생, Purple 팀으로 합류하며 강태오 연습생, 권혜성 연습생과 한 팀이 되었습니다."

"헉, 저기는 초반부터 3명이야?"

단상 위에 놓인 보라색 깃발을 체크했다. 아군으로도 마주치고 싶지 않던 리스트 1순위와 마주쳤다. 하필이면 쟤랑 같은 팀이냐.

체념한 심경으로 무심한 얼굴의 강태오와는 인사를 주고 받았다. 어쩐지 저 존재가 무겁게 느껴졌는데 쟤는 분명 2차에서 팀원으로 고생했던 이력이 있었다. 날 보는 눈빛이 공격적이지는 않았으나 초면이라 그다지 반갑다는 느낌도 없다.

나도 너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해. 목구멍까지 들어찬 속마음을 삼켰다. 그러기가 무섭게 권혜성이 어깨에 매달려 온다.

"형~ 저희 같은 팀이에요."

"그러게. 혜성아, 반가워."

사실 전혀 안 반가워. 2차에서나 한 팀이 되고 싶었던 권혜성이었다. 이제는 슬슬 떨어질 계획이었는데 정말 인생, 뜻대로 되는 게 전혀 없다.

적당히 대꾸해 주며 근처 팀들을 바라봤다. 윤명이 있는 Blue를 제외하면 전체에 둘 이상 묶여 들어갔다. 과연 운 스탯 A+는 남다르다 이건가. 이번에는 저 애의 스탯이 제 힘을 발휘한 것 같았다.

"바꾼 쪽지가 그거였어요?"

"…어."

권혜성이 소곤소곤 귀에 대고 질문해 왔다. 그러고 보니 이 선택지는 원래 박승경의 몫이었다. 저 사람이 Yellow를 뽑았을 땐 이민석을 피해서 안도했다. 그러곤 티 나지 않게 조용히 기뻐한 게 떠올랐다. 알고 보니 그게 더 극한의 조건을 떠맡게 된 실정이었다. 이래서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거구나.

박승경이 쉬운 걸 받아 갔다며 소리 없이 후회했다. 소신 있게 내 쪽지를 지키는 게 정답으로 벌써부터 방송에 나갈 자막이 유추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이민석이 낫지, 팬덤은 있었지만 강태오에 비하면 덜한 편이었다. 현재 시점에서는 순위도 중간까지 떨어졌다. 저쪽이 좀 더 마음 편하다.

제 발로 무덤을 파고 드러누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번에도 쉽게 가기는 힘들 것 같다며 체념한 무렵이었다.

"…와."

"우와……."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강태오와 묶인 걸로도 충분히 절망적이었는데 줄지어 들어온 연습생들이 보인다.

이 사이에서는 이유준이 호명됐다. 쟤도 상승세를 보이던 연습생 중 한 명이었다. 미개화 상태에서도 제 역량을 발휘했다. 그래서 장단은 맞춰 주되 무대에선 붙을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이유준 연습생도 Purple 팀으로 결정됩니다."

"……."

겉으로는 꿋꿋한 척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속이 조금 매스꺼운 듯했다. 게임의 공정성에 대해 이의를 제시하고 싶어 졌다. 혹시 너네 짰냐, 이유준과 권혜성은 쪽지를 바꿔 든 전적까지 있는 게 동일한 선택지로 주고 받은 모양이다.

"유준이 형, 진짜 저희 같은 쪽지 바꾼 거예요?"

"그러게, 이게 되네?"

"같은 팀, 셋이 같은 팀이에요!"

2차 미션이 끝나고 나선 떨어질 계획이던 애들이었다. 애매한 포지션이되, 화합을 깨지 않을 연습생들을 점찍어 놨었다.

누가 얘네랑 떨어트려 달랬지, 더 강한 인물까지 붙여 달라고 했나. 보는 눈만 없었다면 허공을 향해 외쳤을 말이었다.

"이번에는 저기지, 어벤져스?"

"…그런 것 같은데? 다 강한 사람들이네."

"와, 세다."

왠지 이 팀의 미래를 알 것 같아 절망적이었다. 들려오는 대화 소리는 전부 무시했다. 그러고는 로또 당첨금에 대해 안녕을 고해 봤다. 안녕, 당첨되고 수령한 날까진 행복했어…….

돌려받고 말겠다며 다짐한 지 한 달도 안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젠 내 야망을 전부 철회해야 할 듯했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3차 미션의 어벤져스는 바로 우리 팀이었다.

* * *

"안녕하세요, 이유준입니다."

팀에 합류한 이유준은 아주 밝은 얼굴이었다. 저 강태오와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데, 어지간히도 강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도리어 강태오가 낯을 가리는 느낌이다. 쟤도 말렸네. 생소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유준 얘, 저렇게 눈치 없는 성격이 아닐 텐데, 자세히 지켜보니 이건 그냥 밀고 들어가는 행동 같았다.

"…강태오입니다."

꿋꿋하게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연습생이었다. 강태오가 있는 이상 뭘 하든 센터는 힘들 예정이다. 어떻게 얻어 낸다 한들, 존재감에서 밀릴 모습이 예상됐다. 택도 없는 인간이 욕심만 부렸다며 욕을 먹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속 쓰려.

아이돌 서바이벌은 얼굴값이 절대적이었다. 그나마 매 단계 조금씩 스탯을 올려 놔서 다행이었다. 심각한 비교 짤로 돌아다닐 일은 미연에 방지한 듯하다. 스스로의 선견지명에 정말 감사하고 있었다.

"이렇게 팀 선정이 완료되었습니다. Red, Orange, Yellow, Green 팀은 7인, Blue, Purple 팀은 6인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근처에 서 있던 다른 팀원들과 말을 나눴다. 중반을 넘어가면서 같은 쪽지를 뽑은 인물들인데 한 명은 30위대의 김지혁이라고 소개했다.

권혜성과는 1차 때 같은 팀을 했던 연습생이기도 하다. 메인 보컬이 삑사리를 내며 말아먹은 무리에 속해 있던 게 떠올랐다.

당시 상대 팀에는 코어 팬덤이 강한 이민석까지 존재했었지. 힘든 싸움이란 조건을 넘겼어도 멘탈 면에서는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사고는 안 칠 것 같았지만 주시해야 하는 타입이다.

나머지 다른 한 명은 한여빈이라는 이름의 래퍼였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 싶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게시물에서 거론된 걸 본 적 있었다.

2차 미션에서 래퍼 포지션 경쟁이 치열하던 그룹의 일원이라고 했다. 언급 자체는 적었지만 응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 같은 게 다른 걸 제치고 봐도 말수 자체가 많지 않았다. 논란을 일으킬 유형은 아닌 걸로 보인다.

"이제 미션곡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각 팀은 대표분들을 선정하여 깃발을 갖고 앞으로 나와 주세요."

고우림의 말에 다시 한번 좌중이 시끄러워졌다. 지금의 감투를 분량으로 치는 사람이 많았는데 욕심을 보이는 연습생들이 나타났다. 인지도가 낮을수록 노출되고 싶어 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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