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이 대표가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위치일까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김지혁이 넌지시 질문을 던져 왔다. 그럼에도 눈은 계속 깃발을 힐끔거리는 중이었다. 쟤는 진짜 투명하네. 어지간히 원 샷을 받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팀 구성원이 이럴 때는 나서지 않는 게 도움이 됐는데 쟤만 모르고 있는 사실인 것 같아서 불쌍해졌다. 말려 줄까? 아니야, 알아서 하겠지.
"나가고 싶으신 분 있으세요? 전 괜찮습니다."
"저도 상관없어요!"
"아, 저도요."
내 말을 기점으로 권혜성과 이유준이 대처해 온다. 권혜성은 딱히 감투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고, 이유준은 진즉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았다.
줄줄이 소시지로 입을 열어 거절하니, 왼편에서 진득한 시선이 느껴진다. 눈을 굴리니 강태오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응시해 오는 눈길에 그만 고개를 틀어 피해 버렸다.
뺨이 조금 뜨거웠지만 묵묵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결국 포기한 강태오가 손을 들며 말해 온다. 어쩔 수 없이 대표를 자처한다는 뉘앙스이다.
"큰 의미는 없어 보이는데, 일단 제가 나가도 괜찮을까요."
"네."
"좋습니다."
"저도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좋아요."
만족스러운 대답에 고개를 들며 끄덕거렸다. 찜찜해하면서도 나서 주는 행색이다. 나야 다른 사람들보다 쟤가 낫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다시 한번 나를 기점으로 모두가 대답해 왔다.
한여빈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김지혁만 살짝 민망해하는 눈치였다. 그것도 잠시, 해당 인물이 강태오였기 때문인지 얌전히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상황은 파악할 줄 아는 것 같아 다행이다. 이번 팀에서도 다툼으로 고생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강태오가 피곤하단 낯으로 걸음을 옮겼다. 깃발을 뽑아 들기 전, 나를 보는 게 사실 저 눈빛의 의미가 뭔지는 전부 알고 있었다.
줄곧 강태오는 내가 나갔으면 한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진즉 눈치챘지만 전부 꿋꿋하게 버텼던 찰나였다.
자기도 하기 싫은 걸 내게 떠넘기려 들다니, 훗날 진행될 사항들만 떠올려 봐도 절대로 봐줄 수 없는 편의였다. 막다른 골목이었기에 양보하기가 힘들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리더는 남 시킬 예정이다. 아마도 저기 쟤가 하겠지.
* * *
고우림 옆으로 각 팀의 대표들이 정렬했다. 손에는 예의 그 컬러 깃발이 들려 있었다. 훑어보니 과연 높은 순위가 대다수로 확인됐다. 역시, 나서지 않는 게 정답이다.
"본격적으로 미션곡을 공개해 보겠습니다. 작곡가분들께 선물받은 노래 리스트 띄워 주세요."
영상이 흘러나왔던 스크린 위로 6개 명단이 추가로 공개됐다. 작곡가 크루와 노래 제목이 같이 적힌 선택지였는데 이유준이 심각한 얼굴로 입가를 매만졌다.
"장르가 다양하네."
"그러게요. 선곡된 걸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상황 판단이 빠른 만큼 분석을 하는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가 원하는 곡을 뽑고 싶어 간절하게 기도해 온다.
이번 단계가 중요한 메인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유명 작곡가일수록 팬들의 관심도는 자동으로 붙어 오니까 개인 인지도와 상관없이 우위를 차지하는 포인트가 됐다. 전체적으로 퀄리티가 상당해서 부담이 든다.
그중 단연 톱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게 인클루, 멘토가 들어가 있는 그룹의 현역 아이돌들이다. 이름이야 알리겠지만 리스크가 굉장히 높은 편으로 보였다.
소화할 자신이 없으면 고르지 않는 게 현명하다. 가이드 녹음부터 프로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잘 만들어진 구성이어서 더욱 긴장됐다.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면 질타를 듣게 될 확률이 높지.
"혹시 지망하는 노래 있으세요?"
"응, 있긴 한데 다 좋은 곡이라서."
"그렇죠. 후보군이 전부 훌륭해서 고민되네요."
팀원들과 의견을 나누며 강태오를 바라봤다. 마치 귀찮은 걸 떠맡게 된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미안해. 근데 나도 사정이 있어서.
"제작진의 선정하에 작곡가 크루와 컬러 깃발이 매칭되어 있었습니다. 노래 박스 뒤가 깃발과 동일한 색상으로 변할 예정이니, 두 눈 크게 뜨시고 확인해 주세요. 3차 뉴 장르 프로듀싱 팀 매칭 미션곡을 오픈합니다. 스크린 공개!"
신호를 끝으로 화면이 전환되어 파트 뒤에 사각형의 컬러가 떠올랐다. 저게 이번 미션의 최종 결과물인 듯했는데 여기저기서 환호와 비명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 팀을 체크하니, 가장 오른편에 위치했던 보라색 박스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내 위에 적힌 미션곡을 보고 그대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와, 저희 저 노래 해요?"
"나 저거 하고 싶었는데!"
김지혁과 한여빈은 지망하던 곡이었는지 무척이나 기쁜 낯을 하고 있었다.
[INCLUE – 달리기]
망했다. 운 스탯은 얼마나 올려야 효과를 볼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그냥 체념한 시점이었다.
의외로 권혜성도 기뻐하는 행색을 보이니 비트가 본인 취향이었다며 유쾌하게 반응했다. 따져 보면 가사부터 긍정적이고 소년스러운 게 쟤와 아주 잘 어울리는 듯하다.
그러다 우연히 강태오를 목격했는데 다행히도 동지는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팀원들과 달리 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무래도 나랑 비슷한 고민 중인 것 같다.
"그럼, 멋진 무대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클로징 멘트를 딴 고우림이 인사했다. 40명의 팀 선택을 발표하느라 긴 시간을 소요한 녹화였다. 휴식을 위해 슬레이트가 쳐치며 각 대표들은 객석에 있던 팀으로 합류한다.
"고생 많았어요."
"네, 감사합니다."
강태오는 내게 미묘한 눈길을 보내는 중으로 내가 못 알아들은 척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런 사소한 걸로 시비를 걸 타입은 아니면서, 하긴 2차 미션에서 팀워크에 크게 덴 전적이 있었다. 일단은 좀 더 두고 보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 * *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는데 미션곡을 선정받은 이후 줄곧 대강당을 떠나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서 촬영을 할 예정으로 미묘한 경쟁 구도를 캐치 하기 위한 것이라고 파악했다.
연습실로 들어가 버리면 팀 사이가 차단돼니 견제와 눈치 싸움은 물 건너가 버렸다. 원하는 곡이 있었던 만큼 은근한 시선이 존재할 거라고 확신했다.
다시 한 번 초반 이미지를 끌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무렵이다. 힘들게 다루는 소재가 뭔지 알고 있으니 그 반대를 해 주기로 결심했다.
둥글게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하니 정신없던 아까보다는 훨씬 정돈된 분위기였다.
이번에도 내가 최연장자다. 나이는 어쩔 수 없었는 지 이민석 같은 경력직 멤버가 아닌 이상 벗어날 수 없는 포지션이었다.
알고 있는 애들을 차치하고 김지혁은 20살, 한여빈은 21살이라고 말했다. 권혜성을 제외한 전원이 성인이라고 확신한 게 강태오, 저 사람은 절대 십 대가 아닐 것이다.
"강태오입니다. 나이는 스물입니다."
역시. 그래도 생각보단 어리다. 담담하게 말해 오는 강태오를 이유준과 김지혁이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셋이 동갑이라니 특이한 조합에 턱을 괴고 감상했다.
보이는 태도나 인상으로 봐선 나와 비슷할 거라고 유추하는 중이었다. 전부터 계속 느낀 점으로 단계마다 연령 이상 성숙한 성향들이 끼어 있었다. 이번에는 쟤인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게 없는 것보다는 좋은 스타일이다.
"그럼 저희 뭐부터 정할까요?"
"음, 센터는 어때요?"
그리고 그에 반하는 인물도 1+1처럼 딸려 오는 듯했다. 나쁜 것보다는 조금 눈치가 없는 타입인데 김지혁이 해당 대상자인 것 같았다. 싸우는 사람들에 비하면 양반인 케이스라며 그걸 위안 삼아 버티기로 했다.
주체가 안 돼서 그렇지, 악인에 가까운 인물은 거의 없었다. 신났다는 뉘앙스로 다시 폭탄을 투척하는 게 음… 조금 난감한 상황이다.
1차 미션 때는 탐색전에 가까워서 누가 가져가냐는 문제로 미루던 파트였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서로의 능력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고만고만했다면 주저 없이 참여했을 대화인데 도리어 속성으로 해치우는 게 속이 시원할 수도 있었다.
이게 문제가 된 건 팀의 밸런스 때문이다. 우리 팀에는 두 번이나 톱을 먹은 괴물이 들어와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강태오다.
"흠……."
"센터라……."
갑작스러운 발언에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봤다. 이런 일이 빈번했는지 덤덤한 자세를 고수하는 강태오였다.
김지혁은 제가 원하던 흐름이 아니었는지 바로 꼬리를 말아 접고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섰다. 일단 분별력은 있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하, 하하… 이건 나중에 정하는 게 낫겠죠? 노래 먼저 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찍어 먹어 봐야 아는 게 흠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거친 성향은 아니어서 다행으로 흘리듯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메인에 욕심이 있는 것 같지? 하는 걸 봐선 조금은 힘들지 않을까 짐작했다. 물론 속을 썩일 예감도 안 들었다. 계략이나 잔머리를 쓰기에는 허술한 구석이 있는 성격이다.
이 정도면 강태오나 이유준이 컨트롤을 하려 들 것 같았다. 최악은 아닌 게 겁먹은 것에 비해 나쁘진 않은 구성이다.
"그래요. 일단 가이드 녹음본부터 들어요. 가사 보고 확인합시다."
"좋아요!"
전달받은 탭 주변으로 모두가 가까이 붙어 앉았다. 인트로를 파악하자마자 힘이 쭉 빠져 버린다. 잘 만든 노래였지만 그 난이도가 상당했기 때문인데 지금까지 한 곡들과는 결도 많이 달랐다.
2차보다도 스포티 한 게 훨씬 발랄한 곡이다. 리드미컬한 걸 전제로 깔고 밀고 당기는 변주가 능동적이었다.
"이거, 멘토님이 엄청 쉽게 부르셔서 그런 거지……."
"곡 자체는 어렵네요."
"전체적으로 음역대가 높아요."
"그런데 저음 구간이 있어서 피치 차이도 큰 것 같죠?"
이유준과 한여빈이 작게 탄식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영상 때부터 넌지시 피력한 의견이었다. 박자에 맞춰 음을 내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파트 분배를 잘해야겠는데요."
"곡 무드가 있어서 댄스도 타이트하게 들어갈 것 같아요."
멜로디에 집중해 보니 원겸의 목소리가 정확한 음정을 짚어 낸다. 하도 짓궂어서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는데… 이제는 성격 말고 실력으로 괴롭히는 멘토가 되어 있었다. 꽤 높은 파트였음에도 불구하고 힘 하나 안 들인 채 노래를 부른다.
그땐 밝은 노래는 못 하겠다고 했으면서, 순 거짓말쟁이다. 전부 엄살이었던 모양이네.
"멘토님들 발성이랑 호흡이 너무 좋다. 이거 재해석할 수 있을까."
보컬을 좀 더 올려야 했을까 고민이 들었다. 싸비나 하이라이트 정도는 조금 챙겨야 할텐데 좋은 포지션을 지망하는 소시민이 된 것 같았다. 어벤져스 팀이었기 때문에 무리 속에서 경쟁으로 살아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