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8시가 가까워지며 상가에 활기가 도는 듯했다. 주말 출근이나 약속을 위해 움직이는 무리가 많이 보인다. 거구의 청년 셋이 중무장을 하고 돌아다니니 이건 원,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개찰구 옆 기둥에 비친 모습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수상한 차림이다.
"7번 출구 저기 있네요."
"사람들이 좀 있는데… 괜찮겠죠?"
"같이 있는 건 튀겠다. 너네 둘은 떨어져 있을래? 내가 사진 찍고 싶을 때 부를게."
"네. 혜성아, 저기 가 있자."
유동 인구가 많은 신촌역 출구, 대낮만큼은 아니어도 인파가 제법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둘에게는 따로 있으라고 제안하니 오버인가 싶다가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일단 주변에 폐를 끼쳐선 안 될 일이다.
윤곽만 보이던 광고판이 나타났는데 이게 이렇게 컸었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생소한 감정이었다. 꽃가루를 배경 삼아 웃고 있는 사진으로 복장을 보니 2차 미션의 무대 같았다.
우리의 태양, 햇살 같은 너를 응원해
"신해신"
마스터님! 소중한 한 표 잘 부탁드립니다!
얼굴과 문구를 피해 메모지가 붙은 게 보인다. 알록달록한 게 귀여워서 왠지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세히 읽어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작은 글씨에서 이걸 쓰고 붙였을 정성이 느껴졌다.
[마스터님들! 해신이 많이 사랑해주세요!]
[해신아 나 너 보러 여기까지 왔어 ㅠㅠ 꼭 데뷔하자!]
[떼어가지 말아주세요! ㅠ 정말 열심히 하는 친구입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신해신 파이팅!]
[천재 아이돌!!]
[아프지 말고 언제나 행복하기]
[데 뷔 하 자 신 해 신]
[해신아! 너와 함께면 나는 항상 행복해!]
[♡♡♡♡♡신해신 사랑해♡♡♡♡♡]
천천히 훑어보다 펜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하나씩 답장을 적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해 주고 싶었던 게 왠지 이거라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았다.
말주변이 모자라 서툰 내용에 머쓱함이 들어 머리만 긁적거렸다. 어느 정도 완료되자 주머니에 챙겨 왔던 감사 인사도 붙여 뒀다.
대충 끝나 가는 게 보였던 모양이다. 저 멀리 서 있던 둘이 다가오니 은근히 나를 놀리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
"…통행에 방해되니까 얼른 사진 찍자."
"더 보고 가도 괜찮은데~~"
"제가 예쁘게 잘 찍어 드릴게요. 광고판도 별도로 찍어 드릴까요?"
"사족 붙이지 마. 그리고 너네도 다 똑같았거든."
역시 괜히 같이 온 것 같지. 다음부터는 무조건 비밀리에 할 생각으로 슬슬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무렵이었다. 벌써 9시에 가까워져 있었는데, 전광판을 지켜보다 둘에게 말했다. 주변의 인파가 늘어난 게 느껴진 수준이었다. 마무리를 지어야 할 타이밍이다.
"이제 가자."
"네~"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은 시점에 멀지 않은 곳에서 쭈뼛거리는 걸음이 다가왔다.
"…저기, 혹시……?"
"예?"
"헉, 맞다!"
또래 학생으로 보이는 여성이다.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있는 게, 문득 도보로 가까운 곳에 대학교가 있었음을 기억했다. 주말에도 공부를 하러 온 듯한 복장이네. 낮은 시야에 턱을 숙여 내려다보니 놀랐다는 듯 몸이 튀어 오른다.
"신해신 연습생 맞죠? 안녕하세요! 혹시 괜찮으시면 사진 한 장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아, 감사합니다. 물론이죠. 아침이라 단정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진짜 잘생겼어요! 저 핸드폰이… 잠시만요!"
"천천히 하세요."
흥분한 얼굴로 소리 높여 외쳤다. 태도를 보아하니 이게 끝나길 기다린 모양이었다. 허겁지겁 제 가방을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자 떨어져 있던 이유준이 말을 건다.
"제가 찍어 드릴까요?"
"…네? 헉… 이유준이다."
한껏 눈이 커진 얼굴에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건네줬다. 옆에 선 게 어쩔 줄 모르는 기색으로 자세를 낮춘 이유준이 신호를 보냈다.
"그럼 찍을게요."
셔터음을 들으며 동시에 브이 자를 그렸다. 그러고는 조용히 입을 열어 고맙다고 말했다. 그걸 들은 팬은 놀랐다는 표정으로 여길 돌아본다. 괜히 민망해서 아무 말 하지 않은 척 사진에 집중하고 입을 다물었다.
"가, 감사합니다……!"
"해신이 형, 인기 짱이네요."
"…권혜성?"
"엇, 안녕하세요!"
"대박……."
여태 침묵을 유지하던 권혜성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잠이 깬 얼굴로 정말 친숙하다 못해 긍정적인 성향이었다. 그 와중에 이 사람은 어지간히도 놀란 것 같았다. 경악하는 표정에서 감정이 훤히 드러난다.
"…혹시 괜찮으시면 두 분이랑도 사진 찍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이번엔 제가 찍어 드릴게요. 핸드폰 주시겠어요?"
권혜성과 이유준 사이에 자리한 구도로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행인들에게 시선을 받고 있었다. 슬슬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여기에서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감사합니다. 세 분 모두 응원할게요! 꼭 데뷔하세요! 파이팅!"
"감사드립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달뜬 안색으로 저 멀리 사라진 인물이다. 우리를 끝까지 돌아보는 모습이었는데, 어느덧 역내에는 젊은 층의 사람이 많아져 있었다. 걸음을 멈춰 서는 게 미묘한 공기가 체감이 됐다.
주말 도심에서 물의를 일으키면 안 될 일이지. 이유준과 권혜성을 향해 채근하는 눈빛을 보냈다. 얘들아, 돌아가자.
"이제 가야겠다."
"그래도 형 덕분에 잘 다녀가네요."
"맞아요. 재밌었어요!"
"넌 하루 종일 졸았잖아. 네 광고판 때만 쌩쌩하고."
"에이~ 그래도 나중엔 깼잖아요. 저희 유준이 형네 집 가서 맛있는 것 시켜 먹어요!"
"난 이제 집에 가면 안 돼?"
출구로 빠져나가며 담소를 나누는 게 바로 귀가하긴 힘들 것 같았지만 무사히 완료한 목적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뒤에 있던 광고판을 힐끔거렸다. 사진 속 무척이나 낯선 얼굴의 내가 신기했다.
* * *
10화의 방영을 앞둔 상태에서 능력치를 점검하기로 결정한 날이었다. 파이널에 인접한 만큼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여기서 떨어지면 연습생 신해신이 아닌 평범한 22살의 청년으로 내려와야 했다.
뭐가 됐든 다시 한번 살아가야 할 인생이다. 하지만 기왕 도전한 것, 미련 없이 최선을 다해 보기로 결정했다.
[신해신]
나이: 22
외모: A
보컬: A-
댄스: B+
운: B-
끼: B
정보: 플레이어
이벤트: '당신의 아이돌, 그 시작' 진행 중
[보유 스킬]
'한번 보면 잊지 못해(F)' – On
'부릉부릉 운전기사(E)' - On
'저세상 귀염둥이(D)' – On
'가위바위보의 신(B)' - Off
[현재 코인]
2,365 코인
반복되는 연습과 보상으로 모은 코인이었다. 뭘 해야 할까 고민하다 스탯을 해금하기로 했다. 예의 아이템을 쓴 적 있는 부분이었는데 다시 돌아와서 난감했던 끼 스탯이었다.
['스타 코인 스탯 해금' 끼에 1,000 코인을 지불합니다.]
[현재 코인]
1,365 코인
[끼 스탯 해금 방법]
스탯 난이도 이상의 보컬 + 댄스를 30회 이상 반복하세요.
[변화 가능 스탯]
끼: B → B+
그리 어렵지는 않은 미션으로, 다른 스탯에 비해 낮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완전한 A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소화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근한 행운에 만족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연습실에 재방문해야 할 것 같다.
시간을 확인하며 스케줄을 계산해보니 조금 빠듯했지만 서두르면 가능할 듯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담담한 심경이었는데 기왕이면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
* * *
오늘도 오게 된 친구의 자취방으로 포장해 온 음식을 내밀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늘도 맛있는 것 사 왔네~ 이체해 줄게."
"됐어."
"웬일? 아싸, 공짜 치킨."
"많이 먹어."
나는 몰래 2차 무대 방청을 다녀온 전적이 있었다. 아직은 전부 비밀인 사실이었지만 그만 모두 인정하기로 했다. 신해신에게 입덕했다. 탈케이팝 했다고 호언장담한 과거가 떠오르는 게 계정까지 날리며 일반인의 삶을 살았던 나였다. 덕분에 이제 와서 말하기도 눈치 보인다. 타이밍을 놓쳐 친구에게 잘해 주는 중이었지만 쿡쿡 찔리는 양심은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다, 친구야…….
"너 요즘 되게 유하다? 내가 유어돌 얘기해도 받아 주고."
"뭐… 방송 자체는 재밌더라. 그나저나 3차 방청도 떨어졌다며."
"어, 모처럼 주말 출근 안 하는 날이었는데."
"저런."
"케이팝의 신이 날 버렸나?"
"그건 좀 슬프지 않냐."
추첨에서 떨어진 3차를 떠올렸다. 친구를 비롯해 나 역시도 가지 못한 구간이었다. 후기를 읽어 보는 상황에 대꾸해주니 거절하지 않고 받아 주자 이상하단 눈길이 쏟아진다. 모르는 척 시선을 피하며 핑계를 댔다. 그럼에도 어째 침묵만이 스친다.
"야."
"…어, 왜."
"화 안 낼게. 사실대로 말해."
"…어?"
친구가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내 왔다. 한 모금 마시기가 무섭게 입을 열어 온다. 순간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니 친구는 미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너 입덕했지. 누구야, 신해신?"
"……"
"네 성격에 속이려고 한 건 아닐 테고, 뭐 또 어쩌다 보니 말 못 한 거겠지. 이실직고해라, 친구야. 나도 편하게 수다 좀 떨어 보자."
"…미안. 맞아, 나 덕질 다시 해."
"참 나,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유어돌이 대단하긴 하네~ 탈케한 애를 다시 끌어들이고."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는데 맥주는 벌컥벌컥 들이켠 이후였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같이 방송 보면서 눈치 깠지. 너랑 내가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그때라면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을 때였다. 회사원들은 원래 이렇게 눈치가 빠른가. 새삼 질린 얼굴로 친구를 바라보니 어딘가 능글맞은 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팔을 뻗어 뒤로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밝히니 속이 다 시원하다.
"아, 미안해서 죽는 줄 알았네."
"미안할 게 뭐가 있냐니까."
"…야."
"왜."
"…이것도 숨기기 뭐해서 말한다? 나 2차 방청 다녀옴."
"그래 그래~ 뭐……? 미친! 이 배신자!"
"미안해할 필요 없다며."
"그거랑 이거랑 다르지! 3차도 갔냐……?"
"3차는 나도 못 갔어."
TV와 노트북을 세팅해 앉은 순간이었다. 여기를 바라본 친구가 잔소리한다. 피식 웃으며 모든 걸 관전한 게, 밝히자마자 자연스레 행동한 게 이거였다. 지금 저건 본방송을 보자는 소리였다. 척 하면 착이라고, 오래 안 사이라 가능한 일이다.
투덜거리는 친구에게는 웃으면서 사과했다. 요점은 파이널에 같이 가자는 얘기로 그동안의 갑갑함이 무너져 내린 모양이었다. 덕질 메이트가 어지간히 필요했나 본대. 하소연을 들어 주며 본방송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