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얼마 안 가 나오는 시그널에 집중할 수 있었다. 초반은 저번 스토리의 연장선이었다. 이건 이미 본 적 있는 장면이기도 했는데 신해신은 박승경과 바뀐 쪽지로 낚여 버렸다. 어이를 상실해 한참을 실소한 일화가 떠오른다. SNS에선 불운이 재밌는 캐릭터라고 이야기했지. 이걸 좋아해야 하나 고민이 들 지경이다.
[팀 Purple의 운명은?]
"야, 너 신해신 좋아한댔지. 근데 쟤 왜 이렇게 운이 없냐?"
"그걸 나한테 물어 봤자… 그리고 최애인 사람한테 말할 건 아닌 것 같은데."
"네 죄를 알라."
"…봐준다더니. 뒤끝왕."
"그래도 캐릭터가 있어서 견제는 안 당할 것 같은데."
"그렇지. 좀 어설픈 경향이 있어서."
"안 그러는 척 멘탈 약한 게 제일 골 때려. 근데 또 사회생활은 잘해요. 우리 회사 옆 팀에 맨날 죽겠다고 골골거리는 대리 하나 있거든? 웃긴 게 그 사람 벌써 5년 차임. 동기들 다 퇴사했는데 혼자 버텼대. 신해신 약간 그 대리 같아. 말로는 못 한다고 하면서 몸으로는 해내는?"
"그게 뭐야."
"그런 애들이 끝까지 간다니까? 우리도 내기했잖아. 그 대리, 최소 과장 달 때까진 여기 다닐걸?"
"얘도 그랬으면 좋겠네."
"그 소리는 데뷔했으면 좋겠다는 뜻이지?"
"기왕이면."
[인터뷰]
: 아, 엄청 열심히 해야겠구나……. 선배님들께도, 팀원분들께도 폐를 끼쳐선 안 되겠다 싶었죠.
: 너무 좋았습니다! 좋은 곡 주셔서 감사드려요!
: 멘토님! 인클루 선배님들 사랑해요!
: 클러스터인 사람으로 너무 영광이었습니다. 정말 아직도 안 믿겨요.
: 가이드 녹음까지 해 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핵심 멤버로 손꼽히는 강태오가 등장했다. 지난 미션에선 악편을 당했던 게, 두 번 연속 1위를 괴롭히긴 힘들었나 보다. 이슈들은 강조했지만 짜깁기는 없어 보인다. 도리어 너무 괜찮은 상황이다.
: 그래도 파트 분배는 불러 보고 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우선 차례대로 한 번씩 불러 볼까요?
: 이제 저만 하면 되는 거죠?
- 오늘을 소중히 Nice day
지치지 말고
Run to the sky
Drop beat 좀 더 빨리 달리기
넘어져도 괜찮아
No problem
일어나면 되니까 yeah yeah
: 형, 이런 게 잘 어울리네요?
: 전 또렷한 음색이 활기찬 기운이 나서 좋았어요~ 전부터 느꼈는데, 곡 습득이 빠른 스타일 같아요.
: 이번에는 신해신 연습생이죠?
: 저 여기서 한 표요.
: 아, 제 0.5표 여기 넣어 주세요.
: …마지막으로 제 0.5표도 여기 넣겠습니다.
이 팀에서 의견을 주도하는 건 주로 강태오 같았다. 자연스럽게 리더가 됐는지 맡은 역할에 충실하다. 투표를 통한 과정이었지만, 은근한 지지가 오가는 현장 같았다.
처음에 신해신은 김지혁과 비슷한 표를 받은 듯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인지도의 1위 연습생이 지원군으로 붙었다. 무슨 일인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당황한 건 나만이 아닌 듯한데, 화면 속의 신해신도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야, 가만 생각해 보면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 싸비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보컬이라고 확신한다.
"뭐야. 신해신, 강태오랑 친분이 있었나?"
"…아니?"
"은근히 서로 도와주는 것 같은데……. 하긴, 방금 잘 부르긴 했다. 내가 들어도 괜찮더라."
"일단 쟤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애거든……."
"어쭈. 이젠 대놓고 옹호하겠다, 이거지?"
원래 양보를 잘하는 사람들인가 싶어 지켜봤다.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팀인 게 눈에 띈다. 주력 구절이 정해짐과 동시에 파트 분배가 시작됐는데 포지션이 나뉘어서 큰 탈은 없어 보였다. 정확하게 2명씩 갈린 선택지로 팀 선정에서 보인 난처함과는 반대됐다.
"이 팀은 전체적으로 얌전하네~ 3차는 3차다, 이건가?"
"그래도 견제 심한 곳은 다툼 나오잖아."
"하긴, 아까 걔네는 분위기가 별로였지."
: 그럼, 센터는 강태오 연습생으로 확정 짓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얘네 왜 이렇게 잔잔하냐?"
손에 들린 캔 안에서 맥주가 찰랑거렸다. 편집 방향을 걱정했던 게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술을 마실 틈도 없이 당혹스러운 장면이 이어졌다. 제작진의 심경에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가만 보니까 강태오 때문인 듯."
"그래?"
"어, 쟤 2차에서 은근히 돌려 깠잖아. 그때 SNS 반응 되게 안 좋았던 게 기억났어."
"중복으로 하긴 애매한 건 알고 있지. 근데 그런 이유로 완전히 빼 줘?"
"야, 요즘 제작진도 모니터링을 얼마나 하는데……. 그리고 건들면 각 나올 팀이 수두룩하잖아. 쟤네를 왜 써. 원래 저런 애들은 환기를 위해서라도 안 건드려."
"좋아해야 하는 건가."
친구의 말과 동시에 다른 팀으로 시점이 전환됐다. 진짜 악편에선 제외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와, 억울하다. 진짜 이건 현장 갔어야 했다."
윤명이 새롭게 보이던 무대였다. 지금까지 하던 스타일과 반대되는 곡으로 완벽한 소화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잘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친구는 조용히 한탄을 하고 있었으니 얘는 데뷔하지 못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떠올려 보면 멈추지 않는 상승세의 인물이다. 그 강태오의 뒤를 바짝 쫓아 올라갔다.
"연출 잘했다. 얘가 이런 걸 잘 불렀네."
"우리 명이 올라운더라니까."
"이번에도 우정환 붙어서 분량 많이 나왔지?"
"응. 걔도 좀 유쾌 밈이어서 써 준 모양인데… 평소에 말수가 적어서 고민이야. 어휴, 자극에 미친 인간들이 메인 사단이어서."
각자 응원하는 연습생이 좋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앞에서 겪은 문제들이 떠올랐던 게 여긴 캐릭터성과 일반인이라는 점으로 고생을 했고, 저긴 실력파 인기 멤버라 견제가 심한 편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안심이다. 명이는 베네핏 못 받으면 사기야."
"난 아직 신해신네 못 봤는데, 혼자만 너무 편한 것 아니냐."
"걱정할 게 뭐가 있어. 너네 팀 구성 난리인데. 솔직히 못하는 게 이상하지."
"그런 편견이 괴로운 거야."
"아~ 어벤져스?"
"조용히 해."
"알았어, 알았어~ 얼른 보기나 해. 마침 딱 나왔네."
친구의 타박에 TV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그대로 빠져들듯 집중했다.
신해신은 앞머리를 완전히 넘긴 스타일링을 하고 있었다. 펄럭거리는 의상에 내 마음도 요동쳤다. 4분 남짓한 공연임에도 아주 즐거웠다.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가는 성장세가 도드라진다.
쟤는 노력하는 것 이상의 재능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 최애여서가 아니라, 정말 사람의 눈길을 끌 줄 아는 타입이다. 세트장이 암전되며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는데 친구도 옆에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야… 얘 운 나쁘다고 한 것 취소할게. 기회 진짜 잘 잡네. 음원이 미친 듯."
"신해신 잘했지."
"놀리냐? 얘네가 1등 하겠는데."
"이거 플리에 넣어야지."
"쳇, 나도 넣기는 할 건데… 너, 스밍 명이네 것도 같이 해야 해?"
"알았어, 알았어."
* * *
순위 발표식과 파이널을 위해 입소한 시점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오다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탈락하지 않은 것으로도 기적이라고 보고 있었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훑어봤다. 평소 같았으면 숙소 내지 세트장에 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대기실인 상황이었다.
제작진에 의해 다른 이벤트로 시작되는 단계라고 전달받았다. 바로 팬과의 공개 대면이다. 이 구간은 메인 복장인 교복을 입고 작은 포토 존을 실행했다. 다른 시즌들보다 늦게 하는 포맷이기도 한 게 보통 이런 건 1차 입소에서 실행했다. 이번에는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보네.
40명도 채 남지 않는 연습생 무리였다. 그만큼 인기가 높은 상위 멤버들뿐이다. 사람들이 몰릴 건 당연한 일로 마음을 단단하게 먹으며 심호흡했다. 제작 발표회도 이렇게 떨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고개를 숙여 무릎 위를 내려다 보니 어쩐지 감회가 아주 색다른 듯하다. 분명 저당금 때문에 시작한 거였지만 계속 잊게 되는 것 같았다.
"형, 긴장했어요?"
"어, 조금 넌 메이크업 다 받았어?"
"네~ 다들 오늘 힘을 많이 줬더라고요."
"파이널 직전에 하는 대면식이니까 다르겠지."
"확실히 파격적이긴 하네요. 이번 시즌 뭔가 재밌어요."
이유준과 권혜성이 말끔한 얼굴로 다가왔다. 다른 곳에서 세팅을 받고 온 모양이었다.
"혜성이, 너 오늘은 교복 잘 입었다. 아주 단정한데?"
"사실 좀 갑갑해요~ 안 그래도 아까 실장님한테 혼났잖아요. 오늘은 옷 예쁘게 입고 있으랬어요."
평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의 권혜성이 신기했다. 이유준이야 모범 답안처럼 하고 다니니 상관이 없다 치고, 권혜성 저애는 독특한 케이스였다. 첫 만남만 떠올려도 같은 옷이라고 할 수 없었는데 그때는 이너 셔츠가 보이도록 입은 게 딱 남고생들의 느낌이었다. 농담을 주고받으니 조금은 긴장이 풀렸나 보다.
"연습생 여러분, 입장 스탠바이 하실게요!"
마이크를 찬 스태프가 소리쳤다. 그에 모두가 굳은 얼굴로 한곳을 바라본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매무새를 가다듬는 게 솔직히 내 의상에선 정리할 것도 없어 보인다. 풀어 헤친 교복 재킷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네."
"넵!"
평소 들어가던 세트장의 입구로 작은 단상과 정리된 배경이 야외 이벤트를 실감 나게 했다. 펜스 너머로 가득한 인파가 목격됐다. 저 사람들이 다 우릴 보러 온 거라니 어딘지 조금 얼떨떨한 심경이었다.
앞 사람에 맞춰 발걸음을 내디디자 사방이 비명으로 메아리친다. 상위권 멤버들의 호명이 가장 큰 것 같았지만 그 안에는 익숙한 이름도 많이 들리는 듯 하다. 모두와 함께 타이밍에 맞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유준! 유준아, 여기도 봐 줘!"
"권대화!"
"이형석! 형석아!"
"혜성아! 권혜성! 이쪽! 이쪽!"
친한 연습생들이 호명되며 정신이 번쩍 차려지는 것 같았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두 명으로 이유준은 아주 능숙하게 대처했다.
성격상 쉽게 당황할 인물도 아니었지만 도리어 권혜성 쪽이 보는 맛이 있는 듯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봐 달라고 한 거지, 출석 체크를 한 게 아닌데.
덕분에 나도 자연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역시 분위기 메이커가 딱 맞는 성격이다.
요동치는 플래시에 눈을 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누구를 찍으러 온 건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일단 나는 없을 것 같은 게 애초에 이런 건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해신아!"
방금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찍고 있는 카메라 한 대를 발견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갸웃거리니 플래시가 이어진다.
…저요?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켜 보였다. 그랬더니 사정없이 연사 설정을 한 채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다. 엄청난 속도의 셔터 스피드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응원해 주는 팬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걸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