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어딘가 입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세팅받을 때 이것저것 요청 좀 할걸. 나 하나 찍겠다고 몇 시간을 대기했을 사람인데 손을 내리곤 할 수 있는 최선의 표정을 지었다. 입꼬리를 끌어 올리니 비명이 커진다. 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기 바빴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커다란 카트를 끌고 온 제작진이었다. 그 안에는 꽃이 담긴 바구니가 가득 있었는데 이번 포토 존의 하이라이트로, 적은 인원이 남아 할 수 있던 구성이었다. 연습생 무리가 너 나 할 것 없이 바구니를 챙겨 든다.
그러고는 천천히 펜스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앞에는 이미 연습생들을 향해 손을 뻗는 사람들이 보였다.
"태오야! 나도!"
"문채민! 여기 좀 봐 줘! 여기!"
가드 사이는 아비규환인 현장이다. 작게 웃으며 사이사이 내민 손에 꽃을 쥐여 줬다. 솔직히 얼굴을 보고 차분히 건네주고 싶었지만 이래선 안전상 빠르게 해치워야 할 일 같았다. 일부 연습생들은 제 몫을 끝내고 능숙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 안에는 경력직 신입인 이민석도 포함돼 있었다. 저 사람은 저번과 달리 대처가 빠른 편이네. 재밌는 성격이라며 마저 꽃을 나눠 줬다.
그러다 그만 옆에 있던 연습생과 어깨가 부딪쳤다. 반대에서 걸어오다 보니 발생한 실수로 사과를 하려고 고개를 돌리다 멈췄다. 여기도 아는 인물이네.
"…어?"
"…아."
직전까지 같은 팀이었던 강태오다. 언제나처럼 멀끔하고 잘난 얼굴로 민망함에 머쓱하게 인사를 나눴다. 그에 맞춰 얘도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얼른 떨어지고 싶었으나 코앞에 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표정 관리를 하며 자연스럽게 멀어져야 한다.
다시 바구니를 만지던 순간 찰칵, 어디선가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다른 곳에서도 쉼 없이 이어지던 소리였다.
하지만 이건 유독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강태오와는 동시에 정면을 바라봤다. 가드와 펜스 사이로 빠져나온 대포가 한 대 있었는데 머쓱하게 웃으니 셔터음이 이어진다.
"저는 이만……."
"아, 네……."
등을 돌려 얘와는 서서히 멀어졌다. 팬들에게 꽃을 나눠 주려고 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한 송이까지 전달해 주고 꽃을 받은 팬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얼추 마무리된 나눔 현장으로 빈 바구니는 반납하고 빠르게 단상으로 돌아갔다. 먼저 와 있던 이유준과 권혜성이 나를 부른다. 뭐라고 했지만 사실 쟤네가 제일 편하다.
"형, 형!"
"얼른 오세요."
"응, 가고 있어."
주변을 돌아보니 친한 연습생들끼리 무리 지어 포즈를 취했다. 팬들은 다 알고 있던 관계성이다. 역시 이런 게 인기가 좋은 건가. 가만히 다른 곳을 바라보던 상황이었다.
권혜성과 이유준이 몸을 부대껴 온다. 안 그러는 척 얘들도 실속을 잘 챙긴다니까. 한 번은 그냥 따라 주기로 했다. 나쁜 것도 아니었으니 같이 웃자.
그렇게 팬과의 대면을 마무리 지었다. 촬영을 위해 세트장으로 들어가던 길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목격한 건 아까 내 이름을 외쳐 주던 그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팬이었지만 그저 고마웠다.
그래서 활짝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 렌즈면 좀 무거운 게 아닐 텐데… 부디 귀갓길에 앉아 갈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후… 긴장했었다!"
"그래?"
익숙한 세트장에 앉아 다음 차례를 대기했다. 그사이 다른 사람들과는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저 엄청 떨렸어요."
"티 안 내고 잘했네."
"사진 잘 나왔을까요?"
"글쎄, 난 눈만 안 감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뭐예요!"
아무래도 농담인 줄 아는 모양이다. 팬들과의 만남으로 들떠 있는 연습생들을 쳐다봤다. 나는 조금 심란한 편으로 강태오와 투 샷을 잔뜩 찍혀 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3차에서 팀원으로 활동했었다. 붙어 다닐 만치 다녔다고 봐도 됐다.
하지만 DSLR 근접 샷은 처음이란 말이야. 절대 강태오는 검색해 보지 말자고 다짐했다. 처참하게 비교된 글이 올라올 수도 있었다. 이런 건 전부 모르는 게 약이지. 그래도 딱 하나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홈마라."
"네?"
"아무것도 아니야."
아까 날 찍고 있던 사람이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홈마스터라고 불리는 사진사인 게 분명하다. 스태프 일을 하다 보면 자주 목격할 수밖에 없는 부류의 팬이다.
방송국까지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찾아오곤 했다. 힘들게 촬영을 하고 그걸로 직접 홍보까지 나섰다. 애정이라고 해도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 팬이 내게도 있었다니, 어쩐지 응원 광고판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듯하다.
* * *
"대망의 파이널이라는 고지를 앞뒀습니다. 3차 순위 발표식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진지한 얼굴의 고우림이 나타났는데 순위 발표식 때만 보여 주는 표정이다. 처음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인원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멀지 않은 곳에 아는 인물이 잔뜩 앉아 있는 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서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었다. 여기 있는 전원은 어찌 됐든 라이벌이었다. 다른 사람이 붙으면 내가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깊게 숨을 내뱉고는 정면을 응시했다. 결국은 또 이 현장을 지켜봐야 한다.
"오늘의 탈락자는 15명입니다."
"하……."
"……."
"20위……."
반에 가까운 인원이 사라지는 게 통과하기는 아주 힘들 수준이었다. 연습생들은 숨죽여 설명을 경청했다.
이미 무대는 모두 끝나 있는 시점으로 남은 건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사리사욕으로 나온 내가 여기까지 살아남은 것도 대단한거지. 먼저 탈락한 연습생들만 억울할 일이라고 그런 걸 떠올리면 나는 뭐든 감사해야 했다. 내게도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 있었다.
19위부터 차례대로 불려 나간 장면이었다. 아슬아슬했지만 그 안에는 아는 인물이 섞여 있었다. 그건 바로 2차 팀원이던 배민형이다. 저번과 달리 조금은 울먹거렸는데 자신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박수를 치며 남은 과정을 지켜보니 그래도 완전히 우는 인물은 드물어 보인다. 진짜 멘탈이 강한 사람들만 나온 시즌이었구나.
"13위는, 솔직함과 모두를 이끄는 통솔력이 빛을 발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우정환 연습생."
문채민 옆을 지키고 있던 연습생이었다. 초반부에 비하면 엄청나게 올라 온 우정환이다. 캐릭터와 능력에 비해 과소평가를 받기도 했지. 그럼에도 끊임없이 같은 곳을 두드렸다. 시청자들도 그걸 알아준 것 모양으로 씩씩하게 웃은 우정환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소감을 발표하는 얼굴이 유쾌한 게 진짜 트레픽 애들은 특이할 정도로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차례대로 호명되어 피라미드에 자리했다. 10위대까지 들어서니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뛴다. 2차부터 말도 안 되게 올라가는 상승세였다. 데뷔조에 들어야 한다지만 큰 욕심은 부리지 않던 나날이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소감을 들었는데 어느덧 9위까지 진행이 된 상황이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를 믿고 따라 준 팀원들, 너무 고맙고 또 미안합니다……. 응원해 주시는 모든 분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형! 울지 마요!"
"아, 나도 눈물 나……."
단상 위에 서 있는 건 이민석이었다.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었다. 3차에서 큰 고난을 겪었던 게 떠오른다. 백스테이지 사건은 잘 무마했었지만 그래도 현장 투표와 반응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듯했다.
아까 멀쩡하길래 괜찮을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속은 곪아 있었던 것 같았다. 순위가 많이 떨어지긴 했지. 하락세를 탔다고 하긴 했지만, 그게 눈에 보이니 도리어 미안해졌다. 훌쩍거리는 이민석이 몸을 돌려 좌석으로 올라갔다.
사실 내가 남의 걱정을 할 처지는 아닌데. 이민석이 나왔는데 아직 불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건 어떻게 보면 탈락의 위기다. 패자부활전 이런 건 없던가. …있을 리가 없잖아. 뒤의 시즌에서 스태프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진짜 바보 같은 생각을 해 버렸다.
"이제 8위를 호명해 보겠습니다."
인원이 줄어서 그런지 간극이 생긴 녹화였다. 전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추임새를 끼워 넣었다. 차라리 미션 때처럼 한 번에 공개하길 바랐다.
반쯤은 내려놓은 심정으로 자리를 지키는데 이 구간만 지나면 데뷔조에 속하는 라인이다. 조금은 막막하게 미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이제 무슨 일을 구해야 하는 거지. 스태프는 다시 할 수 있을까? 출연까지 했는데, 지인 찬스로 붙여 줄 순 없으려나. 물론 취업하면 방송국 사람들이 놀랄 것 같긴 했다. 그래도 그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드물었다. 취준생 마인드로 현실을 돌아볼 무렵이다.
"8위는, 이제는 대표적인 성장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신해신 연습생."
어안이 벙벙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두의 포커스가 내게 쏠려 있는 게 이마만 매만진 채 넋을 놓고 있었다.
"형!"
"얼른 나가요."
"아… 어."
권혜성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다. 등을 밀어 주는 이유준에, 몸을 일으키던 찰나였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단상 위에 올라가자 고우림이 축하 인사를 던졌다. 옆으로 비켜 주는 모습에서 이게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민석이 불린 이후인데, 나는 영락없이 탈락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용히 수긍을 하던 과정으로 믿기지 않아 얼굴만 쓸어내렸다.
"어… 우선, 이렇게 호명될 줄 몰라서 너무 놀랍고, 기쁩니다. 항상 응원해 주시는 마스터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팀원 친구들… 부족한 저와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좋은 무대로 보답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듬더듬 소감을 발표하니 누가 봐도 놀란 걸 알 수 있을 장면이었다. 허리를 숙이기 전 같은 팀이던 연습생들을 목격했다. 아직 불리지 않았지만 나를 향해 박수를 쳐 주고 있다.
등을 돌려 피라미드의 좌석으로 이동했다. 다시는 여기에 앉지 못할 줄 알았다. 점점 높아지는 숫자가 실감 난다. 8위라니, 데뷔조인 7위 바로 전의 순서라고 볼 수 있었다. 가슴 언저리를 손으로 꾹 눌러 봤는데 손바닥 위로 요란한 박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쩐지 어깨가 무거운 게 이 자리에 대한 책임감을 실감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