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다시 모인 강당, 이제는 익숙해진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줄어든 인원으로 인해 전원이 한눈에 파악됐다. 표정들이 전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바로 파이널에 들어가는 걸로 아는 듯하다.
"후, 긴장된다~ 근데 형, 왜 이렇게 담담해요?"
"나? 아니야. 나도 엄청 떨려."
"쓰읍, 뭔가 수상한데……."
"그러게? 형이 저희 셋 중에서 제일 겁 많잖아요."
"너네 정말 너무하다."
지긋하게 시선을 던지는 둘에 무언의 확신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진짜 귀신같은 애들이네. 부정했지만 전부 정답이다. 담담할 수 있었던 건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게 바로 미션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세트장에 입실하던 과정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한 풍경으로 힌트라도 얻고 싶어서 제작진을 유심히 관찰했다.
같이 일했던 동료인 만큼 운이 좋으면 뭔가를 알아낼 수도 있었는데 그때 대량의 소품이 이동하는 걸 목격했다. 원단을 씌워 가렸지만 저건 1번 창고의 전용 카트였다.
게임부터 들어가나 보네. 1번 창고라면 나도 가 본 적 있는 곳이다. 버라이어티 전용 아이템이 있는 방으로 보상을 걸고 예능적인 장면을 뽑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진행을 선호하는 제작진다운 게 그래서 조금은 긴장이 풀려 있었다. 게다가 아주 특별한 만남까지 성사되었으니 상대방은 모르겠지만 내겐 재밌는 상황으로 느껴졌다.
'희태야, 그거 저기로 옮겨라.'
'네.'
'20분 안에 세팅 끝내야 해. 정 AD님한테 보고도 하고?'
'알겠습니다.'
아무 말 없이 눈으로 움직이는 인형을 좇았다. 명령에 따라 다른 세트장으로 사라진 사람이었다. 김희태… 저 사람은 내 직속 선임이던 선배다. 어쩐지 지금까지 안 보인다 싶었지, 아무래도 이때는 소품 팀 전담으로 일했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거기 있으면 녹화 현장에는 나올 일이 드물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배를 보자마자 긴장이 싹 사라져 버렸다. 선배, 제가 여기 출연자로 나왔어요. 나를 알던 시기에 들었으면 낄낄거리며 박장대소했을 인물이다. 출세했다며 한껏 놀리고는 커피를 사라고 장난쳤을 텐데.
일을 할 때는 그렇게 얄미웠는데, 떨어지고 보니 제법 좋은 선임이란 판단이었다. 이걸 과거라고 해야 할지, 미래라고 해야 할지 고민된다. 하긴, 집중해야 하는 건 거기가 아니니까, 마음을 다잡아 보자며 당당해지기로 했다.
"형, 왜 그러세요?"
"아니야. 슬슬 준비하자."
"넵!"
* * *
"안녕하세요, 여러분~"
윈드 브레이커를 걸친 고우림이 등장했다. 저런 옷이라면 뻔한 게 예상했던 대로 예능 구간이다.
"드디어 대망의 파이널에 진입했습니다. 생존하신 연습생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박수를 치며 서로를 돌아보는 연습생들이었다. 멘트에 비해 가벼워 보이는 연출에 모두 의문을 품은 채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건 그냥 지나가는 위트로 봐야 해. 느긋하게 웃으며 장단을 맞춰 주는 게 스태프 경력이 여러모로 사용되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본미션에 들어… 가지 않습니다."
"…네?"
"응?"
"오늘은 바로 게임 데이입니다. 이름하여 아이돌 미니 운동회!"
타이밍에 맞춰 발랄한 BGM이 흘러나온다. 양손을 하늘 위로 들어 올린 고우림에 모두가 놀라 눈만 깜빡거린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얼굴들로 그나마 눈치 빠른 일부가 환호하는 척을 했다.
이민석이나 권혜성, 우정환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도 미니 운동회라고 하는 걸 보면 양심은 있네. 대운동회라고 하기에는 많이 탈락시킨 시점이기도 했다.
"5인 1조로 4개의 팀이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총 3종의 게임이 준비되어 있으며, 각 팀에서는 출전 선수를 내보냅니다. 매 경기의 우승자에겐 1점을 부여하며, 가장 많은 점수를 딴 팀에게는 특별한 보상이 주어질 예정입니다. 그러니 모두 열심히 해 주세요?"
또 시작됐어. 하도 많이 당해서 익숙해진 패턴으로 보상이란 말에 불타는 연습생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정황상 어떤 걸 줄지 모른다. 일단 열심히 해 보자.
"팀 선정은 간단하게 진행하겠습니다. 뽑기 카트 나와 주세요~"
작은 수레와 함께 투명한 아크릴 박스가 나왔다. 저번부터 저것 참 잘 쓰네. 출연진이나 연출에 제작비를 쏟아붓더니, 여기서는 검소한 면모를 보여 준다.
하긴, 쓸 수 있는 비용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안에 담긴 종이를 보니 대강의 인원수와 맞아떨어질 듯하다. 전부 고우림이 정해 줄 것 같았는데 그냥 가만히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이 안에는 여러분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들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불린 5분이 한 팀입니다. 호명에 맞춰 각 라인으로 이동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별로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은 구간다웠다. 그래서 빠르게 진행이 넘어간다. 설명에 맞춰 움직이는 연습생들에 때맞춰 나도 이름이 불려 팀으로 이동했다. 과반수를 아는 터라 크게 불편하진 않은 게 모이고 보니 신기한 조합들이 많이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보네요."
"안녕하세요, 형."
그래, 잘 지냈어? 김찬규 이 애도 여기 있었다. 이제는 형이라고 곧잘 부르는 게 한 번 겪어 봤다고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든다. 프로그램 내에서는 몇 안 되는 나 같은 유리 멘탈이다. 오랜만에 동지를 만났다.
"해신이 형~"
"아, 정환아."
"같은 팀을 드디어 해 보네요?"
"그러게. 본미션은 아니지만 잘 부탁해."
우정환이 휘적휘적 손을 흔들었다. 얘랑도 묘하게 자주 얽히는 것 같은데, 이유준과 권혜성은 다른 팀으로 들어가게 된 모양이다. 그런데 어째, 이 뒤에 들어오는 애들이 심상치 않다.
4번째 팀원은 윤명으로 자판기 사건 이후에 대화할 일이 생긴 건 처음이다.
"오, 명이 형!"
"…또 정환이 너야?"
"에이, 듣는 내가 슬프잖아~ 그리고 같은 팀이면 좋지."
"…징그러ㅇ……."
"하핫, 거기까지."
우정환이 손을 들어 윤명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란스러웠지만 일단은 녹화 중이다. 윤명 얘는 간이 큰 건지 용기가 가상한 건지 모르겠다. 여태까지 탈이 없었던 건 우정환의 케어 덕분인 게 확실하다.
가만히 응시하다 마지막 팀원을 구경하니 아까 전부터 내 눈치만 보고 있던 박승경이었다. 저 사람에게는 괘씸죄를 부여하고 있었다. 3차 미션에서 날 실의에 빠지게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눈이 마주치니 고개를 튼다. 그래, 너도 알고 있기는 하구나…. 중간에 있던 김찬규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게임에 돌입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순서는 팔씨름이라고 했는데 고우림의 설명과 동시에 팀원들이 한 명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의 윤명이었다.
"…왜?"
"왜가 아니잖아! 이건 형밖에 없어."
"일단 나도 공감하는데. 명아, 네가 나가라."
박승경이 윤명의 등을 토닥거리며 달랬다. 생각해 보니 저 둘은 자주 순위가 붙어 있었지. 동일한 방을 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어려 보여서 그렇지, 윤명의 덩치는 장난 아니다. 정확한 수치를 알 순 없었지만, 연습생들 내에서도 톱이라고 볼 장신이었다.
게다가 이번 게임에는 강력한 다크호스도 하나 있었던 게 바로 먼저 나가 있던 강태오였다. 저 팔뚝과 대적할 만한 사람은 얘밖에 없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윤명을 떠밀었다.
"…나 지면 어떡해?"
"뭐라고 안 해! 안 하니까 얼른 나가!"
우정환의 타박에 5명의 선수가 한곳으로 모여 들었다. 역시 하나같이 체격이 좋은 연습생들뿐이다. 그중 유달리 강태오와 윤명에게 시선이 쏠리니 누가 봐도 저 둘이 빅 매치라고 여기는 듯하다.
간단한 소개와 함께 대진표가 작성됐다. 2명씩 묶어 예선을 한다고 한다. 첫 번째 경기로는 윤명이 나서는 게 당장 강태오와 붙는 경기는 아니었다. 굳은 얼굴의 연습생이 걸어 나온다. 체격 차이로만 봐도 이길 것 같아서 느긋하게 관전한 찰나였다. 그런데 김찬규가 낭패를 봤다는 안색이다.
"…아, 잊고 있었다."
"…네?"
"해신이 형, 형한테만 살짝 말씀드리는 건데요……."
응원에 열중하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영문을 몰라 몸을 숙이니 귀에 대고 작게 말한다.
"…정원이 형이요."
"…어? 그러고 보니까."
경기를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선수 3명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안에는 익숙한 얼굴이 하나 들어가 있었다. 이정원… 쟤가 왜 여기 나왔지. 강태오와 윤명, 둘에게 포커스가 쏠려 이제야 눈치챘다.
나랑 고만고만했으니 180cm은 될 것이다. 하지만 본인 팀에는 더 커 보이는 연습생도 남아 있었다. 날씬한 체형이라 상대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외형인데.
"팔씨름 진짜 잘해요. 제가 알기로는 무패일걸요? 저도 장난 삼아 붙어 봤는데, 절대 못 이겨요."
"이정원이요?"
"정원이 형, 힘이 엄청 세거든요."
손까지 내저으며 질색을 하는 김찬규다. 김찬규도 그렇게 작지 않은 체구였는데, 이정원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타이밍에 맞춰 다음 승부가 시작됐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강태오와 이정원이었다. 겉으로 봐선 누가 봐도 결과가 정해진 경기로 보인다. 그런데 이정원이 느긋하게 미소 짓고 있다.
준비를 확인한 고우림이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남들에겐 그리 흥미로운 대치가 아닌 것 같았는데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울려 퍼지곤 사방에서 경악이 터져 나온다.
"…뭐야?"
"…어?"
"야! 강태오! 너 뭐야!"
"…지금 태오 형이 진 거야?"
"태오 쟤는 팔뚝이 아깝다."
"으악, 정원이 형이 이겼다!"
"헉……."
"대박, 진짜 대박……!"
"와, 와… 뭐야? 자신 있다더니 진짜였어요?"
이정원네 팀에서 환호성이 쏟아진다. 반면 강태오가 속한 팀은 놀라기 바빠 보였다. 고우림도 이 경기가 아주 흥미진진한 것 같은 게 재밌다는 듯한 얼굴로 단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말 맞죠?"
"…네."
시원하게 상대방을 넘겨 버린 이정원이 매너를 챙기곤 뒤로 물러섰다. 강태오는 민망했는지 미간을 잔뜩 찡그리는 게 마치 저 인간은 또 뭐냐는 표정이다. 쟤도 알고 보면 캐릭터가 단순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 듯했다. 3차를 같이해서 알 수 있던 점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머지 경기가 진행됐는데, 이어지는 사태에 당황스러워서 실소가 터졌다. 윤명도 결국 이정원에게 패배했단 소리다. 사방에선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목격됐다. 쟤, 뭐야?
"이렇게 해서 아이돌 미니 운동회 팔씨름의 최종 우승자는 이정원 연습생입니다."
이정원은 두 경기나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모습이었다. 이런 게 아니어도 충분히 버거운 성격인데, 물리적인 힘까지 강하다니 압도적인 애였다. 갑자기 안 그러는 척 이용해 먹었던 2차 미션이 떠올랐다.
…들키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 관람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절대 안돼, 숨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