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이번 경기는 바로 '내 마음이 들리니?'입니다."
고우림이 간략하게 설명을 해 줬다. 2인 1조로 하는 게임으로 문제를 내는 사람과 맞히는 사람이 한 페어였다. 한쪽이 헤드셋을 끼면 반대편에선 답을 외쳤다. 한마디로 그냥 청력 싸움이라는 뜻이다.
돌아가는 루틴을 보니 연습생 전원을 참가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맞아야 하는 매, 그냥 빨리 끝내는 게 나아 보인다. 그래서 서둘러 선수로 자원했다.
"제가 나가도 될까요?"
"엇, 형. 나도!"
때마침 우정환도 같이 손을 들었다. 쟤는 왠지 귀가 좋아 보이는 게 눈치만 따져도 뭐든 때려 맞힐 사람이다.
모두의 동의를 얻어 단상으로 나가니 인근에는 아는 연습생들이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특히 이번 단계에선 권혜성도 출전을 했다. 의외의 조합으로, 이민석과 함께 나온 게 보인다. 예능 분량은 확실하게 얻어 갈 일로 나는 문제만 잘 내주면 되는 입장이다.
"제한 시간은 1분입니다. 아차, 그리고 포지션은 자율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골라 드리겠습니다."
"…네?"
"예?"
"…넵?"
고우림의 선언에 모두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누가 어느 포지션을 해야 하는지 정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저 사람, 이 프로그램을 상당히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천직도 이런 천직이 없어 보이는 게 왜 여태 예능을 안 했는지 모를 일이다.
우정환과는 가만히 서로를 지켜보니 아무리 봐도 쟤가 맞히고, 내가 내는 게 정답이었다. 애초부터 그걸 노려 나온 상황이다. 낭패다.
"지금 서 있는 기준에서 제가 봤을 때 왼쪽이 정답을 맞히시는 분, 오른쪽이 문제를 내시는 분입니다."
"으악! 너 왜 거기 서 있어!"
"헐… 대박……."
안타깝게도 희망하던 역할의 반대편으로 정해졌다. 그냥 막 나온 거였는데, 여기에도 의미를 부여할 줄은 몰랐다. 남아 있던 팀원들 중 윤명을 제외한 둘이 웃었다. 저건 체념을 한 사람의 미소 같다. 얘들아, 너희 참 현명하구나. 나도 포기했어.
"형, 시끄러워도 잘 들어?"
"…뭐가?"
"아, 망했다!"
대뜸 우정환이 소리치며 탄식했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그에 따라 주변에선 웃음이 터져 나온다.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던 게 오늘도 먼저 나섰다가 후회를 하고 있었다.
분명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돌아가는 상황은 내 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마지막까지 버틸걸. 자고로 요행은 부리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참이었다.
* * *
의자에 앉아서 든 생각이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귀에는 헤드셋이 씌워진 상태로 쩌렁쩌렁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필이면 곡도 수백 번은 더 들은 테마곡이다. 이거 이제 그만 듣고 싶어. 차마 말도 하지 못한 채 정면만 응시했다.
아까부터 우정환이 뭔가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볼륨을 얼마나 키운 건지 아무것도 눈치챌 수 없다.
"어? 하나도 안 들려!"
참고로 이 짓을 10번은 반복했다. 우정환이 제 가슴팍을 퍽퍽 내려치는 게 왠지 모르겠지만 측면으론 웃음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이거 뭐,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야 할 것 아니야. 미간을 찡그린 채 우정환의 입만 바라봤다. 이렇게 된 이상 발음 모양으로라도 유추해야 할 것 같았다.
"…에, 에……?"
'ㅔ'로 시작하는 게 뭐가 있더라. 그냥 생각나는 대로 던지는 게 나아 보인다. 어차피 글렀다고 확신한 게임, 입이라도 뻥긋하고 탈락하자.
"에스컬레이터……? 이거 아니야……? 그럼 엘리베이터……?"
우정환의 표정이 말해 주고 있었다. 둘 다 정답이 아닌 것 같다. 그나저나 쟤가 저렇게 답답해하는 건 처음 보는 듯 하다. 2차 미션에서 싸움이 났을 때도 능글맞은 태도를 고수한 사람이었지. 근데 지금 저거, 내가 걔네보다 더 심하다는 건가? 왠지 상처받을 것 같았다.
때마침, 고우림이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제한 시간이 전부 완료된 것 같으니 뒤에 있던 연습생이 헤드셋을 벗겨 준다. 한숨을 쉬면서 고개부터 돌렸다. 그 놈의 정답이 뭐였는지 확인해야겠다.
[제이오원에이]
이거였구나. 근데 너무 길잖아. 게다가 '제'와 '에'는 입술 형태로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도 모음 하나는 알아냈다며 나름 위안 삼았다.
"아~ 이번 조는 최저 점수가 나왔습니다. 무려 0문제."
"해신이 형, 왜 이렇게 탈 거를 좋아해!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이동 수단 다 나왔어!"
"좋은 현대 문물이잖아."
"그렇긴 한데, 잠깐… 요지는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게르마늄은 또 어디서 나온 거야?"
"…나한테는 그렇게 들렸어."
"여기서 그런 게 나올 리가 없잖아……."
투덜거리는 우정환과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도 연습생들은 우릴 보며 웃는 중이었다. 민망함에 우정환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어쩐지 많이 부끄러운 기분이다.
그 상태로 마저 헤드셋 게임이 진행됐다. 꼴찌인 게 확정이라 별다른 감흥은 없다. 최종적으로는 문채민이 속해 있던 팀이 점수를 가져갔다. 마지막 항목에서 이기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뒤집기다.
"마지막 경기는 이구동성입니다……!"
다시 한번 선수로 나갈 연습생들이 차출됐는데 이번에는 김찬규와 박승경이 출전해 있었다. 10개의 선택지를 듣고 기호 취향을 골랐다. 같은 걸 택하면 카운트를 해 주며, 그 수가 가장 큰 팀이 우승이라고 한다.
어째 기대라곤 전혀 할 수 없는 게 우정환과 윤명도 가망이 없다고 보는 것 같았다. 이유는…….
"와, 저 둘 엄청 생소한 조합이네?"
"지금까지 관계될 일이 없었어."
"…한 번도 없어?"
"내가 알기로는 그럴걸."
엄청 어색해 보인다. 김찬규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박승경도 뻘쭘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두 번째 과정에서 나와 우정환이 자진 출전을 했다. 덕분에 만들어진 이상한 페어로, 이걸 보니 보상은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아 보인다.
저 상태에서 해야 하는 것마저 '이구동성'이다. 눈도 못 마주치는 애들이 취향이 맞을 리가…….
"하나, 둘, 셋!"
"짜장면." "짜장면."
"하나, 둘, 셋!"
"ICE." "ICE."
"하나, 둘, 셋!"
"소고기." "소고기."
환상의 호흡이다. 내는 족족 전부 맞아떨어진다. 연습생 전원이 입을 벌린 채 관전하고 있었는데 이쯤 되면 하나쯤은 다른 게 나오길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뭐야, 쟤네… 옆에 있는 우정환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건 우리 팀이 이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아이돌 미니 운동회 이구동성 최종 우승자는 박승경, 김찬규 연습생입니다."
"승경이 형, 찬규야! 둘이 뭐야? 왜 이렇게 잘 맞아?"
"…뭐, 어쩌다 보니……."
"네… 그냥 잘됐네요."
죽이 척척 맞은 것치곤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 하여간에 이상한 애들이라며 작게 웃었다. 윤명은 그저 멀뚱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래도 얘네가 이겼다는 건 동등하게 상위권을 차지했다는 소리였다. 5팀 중 3팀이 승리하며 1점을 가져갔다.
이 안에서 최종 우승 팀을 고를 것 같다. 어떤 방법으로 최종 우승팀을 선정하려나 궁금하다. 아까 선배가 옮긴 소품들을 떠올리니 그걸 여기서 쓸 것 같지는 않다. 하여간에 종잡을 수 없는 제작진이라니까.
"지금 1게임씩 이긴 팀이 총 3곳으로 동점인데요. 마지막은 바로 이거죠? 가위바위보로 정하겠습니다. 각 팀의 대표분들은 앞으로 나와 주세요."
"…가위바위보요?"
"…네?"
이럴 줄 알았다. 별거 아닌 걸로 힘이 쭉 빠지게 만드는 게 코밑을 훑으며 팀원들을 바라봤다. 박승경과 김찬규는 당황한 것 같아 보인다. 우정환은 능청스럽게 웃고 있었지만, 어째 어이가 없는 듯 하다. 윤명은 자기 손만 가만히 내려다보는 게 무슨 보상을 주려고 하는 건지 말해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수록 큰 거일 확률이 높지. 사단 성향 자체가 장난치기를 좋아했으니 아마 본미션이나 분량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방금 전 둘의 활약 덕분에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기왕 이렇게 된 것, 욕심을 좀 부려보기로 했다.
"가위바위보라… 잘하는 사람 있어요? 내가 왕년에 좀 이겨 봤다?"
"이건 순전히 운이잖아요."
"맞아, 나도 영 자신이 없는데……."
"…나 별로 이긴 적 없어."
우정환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가위바위보라… 진짜 운이 전부인 승부수였다. 어?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얻은 게 하나 있지 않나.
"내가 나가도 될까."
"어? 해신이 형, 가위바위보 잘해요?"
"…대충 10번 하면 7번은 이길 것 같은데."
"…네?"
"승률로 따지면 70% 정도?"
상태 창 가장 하단을 쳐다봤다. 보유 스킬이 나열되어 있던 부분이다. 이걸 어디 쓰겠냐고 생각했던 과거가 떠오른다. 진짜 뭐든 갖고 있으면 다 쓸모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장 등급이 높은 구간이기도 했던 게 재수가 좋았다고 해야 하나 미심쩍다.
'가위바위보의 신(B)'
* * *
"축하드립니다. 아이돌 미니 운동회 대망의 우승자는, 바로 이 팀입니다."
"우와악! 해신이 형! 대박!"
"우와……."
고개를 숙여 제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거기엔 아직 아직 풀지 못한 가위가 보인다. 단 한 번으로 깔끔하게 정해진 승부로 보자기를 낸 두 명을 바로 이겨 버렸다.
…어라, 이게 되네? 고개를 갸웃거리다 우정환의 환호성을 들었다. 김찬규와 박승경도 놀란 얼굴이다. 윤명은 여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데 헤드셋 게임에서 진 빚은 갚았다고 안도했다.
이렇게 이겼으니 안 좋은 쪽으로 분량을 줄 것 같지도 않고, 제작진에게도 제 나름의 방어벽을 세운 순간이었다.
"그러면 곧바로 보상을 공개하겠습니다. 이번 아이돌 미니 운동회 우승 팀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궁금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확신했다. 결코 작은 거는 아니야.
"바로 파이널 미션의 평가 곡 선택권입니다. 해당 팀원 5분께는 본미션에서 가장 먼저 곡 선정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뭐?"
"어?"
"악!"
"대박… 대박……."
그래도 이건 너무 크잖아. 연습생 전원이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게 우정환은 이목구비가 모두 확장돼 있었다. 나도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은 게 이건 베네핏에 버금가는 엄청난 혜택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으나 대개 파이널에서는 두 개의 곡으로 경합을 한다. 그중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아니, 행운을 넘어서 결과까지 이어지는 초미의 관심사다.
얌전한 연습생들도 이번만큼은 놀란 감정을 감출 수 없던 것 같다. 윤명이나, 이정원 같은 애들도 감탄하는 게 시작도 전부터 견제를 받고 들어가게 생겼다. 좋은 걸 떠나서 머리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