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88화 (88/328)

88화

"미, 미니 게임에서 이런 걸 줘도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와, 여기서 이게 나올 줄은 몰랐지."

바로 인근에 앉아 있던 연습생 둘이었다. 이어지는 대화에 깊이 공감한 게 고우림의 귀에도 들어갔을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싱긋 웃으면서 클로징 멘트를 외치는데 프로는 프로라고, 뻔뻔한 것도 대단하다.

슬레이트 소리와 동시에 쉬는 시간이 이어졌다. 잠시 후부터는 본미션에 돌입한다고 했다. 사라지는 고우림을 바라보다 팀원들 무리로 합류했다. 뭐가 됐든 일단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형… 형, 대박. 이게 무슨 일이에요?"

"…나도 몰라. 좀 파격적인데."

"…어, 그러니까 저희 5명은 먼저 선곡할 기회가 있는 거예요?"

"일단 그런 것 같은데요."

"……."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눈길이 느껴지는 게 안 그런 척 여기를 바라보는 애들이 많았다. 뭉쳐 있으니 더 눈에 띄는 것 같은 게 어차피 바로 다음 녹화도 이어질 예정이었다. 일단은 각자 지인 무리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수고했다며 안부를 나눈 찰나다.

"일단, 고생하셨습니다. 어, 다들 잘해 봐요! 파이팅!"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만나요."

"…수고하셨습니다."

* * *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이유준과 권혜성이 있는 곳이었다. 뭐가 됐든 일단 저 애들이 제일 마음 편하다. 둘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손을 들며 어서 오라고 반겨 준다. 역시 라이벌을 떠나 경쟁의 측면은 덜 보여 주는 타입들이다.

"형, 축하드려요."

"고마워. 근데 좀 얼떨떨하다."

"확실히 보상이 엄청 컸죠? 저희도 다 놀랐잖아요! 그리고 형, 게임 되게 못하던데……."

"그런 건 말 안 해도 돼."

"분량으로는 확실할걸요? 그리고 이제 형 무서워하는 애들 없잖아요."

"성격 다 안 것 같아요~"

"그거, 좋은 거야?"

"그럼요~"

한숨을 쉬면서 몸에서 힘을 풀었다. 완전한 휴식이어서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파이널이라고 각오를 다진 찰나로 왠지 이번 단계도 힘겹게 보낼 것 같았다.

* * *

스태프의 안내에 맞춰 다른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여기는 3차 미션 때 작곡가들의 영상을 본 강당이다. 미리 와 있던 고우림이 다시 한번 인사하는데 아까 전과 전혀 다른 의상을 입고 있다. 말쑥한 셔츠로 갈아입고 나타난 게 어쩐지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운동회 때 보여 준 가벼움은 남아 있지 않아서 괜히 같이 굳어 있었다.

아, 맞다. 저 사람 배우였지. 너무 능청스러워서 잊고 있던 사실이다. 일단은 사전에 정해진 자리로 위치했다. 서로 간격을 둔 채 한 명씩 서 있는 구도이다.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 파이널 단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 제 눈앞에는 단 20명의 연습생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두 팀으로 나뉘어 마지막 무대를 하게 됩니다."

"그럼, 여러분의 마지막 평가곡을 공개해 보겠습니다."

커다란 스크린 위로 빔이 쏟아지며 프로그램의 로고가 걸린 장면이었다. 파란 화면이 흐려지며 이펙트가 돌고 작은 소란 속에서 낯선 얼굴의 여자가 나타났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게 시즌 3나 4에서도 본 기억이 없었다. 주변에서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니 나만 이런 건 아닌 듯하다.

[안녕하세요, 연습생 여러분.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아이돌 시즌 1 awake의 테마곡 '불러 줘(singing)'의 작곡가 보민입니다.]

"허억……!"

"작곡가님 처음 뵌 것 같은데!"

"얼굴 원래 공개 안 하셨지?"

"나 저 노래 되게 좋아했는데! 나를 불러 줘 Singing~ 오늘도 함께해 to me!"

이제야 돌아가는 루틴은 전부 파악된다. 뒤 시즌의 파이널에서도 작곡가들이 재출연을 해 주긴 했다. 하지만 시즌 1과 2의 테마곡은 거론되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이유는 여기에 나와서 그랬던 거였구나. 진짜 끌 수 있는 어그로는 전부 가져온 제작진으로 다음 순서도 누가 나올지 예상이 됐다.

[제가 연습생 여러분들께 선물해 드릴 곡은 TRAP 장르의 댄스곡 'Field'입니다. 승리자의 포부를 담고 있으며, 밀고 당기는 비트가 특징적인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연습생 여러분들의 자신감 넘치는 멋진 무대, 기대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Field]

작곡가: 보민

작사가: 보민 & Hayley

안무가: 백승준

"어? 멘토님이다!"

"뭐? 승준 쌤?"

작곡가 보민이 사라지며 검은 화면이 나타났는데 짧게 드러난 문구에는 간략한 설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백승준이라면 댄스 멘토 중 한 명으로 3차 미션에서 있었던 장면과 동일한 루틴이었다.

진짜 머리를 잘 쓰는 제작진이었다. 세세한 곳까지 연출을 아끼지 않는다. 10명의 댄서를 기반으로 한 안무로 빨라지는 비트에 맞춰 대형이 퍼졌다.

- 시선을 놓치 마, Look at my eyes.

숨 막히는 Tension

이건 멈출 수 없는 승부

그 몸을 일으켜 Move

Don't stop 멈추면 안 돼

가드를 올려 This is my territory

늦었어 이거 봐 이미 내 Field

"대박 멋있다……."

"난 이거 하고 싶어."

"와 강하다! 카리스마 대박!"

"어른스럽고 섹시한 느낌도 있지?"

파이널다운 스케일이 느껴지는 곡이었다. 관람하던 연습생들에게선 감탄이 터져 나오고 있다. 가사부터 자존감이 높은 곡으로 보이는 게 고지에 올라간 승리자의 도취이자 포부였다.

이 곡은 아주 센 편으로 거기에 은근한 그루브가 깔려 있었다. 난이도도 상당했지만, 무대 장악력이 있어야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와 형, 이 노래 엄청 멋있죠. 안무 동선 이렇게 넘어갈 때, 테크닉이 장난 아니에요……!"

"비트도 엇박 타는 구간이 많은데요? 래핑하기 좋을 것 같아요. TRAP 장르라……."

"그러게, 너네 잘 어울린다."

권혜성과 이유준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했더니 어려운 것과 상관없이 도전하는 걸 즐기는 유형들이었다.

확실히 장점이 많은 선택지로 보이긴 하지. 중독성도 있고 특유의 컨셉도 확실하다. 하지만 단정 짓기에는 빠른 감이 있었다. 적당히 긍정해 주다가 다음 순서를 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 곡으로 바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고우림의 멘트와 함께 다시 까맣게 점멸한 화면이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그 사람이 나올 것이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의 테마곡 '잡아 줘(Catch Me)'의 작곡가 댄(D.A.N)입니다.]

얼굴은 잘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름은 들어 본 적 있는 유명인이었다. 1군으로 불리는 아이돌 그룹의 메가 히트곡을 만든 메이커인데, 앞에서 시즌 1 테마곡의 창작자를 배치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뒤는 우리가 부른 노래를 만든 사람일 것 같았다. 이쪽에 무지한 편인 나도 알고 있는 작곡가다. 물론 다른 연습생들은 난리가 날 일이었다.

"헉, 댄 작곡가님이다!"

"이렇게 되는 거였네!"

[좋은 기회로 파이널 미션곡을 선물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곡은 퓨처 EDM 장르의 'No Limit'입니다. 자신에 대한 한계를 깨부수고 높게 도약하는 자를 담았습니다. 그럼 연습생 여러분의 'No Limit'을 응원하겠습니다.]

[No Limit]

작곡가: 댄(D.A.N)

작사가: 댄(D.A.N) & 유선아

안무가: 서계현

"여기는 서계현 멘토님이야!"

"안무 두 분이 해 주셨구나. 완전 감동……!"

이쪽 안무는 다른 댄스 멘토인 서계현이 담당을 한 그림이었다. 시작부터 리드미컬하고 격한 게 바로 앞과는 다른 흐름이었다. 전주에서 시동을 거는 듯한 엔진 소리가 들리는 게 가사의 방향성 자체는 흡사하나, 스토리라인과 풍기는 분위기가 반대다.

먼저는 고지에 도달한 자를 얘기했는데, 여기는 올라가고 있는 사람을 표현한다. 10명의 댄서가 안무를 추면서도 동선의 이동이 변칙적인 움직임같았다.

- 한계 따위는 없어

Stop the Move it

이게 바로 내 No Limit

제한은 없어 가능성의 Indicate

No Limit

No Limit

내겐 한계란 없어-

N.O.L.I.M.I.T

"…와."

"강렬하다 이거……."

"E. N. D! 할 때 진짜 멋있어!"

"두 곡 다 너무 좋은데?"

"그러게요! 안무 텐션이 완전 쉴 새 없어요. 으으, 떨린다……."

뜨거운 반응이 이어지니 이쪽은 정열적이고, 강렬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승부수를 띄우려는 패기가 느껴진다. 진짜 좋은 곡들을 잘 끌어왔네. 현직 아이돌에게 갔어도 타이틀이 될 수 있었을 퀄리티같았다.

"이렇게 대망의 파이널 미션 2곡이 모두 공개되었습니다. 어때요? 아주 멋지지 않나요?"

"네!"

스크린 영상이 종료됨과 동시에 센터로 나온 고우림이었다. 시작이구나. 의연한 척을 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본격적으로 미션에 돌입하는 구간이다.

"그럼 미션곡을 선택해 보겠습니다. 그 전에 여러분, 미니 운동회 때의 보상 기억하고 계신가요?"

"보상이라면……."

"…이거 바로 적용되는 거예요?"

시선이 이리로 집중되는 기분인 게 물론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팀이던 우정환과 윤명, 박승경과 김찬규 모두 연습생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무슨 노래를 해야 할지 결정짓지 못했는데 이런 상태에서 포커스까지 잡혀 버린 게 힘들다.

"우승 팀의 다섯 분, 앞으로 나와 주세요."

양옆에선 권혜성과 이유준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딘가 조금은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현명하게 생각하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단상 위로 걸음을 옮겼다.

우정환과 윤명을 제외하자면, 둘은 나와 비슷한 심정인 것 같았다. 혜택을 얻은 사람들의 안색이 아닌데?

"자, 지금 제 뒤로는 두 개의 패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적혀 있는 대로 왼쪽이 'Field', 오른쪽이 'No Limit'입니다. 다섯 분께서는 먼저 원하는 곡으로 이동해 주세요."

해당 패널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이 뒤에 다른 룰은 없는건가, 선택하면 그냥 끝인가 머리가 팽팽 돈다. 눈이 마주친 김찬규도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정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으로 이것도 제작진의 수법이란 걸 눈치챘다. 하여간에 쉽게 도움을 주는 법이 없었다.

"오! 우정환! 화끈하다!"

"뭐야? 둘이 다른 걸 하네?"

"반대 팀인 건 처음이지?"

그때 등 뒤가 시끄러워졌다. 당황해서 좌우를 돌아보니 우정환과 윤명이 먼저 움직이고 있다. 간이 크다고 생각한 인물들다웠는데 여기서 재밌는 이슈가 하나 발생했다. 미션부터 게임까지 단 한 번도 팀이 갈린 적 없던 둘이 처음으로 다른 방향을 택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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