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우정환 연습생은 'Field', 윤명 연습생은 'No Limit'을 선택했습니다."
고우림이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중계를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쏙 빠질 것 같았다.
마치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는 게 서둘러 마음을 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박승경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김찬규도 걸음을 옮긴다.
"박승경 연습생, 김찬규 연습생 모두 'Field'를 선택하셨습니다."
"…다 저기로 간 거야?"
"어우, 명이 외롭겠네."
"근데 나 같아도……."
…이 배신자들아.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내가 굉장히 난처한 상황이란 점이다. 5명 중 과반수가 저리로 넘어가 버렸다. 사실 타당한 사유가 깔려 있기는 했다. 다들 윤명 피해서 저리로 간 거잖아. 우정환은 단순히 선호하는 곡으로 이동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뒤의 둘은 윤명 때문인 게 정답이다.
뭐가 됐든 쟤는 강태오를 밀고 1위를 받은 인물이니까. 게다가 상승세를 보이는 게 장난이 아니었으니 나 같아도 관심도를 떠나 조금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뭉쳐 버리면 그림이 이상하잖아. 마침 오른쪽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기가 무섭다.
"이제 신해신 연습생, 단 한 명만이 남아 있습니다."
완전히 포위된 입장으로 그런 내게 고우림이 압박을 가해 온다. 모든 연습생의 집중이 쏠린 순간이기도 했다.
눈치껏 턱을 들어 올리니 윤명이 여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전부터 느껴지던 시선의 범인이다. 저게 뭐를 뜻하는 건지 알고 싶지 않은데 에라, 모르겠다…….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눈앞의 패널로 이동했다.
"…뭐야? 저기로 갔어?"
"해신이 형! 뭐예요!"
"형……."
"마지막 신해신 연습생은 'No Limit'을 선택했습니다."
옆으로는 거대한 인형이 느껴졌다. 애써 무시하며 연습생 무리를 지켜보는데 부디 내가 한 선택이 옳았기를 바랐다. 곡 자체는 둘 다 훌륭해서 고민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메인 컨셉들이 떠오른 게 전자는 칼 같은 섹시였고, 후자는 강렬함이었다.
섹시? 내가? 결론을 내리자면, 나는 강렬한 게 더 잘 어울렸다. 그래서 'No Limit'으로 결정을 굳혔다고 볼 수 있다. 남들이 들으면 이게 뭐냐고 할 법한 이유였지만 내게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소화할 걸 떠올리면 무조건 어울리는 구간을 택해야 했던 게, 아무리 생각해도 섹시는 버겁다.
"…감사했습니다."
"네?"
"음료수……."
"…아아, 네."
윤명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건 또 언제적 이야기야. 얘는 진짜 정체를 알 수 없는 게 문득 우정환과 문채민에게 들은 캐릭터가 떠올랐다.
왜 이걸 지금 기억한 걸까. 왠지 잘못된 선택을 한 기분이다.
"미션곡 선택은 간단합니다. 20위부터 원하는 곡의 패널 뒤로 이동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먼저 자리가 차 버린다면? 자신보다 낮은 순위의 연습생을 지명하여 밀어내고 들어가시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우선권을 받은 다섯 분은 제외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가 낚였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따지자면 이건 보상이 아니다. 지금까지 내 고민이 멍청한 짓처럼 느껴졌는데 우린 그저 선발대로 전시된 무리 같은 거였다. 순위만 안 밀리면 못 타도 상관이 없었잖아. 거기다 오히려 정세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진짜 주다 만다는 게 잘 어울리는 제작진이다.
우정환도 웃고 있었지만 약간 열받은 것 같았다. 미소 짓는 입가가 딱딱하게 굳어 있다. 김찬규와 박승경은 체념한 표정으로 바보 5형제가 된 걸 눈치챈 모양이다. 윤명은… 그냥 열외다. 뭔 생각 중인지 알 수 없다. 왠지 다른 연습생들에게 동정을 받는 기분이었다.
"20위 김찬규 연습생은 곡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다음으로 19위의 배민형 연습생, 이동해 주세요."
얼마 안 돼 저 애들에게도 난관이 생겼다. 지명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들어 있는 단계였다.
단순하게 팀 내 가장 아래 순위를 미는 게 아니었다. 직접 한 명을 꼽아 본인 손으로 내쫓아야 한다. 이제부턴 잔인해지냐, 불쌍해지냐의 싸움이다.
* * *
"…대박!"
"강태오 저기 갔어?"
마지막 주자인 2위 강태오의 선택으로 모두 놀라고 있었다. 쟤가 우리와는 반대편인 'Field'를 골랐기 때문이었다. 본인과도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곡이다.
"저쪽이 취향인가 보다."
"확실히 잘 어울리지?"
그것도 그건데,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더 깔려 있음을 알아챘다. 이건 1위인 윤명의 반대편으로 간 거다. 안 그래도 둘은 주목을 많이 받는 연습생이었다. 인지도도 높은 데다 실력이 월등했다.
그런데 파이널에서 둘이 같은 곡을 한다? 모든 집중이 한쪽으로 몰릴 게 분명했다. 어벤져스 타이틀은 그냥 안고 가는 셈으로 한차례 고의 편집을 당한 전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분란이나 트러블만큼은 피하고 싶었겠지.
라이벌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팀에서 비교되는 것보단 상대 팀으로 마주하는 게 나아 보였다. 차라리 그건 선의의 경쟁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까. 3차부터 깨달은 점으로 강태오도 신중하고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었다.
"이렇게 각 팀이 모두 정해졌습니다. 그럼 연습생 여러분들의 멋진 무대 기대해보겠습니다."
클로징 멘트가 나온 무렵, 스크린 위로는 구성 표가 올라가 있었다. 슬레이트 소리를 들으며 꾸려진 팀을 탐색하니 어딘가 조금은 생소한 인원수가 나온다. 6, 7인 정도의 구성에서 벗어나 10인의 멤버가 꾸려졌다. 얼굴들을 익히며 표를 읽었다.
[Field]
우정환 / 박승경 / 김찬규 / 김지혁 / 안형진 / 김호원 / 권대화 / 이유준 / 이정원 / 강태오
[No Limit]
윤명 / 신해신 / 배민형 / 조승훈 / 오은재 / 한여빈 / 김재원 / 이민석 / 문채민 / 권혜성
* * *
연습실로 이동한 무리였다. 평소보다 많은 인원에 어색한 기분이 든다. 그나마 아는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내 옆자리는 평소처럼 권혜성이 차지하고 있었다. 높은 순위에 들어 늦게 택한 순서로 이유준과 달리 이곳으로 와서 신기해했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과 어울리는 걸 고른 것 같기도 하다. 원래 안 그러는 척하면서 이해득실을 잘 챙기는 애들이었다.
"그럼, 간단하게 인사부터 나눌까요?"
"아, 안녕하세요. 오은재입니다. 21살이에요."
"저는 조승훈입니다. 래퍼고, 22살이에요."
정세 파악을 하는지 조용한 상황이 이어지니 보다 못한 이민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중에선 가장 연장자일 연습생으로 서두라도 열어 줘서 고마운 마음이다.
우선 팀원이 된 멤버들을 분석해 봤다. 초반 데이터가 중요해 보이는 과정으로 처음 보는 둘은 제외했던 게, 쟤네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여기엔 작다면 작은 문제가 존재했다. 그건 바로 리더감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구성까지 생각해야 할 줄은 몰랐지.
"…윤명입니다. 19살입니다."
"어! 나도 19살인데……! 권혜성입니다!"
"저는 배민형이에요. 18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우선 윤명, 이 애는 절대로 주도를 할 타입이 아니었다. 실력과 반비례하는 맹함을 갖고 있는 게 팀 말아 먹을 일 있나, 은연중에 화를 돋우는 재능을 지닌 인물이다. 시비가 붙지 않도록 컨트롤하는 것도 벅차다.
지금까지 우정환이 겪은 고행을 알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미안하지만 둘은 계속 붙어 있는 게 좋아 보이는 게. 얘가 있는 팀에 와 버려서 고생길이 열렸다. 가능하다면 선택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다음으로는 권혜성과 배민형이었다. 기본적으로 사회생활을 잘하는 애들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처럼 행동한 게 좋게 말해선 처신을 잘했고, 나쁘게 말하면 덤터기를 쓰지 않으려고 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도 비슷한 타입이어서 같은 식으로 방어해 왔다. 그래서 뭐라고 하지도 못한다.
"음, 저는 이민석입니다. 24살이고, 제가 제일 연장자겠네요. 하하, 잘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김재원입니다. 20살이고, 주력은 보컬이에요."
"저는 21살입니다. 이름은 한여빈이고, 랩을 하고 있습니다."
이민석은 윤명의 급발진 상위 호환이라고 판단했다. 경력직 신입인 만큼 파악은 잘했으나, 스스로 통제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잘 휘말리는 것 같은 게 본인도 그 점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첫 마디만 내뱉은 채 몸을 사리려고 든다. 하긴, 얼마 전 3차에서 그 사달을 겪었지. 운이 좋게 빠져나갔지만, 다시 반복하기는 무서웠을 것이다.
한여빈과 김재원은 이유준과다. 처음에는 권혜성인가 싶었는데 지켜보니 알 수 있었다. 적당히 발을 빼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는 아니었다. 저기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들 것이 확실하다. 이거 진짜 골치 아프게 됐어. 이렇게 되면 우리의 희망은 한 명밖에 없다.
"안녕하세요, 문채민입니다. 18살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채민, 기다리고 있었어. 쟤도 높은 순위라 늦게 들어온 인물이었다. 1차 미션을 같이하며 알게 된 점이다. 머리 회전이 비상하고, 의견 조율을 잘했다. 단호함이 있어서 이상한 건 빠르게 잘라 낼 수도 있었다. 조별 과제의 조장으로는 그냥 타고난 인재다. 하지만 이런 애도 이번 단계에선 벽에 막혔다. …18살.
이 인원을 혼자 통제하기엔 너무 어리다는 거였다. 카리스마는 있었으나, 조심해야 할 일로 팀 내에는 현직 아이돌인 이민석이 들어와 있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완전한 막내 포지션이다.
헤드급이 없다고 해서 함부로 나서면 안 될 것 같았다. 잘못하면 여론이 뒤집어져 욕을 들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똑똑한 애니까 이건 전부 알고 있을 것 같긴 하다. 섹시고 나발이고 'Field'로 가는 거였는데 뒤늦은 후회로 속이 쓰렸다. 마지막까지 쉽게 가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형! 소개요!"
"아, 아… 죄송합니다. 신해신입니다. 22살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형도 참~ 정신 차려요~"
"해신이 형은 저게 매력이야."
"……."
권혜성의 부름에 퍼뜩 대답했다. 흐름을 정리하는 사이에 모든 턴이 돈 것 같았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는 게 머쓱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관자놀이를 긁적이자 권혜성과 배민형이 장난을 친다. 상황을 풀려고 돌리는 모양새인 게 역시 눈치만큼은 기똥찬 애들이었다.
다른 쪽으로도 힘내 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거기에는 발을 들이지 않을 게 분명하다. 공과 사가 확실한 유형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