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92화 (92/328)

92화

"추천해도 되나요?"

"…어?"

적막 속에서 손을 든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문채민이다. 너… 설마……. 왠지 모르겠지만 불길함이 엄습했다. 옆에 앉아 있던 윤명이 얼핏 웃은 것 같기도 한데.

"신해신 형을 리더로 추천합니다."

"와학!"

"대박!"

"오……."

나와 같은 팀을 해 본 적 있는 연습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권혜성을 비롯해, 배민형과 한여빈까지 큰 리액션을 보여 준다. 순간 내가 뭘 들은 건가 싶어 귀를 매만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니, 팀원 전원이 낄낄거리기 시작한다.

"…난 찬성."

"윤명, 너……."

"뭔가 잘해 줄 것 같아……."

"맞아요! 해신이 형, 매번 도망다녔죠? 이번엔 못 빠져나가요~"

긴 팔을 쭉 들어 올린 윤명이었다. 특유의 느긋한 말투로 의견에 힘을 실어 주는 게 권혜성이 장난치듯 사족을 붙여 온다. 두 번이나 같은 팀을 하며 내 행동 반경을 전부 본 인물이었다.

뒷통수가 얼얼하다 못해 입이 떡 벌어졌다. 나름 챙겨 준 애가 나를 사지로 내몰고 있었다. 권혜성의 눈치가 빠른 건 기정사실인 점으로 내가 헤드 자리를 의식적으로 피했단 걸 밝혀 버린 상황이다. 완전 막다른 골목길이잖아.

"확실히… 해신아, 너 이런 것 잘할 것 같긴 하다. 지금만 해도 봐. 임시지만 어쩌다 보니 네가 다 진행했잖아."

"그, 민석이 형? 저보단 형이 더 잘하실 것 같은데……."

"으음~ 아니야. 전 신해신 연습생이 팀 리더 하는 것 찬성인데, 다른 분들은 어떠세요?"

"좋아요!"

"뭔가 지금까지 쭉 해 주셔서, 이대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안정적이다! X몬스 침대 리더 신해신~!"

"혜성아, 넌 이따 나 좀 보자."

이렇게 되면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어드바이스 해 주려고 자원했던 초반 진행이었다. 뒤에 가선 문채민을 밀어주려고 힘을 키운 거였는데 믿었던 애가 배신 루트를 타 버렸다. 윤명, 문채민, 우리 같은 편이라며. 쟤네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한순간 몰이당해 리더 자리를 떠맡게 됐다.

큰일이야. 와해라도 발생하면 손해를 볼 예정으로 긴장이 되어 토할 것 같았다. 간신히 결심을 다잡은 상태에서 팀원들이 미워진다. 이게 업보인가, 문득 나로 인해 리더를 맡았던 문채민과 강태오가 떠올랐다. 미안하다……. 이제라도 사과할게. 전부 자업자득이었구나.

* * *

SNS 계정 운영 겸 간간이 사진을 찍던 사람이었다. 정식 홈은 안 했으니까, 홈마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전 본진 그룹이 계약 만료로 흩어졌다. 후배 그룹이 잘나가서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였다. 푸시를 안 해 주길래 이럴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속이 쓰린 듯했다.

그 와중에 파던 멤버가 배우 기획사로 이적했다. 쟤도 가는구나. 내가 좋아하던 가수로서의 모습은 이제 보기 힘들 것 같았다. 내 오랜 덕질의 대상이자 정체성이 사라져 길을 잃고 방황하던 찰나였다.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유어돌을 추천해 줬다. 그래, 이젠 할 일도 없는데 그거라도 보자. 이게 시작이었다.

거기서 얘를 찾아낸 건 정말 우연이었다. '신해신'. 프로그램 내 특이한 캐릭터라며 종종 보이던 연습생이다.

처음엔 그냥 골 때리는 앤 줄 알았던 게 빡세게 생겨서 호구에 가까운 인성을 지녔었다. 엔터 소속도 아니고, 연예계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실력이 안 되는데, 성격으로 인지도를 얻은 줄로만 알았다.

내 픽은 아니겠네. 나는 무대 위에서 빛나는 사람을 좋아했으니 얘는 아닐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에 나는 이 말을 전면 취소했다.

4화를 보고 난 뒤의 일로 …어라? 얘 왜 이렇게 잘해? 신해신은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 줬다. 아니, 그걸 떠나서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뜨게 해 줬다. 밸런스 좋은 실력과 희소성 있는 외관에 어리숙한 행동과 태도가 매력처럼 느껴졌다. 똑똑한 듯 허술하고, 부족한 것 같은데 놀라운 면이 있고. 아무튼 정말 예측이 되지 않는 유형이었다. 이 때 알게 된 점은 내가 신해신에게 감겼다는 거였다.

본진이 있던 탓에 조금은 늦은 입덕이었다. 서둘러 넣은 방청 신청도 떨어지기가 부지기수였다. 몇 안 되는 오픈 이벤트는 모두 끝난 상황으로 이게 바로 덕계못인가. 모니터만 붙잡고 한숨을 내쉬던 매일이었다.

그러다 엔넷에 올라온 공지 하나를 발견했다. 파이널을 앞두고 대면식을 거행하겠다는 소식으로 이걸 놓치면 카메라를 내려놔야 한다며 악에 받쳐 결심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간절하게 빌었던 덕분일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실물로 본 신해신은 정말 미남이었다. 일반인은 일반인이라며 욕을 먹은 전적이 억울할 정도였다. 목격담만 봐도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백 번, 천 번 공감한 하루로 작게 손을 흔들며 모두를 둘러봤다.

어색해 보였지만 열심히 하는 게 괜히 뭉클해져선 저도 모르게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해신아!' 동그랗게 떠진 눈에 놀랐는지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아무래도 홈마를 처음 보는 모양이다. 안쓰러운 마음에 더 열심히 셔터를 누르자 그걸 본 신해신이 활짝 미소 지었다. 덕계못? 당장 내다 버려야지. 이것만큼은 제대로 탄 계라고 장담했다. 오늘 내가 너의 인생 컷을 건져 줄게. 사진 인생 중 톱급으로 열의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여간에 어딘지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인물이었다. 음, 물론 저것도 공인으로서 가져야 할 능력이지.

정신없이 촬영을 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카트 한 대가 나타났다. 공지에서도 본 적 있는 예의 그 꽃송이 이벤트였다. 최애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이쪽은 이미 난리통에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저기 내 꽃이 웃고 있는데 선물이 무슨 상관이람. 무너지는 자세를 견디며 렌즈를 바짝 조였다. 뷰파인더 안에는 오로지 신해신만이 가득 했다.

연습생들이 다가오며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목표물의 동선에 따라 내 시선도 이동하고 있었다. 꽃을 나눠 주던 신해신이 갑작스럽게 몸을 멈추다 반대편에서 오던 사람과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어, 쟤는… 부동의 1위로 유명한 강태오다. 최애를 보느라 정신없었지만, 얼굴만큼은 정말 인정하는 연습생이었다. 그때, 시야 안으로 두 명이 가득 들어온 게 머리가 돌아가기도 전에 손가락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본능적인 감각의 행동으로 그간의 경력이 나를 대박의 길로 인도해 줬다.

갑작스러운 플래시에 놀랐는지 여길 돌아본 둘이 보였다. 엄마, 나 계 탔어. 그것도 두 번 탔어. 그 결과물이 바로 이거였다.

"와, 건졌다."

손을 들어 입가를 틀어막았다. 듀얼 모니터 중 한 대에는 연사의 증거인 파일이 가득했다. 반대편 모니터에는 사진이 한 장 켜져 있었는데 그건 미남 둘이 여길 돌아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해신이가 왜 외모로 말이 없었지?"

최애라도 강태오보다 잘생겼다고 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상당한 미형이다. 손에 들린 붉은 장미꽃이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안 그런 척 은근히 합이 맞는 타입이었다.

둘 다 연습생 사이에선 큰 체구로 돋보이는 게 키 차이는 조금 있었지만, 골격이나 이미지로는 같은 계열이었다. 그게 은근히 위험한 냄새를 풍겨서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성격을 배제하고서 외관만큼은 느와르 계열인 둘이다.

"그래서 더 좋아."

신해신도, 강태오도 무른 걸로는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전자는 그냥 물렁했고, 후자는 안 그런 척 져 주는 걸로 회자되곤 했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이 사진과 함께 올릴 멘트는 색다른 걸 구상했다. 나는 이 둘의 케미를 극대화해 볼 계획이었다.

"우선 보정부터 하자."

오랜만의 작업에 익숙한 프로그램을 켰다. 현장의 생생함을 살리는 게 관건이다. 용량이 크더라도 로우로 작업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채도는 너무 높지 않게 조정했다. 대비도 자연스럽게, 화이트 밸런스는 둘의 피부 톤이 어그러지지 않는 선에서 부드럽게 맞췄다. 선명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는 것 같았는데 손에 들린 장미도 조화롭게 느껴졌다. 최종본에 가까워질수록 입가에 띤 미소가 짙어졌다. 인생 역작의 탄생이다.

* * *

잠시 갖게 된 쉬는 시간이었다. 얼떨결에 쓴 감투로 머리가 아프다. 암담함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니 배민형과 권혜성이 다가와 옆에 앉는다. 이 배신자들…….

"에이, 형~ 잘할 거면서."

"맞아요! 삐진 건 아니죠?"

지쳐보이는 행동의 내가 웃긴 모양이었는지 뒤편에는 문채민과 윤명도 서 있었다. 이 상황이 재밌다는 마냥 낮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의 투표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잘하지 못할 것 같으면, 남에게 넘기는 게 정답이지. 하지만 이건 다른 케이스로 오래 알고 지낸 애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었다. 대다수는 거의 붙어 다니던 애들로 인생 헛산 기분이다.

"저리 갈 거 아니면 조용히 하자. 특히 권혜성, 문채민… 너네는 괘씸죄 추가야."

"와, 난 괜찮은가 보다~"

"배민형, 너도 똑같거든."

"…음료수 사 줄까?"

"……"

한숨을 푹 내쉰 뒤 손을 내리고 주변을 돌아봤다. 쉬고는 있다지만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현장이었다. 캐릭터성 이미지는 그만 소비해야 할 타이밍이다. 장난도 딱 1절까지만 해야 했는데 장난이 아니라서 더 심란하다.

"이렇게 된 것, 열심히 해야지."

"그래요. 형, 잘할 걸 알아서 추천한 거예요. 믿으니까 맡긴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래, 채민이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문채민에겐 1차 미션에서 진 빚이 있었다.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다고, 그때 이용한 값을 갚아야 했다. 이게 업보지, 뭐가 업본가.

"와, 해신이 형. 채민이만 봐주고!"

"됐어. 가서 연습부터 해. 며칠 뒤에 센터 평가 하는 건 잊었어?"

"아, 맞다. 그럼 전 먼저 가서 안무 좀 따고 있을게요~"

"어? 혜성이 형, 나도 같이 가!"

유하게 웃어도 최종장에 돌입한 상황이다. 안 그러는 척 상기시키니 댄서 둘이 달려 나간다.

사실 쉬는 시간 전, 제작진으로부터 듣게 된 공지가 있었다. 이번 무대는 별도의 센터 평가를 진행한다는 소식이었다. 파트 분배는 하되, 곡의 중심은 경쟁으로 얻어 가야 했다.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지정받아 영상을 촬영했다. 멘토들과 팀원 내부 투표를 통해 최종 센터를 확정을 짓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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