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일단 나도 여길 노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공정한 방법이라 잘된 일이라고 확신했던 게 멘토들은 모든 걸 배제하고 오로지 실력과 이미지만으로 선택했다. 이건 전체에게 골고루 기회를 준다고 볼 수 있었다.
피디 픽이란 게 없진 않았지만, 남현욱은 이런 데에선 사람을 밀지 않았다. 이 인간이 건드는 곳은 오로지 방송 내 편집 분량이었지. 그것도 자기가 봐서 재밌어 보이는 캐릭터면 기용해 주곤 했던 게 떠오른다. 잘려 나가는 건 오로지 흥미롭지 않은 인물뿐이다.
미묘하게 건드리는 걸 빼면 타고난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 구간이었다. 싸움이 난 장면을 내보낸 일도 직관적으로 봤을 땐 팩트만 담아 놨었다.
황 PD의 매운맛 조미료가 조금 쳐졌지만, 그걸 빼면 없는 걸 만들진 않았다. 하여간에 나쁜 건지, 착한 건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앉아 있던 곳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니 나를 보던 문채민과 윤명이 말을 걸었다.
"어? 아직 쉬는 시간이잖아요."
"15분 있다가 모인댔는데……."
"디테일이라도 먼저 따고 있게. 너넨 더 쉬어."
둘을 놔두고 대형 거울 앞에 다가갔다. 주변에는 안 그러는 척해도 나와 같은 애들이 많이 있었다. 먼저 달려 나간 권혜성과 배민형도 그중 하나였다. 지정 파트의 동선을 훑는 게 훤히 보인다.
나도 밀릴 수는 없지. 돈을 떠나 마지막인 만큼 최선을 다해 보겠다는 건 진심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봐야 한다.
* * *
"……."
좋은 포지션을 노리고 있는 터라 과하게 연습했다. 덕분에 평소보다 2배는 더 힘든 것 같았다.
"해신이 너, 완전 뻗었네."
"형은 괜찮아요?"
"나? 아니, 나도 좀 힘들어. 서계현 멘토님 안무답더라. 동작이 엄청 많던데. 동선 이동도 쉴 새 없고, 라이브… 각오 좀 해야겠어."
숙소로 돌아온 상황에서 지친 얼굴로 침대에 자리했다. 상대 팀은 우리보다 늦게 출발한 것 같았으니 아직 이유준이 보이지 않는다. 멀지 않은 위치의 이민석과 대화를 나눴다.
장난을 쳤지만 고된 하루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내게 파트를 뺏겼으면서도 제법 담담한 안색이다. 격하던 감정은 3차 사건 때 이후로 갈무리한 것 같다.
하긴, 그건 본인에게 가장 좋지 못했으니까.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안쓰럽다가도 내 코가 석 자란 사실이 상기됐다. 굳이 따지자면 누군가를 동정할 처지는 되지 못한다.
"…어? 제가 마지막이에요?"
"왔어? 늦게까지 했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이유준이 들어왔다. 느긋하게 인사했지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터덜터덜 걸어 들어와 본인 침대 인근 바닥에 주저앉았다.
"공용 욕실 안 가? 저긴 지금 채민이가 쓰고 있어."
"오는 길에 들렀는데, 사람이 많더라고요. 차라리 여기가 나을 것 같아서요. 채민이 언제 들어갔어요?"
"음, 한 5분 됐나……."
"그럼 여기가 낫겠네요."
캐리어를 열어 물품을 챙기는 이유준이었다. 목을 돌리는 게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쟤네 팀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따지고 보면 경쟁은 팀 안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10명이 들어 있는 'Field'도 마찬가지였다.
옆에 있던 이민석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나를 한번 돌아보더니 이유준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유준아, 너넨 잘되는 것 같아? 거기도 노래 좋더라."
"아… 네, 워낙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맞아, 너 아는 애들 많이 있겠다? 정환이랑 정원이도 거기 있지, 3차에서 같이했던 강태오 연습생도 합류했고."
은근슬쩍 리더의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호명했다. 누가 그 자리를 차지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헤드를 잡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 판이 갈릴 게 분명하다. 탐색을 할 요량으로 떠 본 거였다.
"네, 셋 다 여기예요. 그러고 보니까 신기하네요……."
"뭐가?"
"해신이 형이 말해 준 세 명이요. 그 셋이 딱 저희 팀 리더 후보였거든요."
"…그래? 그냥 인연이 있는 사람들 말했을 뿐인데, 신기하네……."
이유준, 진짜 눈치만큼은 비상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식은땀이 날 것 같다. 그런 내 반응에 이유준이 길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저런 걸 보면 전부 알아챈 거다.
궁금해하는 걸 알면 그냥 좀 말해 주면 될 걸, 하여간에 여러모로 비밀스러운 타입이었다. 기묘한 분위기에 이민석이 어색하게 웃는다.
"하긴, 그 셋이 미션마다 팀원들 이끄는 포지션을 자주 했지. 그래서, 유준아 누군데? 말 좀 해 줘."
"음… 형들 먼저 얘기해 주시면요."
"난데. 왜."
"…어? 진짜요? 'No Limit' 팀은 해신이 형이 리더예요?"
이유준의 눈이 크게 떠졌는데 챙기던 짐마저 내려놓은 게 많이 놀란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나. 가슴팍 위로 손을 올리며 서운하단 제스처로 이유준을 몰았다. 이건 아까 전 나를 갖고 논 것에 대한 복수다.
"왜, 이상해? 나 서운하다. 나름 투표로 정한 건데."
"아뇨. 그건 아닌데 신기해서요. 잘할 것 같기는 했는데, 형이 먼저 하겠다고 할 성격이 아니니까요……."
"안 그래도 해신이, 추천으로 하게 된 거야. 자원 아니야."
"…민석이 형."
이민석이 시원하게 내 등을 두드렸다. 아까의 기억으로 입안에 쓴맛이 감도는 듯하다. 이야기를 들은 이유준이 이제야 모두 이해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러는 척 쟤도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채민이랑 혜성이한테 당했어."
"…큽."
"웃지 마."
"그래도 잘됐네요. 형, 그런 건 엄청 잘할 것 같은데."
"그랬으면 좋겠다. 아, 이야기 돌리지 마. 우리 팀 얘기해 줬잖아. 너네도 얼른 말해."
"아아, 알았어요~ 저희 팀은 정원이 형이에요."
항복하겠다는 듯이 입을 연 이유준이었다. 우정환도 잘했으나, 걔 역시도 너무 막내 포지션이었다. 그래서 남은 둘 중의 하나가 맡을 것 같다고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이정원이란 건 조금 의외이다. 강태오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계산했더니 이정원이 스스로 지원한 건가. 물러서지 않는 성향을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강태오라면 흔쾌히 동의해 줬을 일이다. 아무튼 저기는 스파르타일 듯했는데 이유준의 지쳐 보이는 얼굴이 전부 이해가 됐다.
* * *
[신해신]
나이: 22
외모: A
보컬: A
댄스: B+
운: B-
끼: A
정보: 플레이어
이벤트: '당신의 아이돌, 그 시작' 진행 중
[보유 스킬]
'한번 보면 잊지 못해(F)' - On
'부릉부릉 운전기사(E)' - On
'저세상 귀염둥이(D)' – On
'가위바위보의 신(B)' – On
'폼生폼死(B)' - On
[현재 코인]
415 코인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보이는 상태 창은 변화한 수치값을 갖고 있었다. 연습을 핑계로 해금법 미션을 끝낸 날이다. 센터 평가 전에 마무리 지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단체 연습 바로 전에 개인 동작을 가다듬는 시간으로 얼떨결이지만, 우리 팀의 리더는 내가 맡게 된 일화가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분쟁 없이 잘 이끌고 싶었다. 불안한 곳이 있으면 지켜보며 진땀을 흘리고 의견 조율이 안 되는 사람들 옆에선 실없이 웃으며 분위기를 무마했다.
진짜 누구 좋으라고 이러고 있는 건지. 극심한 손해를 입은 기분으로 간신히 이런저런 위험들을 넘겼다.
"혜성아, 여기서 팔 돌릴 때 스텝이 같이 나가야 해?"
"네, 원, 투! 할 때 오른쪽 다리가 움직여야 해요. 형은 조금 더 틀어야 할 것 같은데요?"
아까 내가 생고생하던 걸 지켜보던 권혜성으로 안무를 도와주는 걸 보면 양심은 있나 보다.
"…덜 들어갔어."
"뭐야."
"…여기 더 숙여야 하는데."
"명이 너였어?"
방심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 내 어깨를 눌러 왔다. 취하고 있던 포즈에서 그대로 당황스러워 돌아보니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땀을 잔뜩 흘린 윤명과 문채민으로 담담한 안색을 한 채 내 자세를 고쳐 주기 시작했다. 그런 윤명의 뒤에선 문채민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두번째 근원, 너도 왔구나.
"아~ 뭔가 어색하다 싶었는데 이거 때문이었구나."
"…너랑은 체형이 달라서, 같은 동작으론 균형이 안 맞아."
"음, 각도를 더 챙겨야겠네. 땡큐."
그러고 보니까 이 둘은 동갑이었지. 스타일이 전혀 달라 잊고 있던 사실이다. 언제 말을 놨는지 제법 편한 대화가 이어졌다. 한쪽은 과하게 활발하고, 한쪽은 과하게 넋을 놓고 다녔다. 특이한 조합이다 싶어 문채민과 이야기 나누는 게 따지고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긴 하다.
"쟤네는 언제 친해졌어?"
"저도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죽은 잘 맞죠?"
"일단?"
둘 다 내용물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햇살 광인인 권혜성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수를 잘 쓰는 편이었고, 천진한 인상의 윤명은 본능적인 행동과 달리 이성적인 머리를 지녔다. 최종장까지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존재하는 법이다. 어디 가도 적응할 애들이야.
"그래도 너네, 나한테 미안하긴 한가 보네? 이렇게 도와주고."
"형은 안 그런 척하면서 뒤끝이 길잖아요. 그래서 미리 아부하는 건데요."
"혜성아, 넌 진짜 나랑 면담 한 번만 하자."
"형은 맨날 면담하재……."
"……."
"혜성이 형, 이제 보니까 매를 버는 타입이구나."
"문채민 너도 너무해……. 말하는 게 유준이 형이랑 똑같잖아……."
"알고 지낸 지 오래됐으니까 그럴 수밖에."
내가 편해지긴 한 것 같았다. 맥락을 알 수 없는 대화에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집중해야 하는 건 거기가 아니니까. 이따 다 같이 센터 평가를 위한 동선을 맞춰야 했다. 하이라이트만 돌아가면서 10번을 찍어야 한다는 소리다. 고개를 내젓다 다시 거울을 돌아봤다. 비쳐 오는 장면에서는 모두가 노력하고 있었다.
* * *
"이제 녹화 시작해 볼까요? 가장 먼저 누구부터 하실래요?"
팀원 전부가 모인 가운데였다. 방금 전까지 흘린 달아오른 혈색들이다. 경쟁이 치열할 거라는 암시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없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