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래서 그런지 쉽게 나서려는 인물이 없었다. 확실히 먼저 해 버리면 불리한 상황이다. 이런 건 중반쯤이 가장 좋았던 게 남들의 실력도 체크할 수 있으며, 기운이 너무 빠지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가장 뒤는 반복된 안무로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하호호, 평화로운 척을 했지만 실상은 꽤 치열하다.
"그럼, 제가 먼저 할까요?"
리더란 건 이럴 때는 양보를 해야 탈이 없는 위치였다. 내가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개중에는 의외라는 표정의 연습생이 많이 있었다. 너무 순순히 나서 주니까 신기한 듯하다.
손해를 보더라도 평화를 지킬 수 있다면야……. 내가 문제랑 사건을 회피하려고 드는 경향이 강하긴 하지. 한 걸음 정도는 기꺼이 물러서 줄 수 있었다.
물론 파트는 열외다. 처음 한 걸 떠나서 할 수 있는 건 다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아직도 난 센터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었다.
"…형, 내가 먼저 할게."
"어? 네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윤명이었다. 손을 들어 올리며 앞으로 나섰는데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나와 주면 고마울 일이다.
혹시 리더를 떠넘긴 것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있었나? 설마, 말도 안 돼. 문채민도 아니고, 그 윤명이었다. 그냥 변덕이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야 상관은 없다만……."
포지션도 가장 핵심인 메인 보컬이다. 다른 팀원들은 얘가 처음으로 나서서 좋은 모양이었다.
"난 좋아. 명이 순서면 내가 이 자리던가."
"저도요~ 형이 거기면… 제 자리는……."
"그럼, 대형부터 잡자."
묵묵하게 자기 위치로 이동하는 윤명으로 그에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무리 지어 움직였다. 삼각대에 세워 놓은 카메라 앞에서 정해진 대형에 맞춰 상주 스태프에게 신호를 보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센터에 서 고개를 드는 윤명의 눈빛이 바뀌어 있다. 역시 1위는 1위다, 이건가. 마른침을 삼키며 내 포지션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변이 없는 한, 다음 차례는 나일 것이다.
* * *
"엇, 죄송해요! 실수했어요!"
"으아… 또……?"
"아~ 승훈이 형~"
"…후."
"…다시 가면 되는 거죠?"
…큰일이다.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분명 초장까진 잘 나가고 있던 녹화였다. 윤명의 순서에서는 원 샷 원 킬로 촬영을 마무리 지었다. 데뷔조 후보다운 공격적인 행보였던 게 저 포지션에서 단체 연습을 해 보지 않았음에도 강한 존재감을 발산했다.
다른 걸 떠나서 본인이 정도를 조절할 줄 아는 게 중간 이상을 넘어가면 버거워질 연습생들이다. 그걸 위해 앞에서 빨리 끝내 준 뉘앙스였지. 순 제멋대로인 줄 알았는데, 의외인 면이 있어 놀랍다.
일부는 양보를 해 준 경향이 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 노선에 합세했다. 예정했던 것처럼 두 번째는 나로 정해진 게 이를 악물고 하면 앞에서 하나, 뒤에서 하나 별 차이는 없을 듯했다. 내 것에만 집중하자. 딱 이 마음가짐이었다.
눈에 힘을 주며 준비했다. 첫 시작은 한쪽 무릎을 꿇고 접어 앉은 자세였다. 날 중점으로 둥글게 서 있는 연습생들이 느껴졌다. 가 보자.
인트로에 맞춰 숙인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뒤는 윤명과 비슷한 진행이었다. 잘 해냈는지 은근한 감탄사를 들을 수 있었다. 안 그런 척해도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던 포지션이었다.
그렇게 내 뒤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졌다. 주춤거리는 모두를 물리고, 권혜성이 나선다. 아직 초반이었지만 굳이 뒤로 빠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메인 댄서를 할 수 있는 스탯과 재능의 인간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타이트한 공기가 짙어졌다. 문채민까지 알고 있던 애들이 지원하기 시작한 곳이다. 초반은 완전히 넘었다고 볼 수 있는 지경이었다. 슬슬 힘이 부칠 만하지. 여기선 더 뒤로 가는 게 손해다.
다섯 번째부터는 먼저 하고 싶어 난리인 느낌이었다. 얘네는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것 같다.
이래서 리더가 부담스럽단 거였다. 카메라에 찍히고 있는 장면을 위해서라도 남은 사람들을 모았다.
그러곤 모두가 잘 아는 공정한 방법을 제시했다. 바로 가위바위보다. 그렇게 정해진 순서가 이거였다. 먼저 끝낸 우리를 제외하고, 김재원, 조승훈, 배민형, 이민석, 한여빈, 오은재 순이었다.
김재원까지는 괜찮은 상황이었다. 본인은 조금 아쉬워했으나 나쁘지 않은 퀄리티로 영상 촬영을 끝냈다.
문제는 바로 다음인 조승훈이었다. 김재원과 동일하게 중간을 차지한 승리자이다. 뭐, 그런 걸론 따지고 들기도 애매한 시점이지. 그렇게 나쁜 사람들도 아니었으니, 적당히 웃어 넘겼다.
하지만 조승훈이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촬영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은 구석이 생기면, 실수한 척 몸을 멈추는 거였다. 이건 누가 봐도 재촬영을 위한 포석이다.
물론 센터가 걸려 있으니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파이널까지 온 이상 전력을 다하고 싶어 하는 건 존중해 줬다. 하지만 이건 정도를 지나쳤다. 벌써 5번째다. 초장에서 끊은 것도 아니고, 거의 완료된 파트에서 발을 멈췄다.
이렇게 되면 남은 4명이 엄청나게 힘들었다. 아직 본인 분량을 찍지도 못했는데 기운이 다 빠졌을 일이었다. 처음엔 인자하게 봐주던 연습생들이었는데 그것도 티가 나게 반복하니 표정들이 굳어 갔다.
특히, 마지막 순서인 오은재는 열받은 것 같았다. 자신보단 형이라서 참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그것도 이내 눈에 띄게 술수를 부리니 짜증이 난 표정이다.
"…정 안 되겠으면, 배민형 연습생부터 하는 게 어때요?"
"…네?"
오은재가 조승훈에게 말을 걸었다. 좋게 둘러 표현했으나, 저건 그만하라는 얘기였다. 조승훈도 알아챌 수밖에 없는 적나라한 신호다. 그에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손을 들어 이목을 집중시키니 이래서 감투를 쓰고 싶지 않단 거였다.
"다들 지치셨죠."
"…해신이 형?"
"아직 반밖에 못 찍었는데, 기운이 많이 빠진 것 같아서요. 기왕이면 최상의 퀄리티로 승부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저희 10분만 쉬었다가 진행하죠. 시간은 좀 늦었지만 오늘 안에만 완료하면 되는 부분이잖아요. 괜찮을까요?"
등을 돌려 녹화를 담당하고 있던 스태프에게 질문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했는지 주변을 돌아본다. 늦은 밤이라 감시역은 팀당 한 명꼴이었다. 다이렉트로 명령을 내릴 상관이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애초부터 정해진 일정은 오늘 안에 촬영본을 제출한다는 거였다. 그걸 노려 말을 거니, 이어 마이크를 통해 무전을 건다. 잔머리를 써서 그런지, 대강 수는 통한 것 같았다.
스태프 측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그럼 그렇지, 룰은 어기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남현욱은 도리어 이걸 재미있어 할 양반이었다.
어떻게 편집될지가 두려웠지만 싸우는 것보다 최악은 아닐 게 분명하다. 내 회심의 응급처치가 통한 것 같았다.
오은재의 구겨져 있던 미간이 풀렸다. 한숨을 내쉬던 이민석도 여길 돌아봤다. 잘했다는 뜻이었는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을 저어 모두를 주변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다들 가서 한 김 식히고 오길 바랐다. 특히 조승훈 너… 저 애는 두 김 식혀야 한다. 촬영을 재개할 무렵에는 욕심부리지 못하게 잡아야 할 것 같았다.
"10분 있다가 다시 모입시다! 정확하게 11시부터 시작할게요. 그리고 오늘 안에 제출해야 하니까, 남은 연습생분들은 시간 분배해서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그래도 모자라면 뒷부분으로 빠져서 다시 찍는 식입니다."
"…네? 네……."
"좋아요!"
"그래."
"찬성~ 전 좋습니다."
조승훈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쉴 새 없이 이어 버리니, 휩쓸린 기색이 강하다. 그에 다른 팀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들 제발 선은 지키자.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경련했다. 바로 옆에 있던 문채민에겐 훤히 보일 얼굴이었다. 때마침 내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두어 번 토닥이는 게 마치 고생이 많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거 다 너 때문이거든. 윤명과 권혜성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연습실을 돌아봤다. 역시 먼저 맞은 매가 나은 법이다.
* * *
간신히 영상 녹화를 끝낸 참이었다.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이 더 지쳐 있었다.
전달된 영상은 바로 멘토들에게 넘어갈 예정이었다. 거기서 1차로 후보군이 정해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보군은 다시 팀원들의 다수결을 통해 선택을 받아야 했다.
복잡하지만 이것만큼 공정한 사안이 없으니 여기에 대해선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이만 해산할까요? 결과가 나오면 정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좋아요~"
"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인사드릴게요."
"고생했어."
시간도 아주 늦은 무렵이었다. 어차피 센터가 정해지지 않으면 진도를 나가기 힘들다. 땀으로 엉망이 된 팀원들이 몸을 일으켰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제 무리끼리 흩어진다.
대절 버스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한 번씩 사람을 태워 갔다. 아직 여유가 있어 느긋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그나저나 옆의 팀은 잘하고 있으려나. 문득 호기심이 드는 게 견제보다는 그저 궁금한 심경이었다. 저기도 우리와 같은 포맷을 진행했을 것이다.
"형, 유준이 형은 아직 연습하고 있을까요?"
"글쎄."
권혜성이 불쑥 다가와 질문했다. 배민형은 먼저 보냈는지 혼자인 모습이었다. 하여간에 진짜 탐색이 빨랐다. 내 속을 훤히 읽고 있는 느낌이다.
"…거기, 아직 연습하던데?"
"그거 어떻게 알았어?"
"화장실 가면서 지나갔는데… 음악 소리가 들려서……."
자리를 비우는 인물들과 달리 버티고 앉아 있던 윤명이었다. 지쳐서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더니 여기에 끼려고 대기했던 뉘앙스이다. 쟤가 붙는다면, 그 옆으론 당연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우정환의 뒤를 이은 윤명 전용 컨트롤러 문채민이다.
"단체 군무 디테일 맞추는 중인 것 같은데요? 동선은 지금 불가능하잖아요."
"그렇겠지. 정원이가 리더라고 들었는데… 역시 꼼꼼하네."
상주 스태프는 우리가 흩어짐과 동시에 사라졌다. 하지만 구석에 설치된 카메라는 모를 일이었다. 나가기 직전에 한 번 만지는 걸 확인했으니 다른 애들은 저게 녹화를 중단시킨 거라고 생각할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