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그럴 리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다. 제작진은 늦게 나갈 연습생들이 있을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종료하는 척하고 촬영을 이어 간 상황이다.
옆에 보이는 불빛은 카메라를 끄면 보이는 컬러였다. 하지만 저건 스티커다. 나도 시즌 4때 해 본 적 있는 일이었라 잘 알았다.
트레이닝이 마무리된 이후에 해산하는 시점이었다. 연습생들이 가장 방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대다수가 빠져나가도 몇 명은 걸리기 마련이다.
남현욱은 이 부분을 제일 좋아하는 인간이다. 여기선 평소보다 좀 더 솔직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되게 험악한 대화가 오가진 않았지만, 꽤 쏠쏠한 대목들이 나오는 편이었다. 상대 팀을 얘기하면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던 이유다.
"나 뭐 찾아보고 싶은 자료가 있어서 휴게실 가 보려고. 너희 먼저 들어 갈래?"
저기서 공격적으로 나선다면, 여긴 방어를 하면 될 일이지. 제작진에게 당한 게 많아서 별로 좋은 일을 해 주고 싶지 않았다. 빠르게 연습실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음, 네~ 저는 먼저 가 있을게요! 오늘은 좀 피곤해서요."
"…그럼, 나도."
"어, 형 PC 보러 가시는 거면 전 같이 갈래요. 명이 형, 혜성이 형 둘이 먼저 가요."
"그렇지 뭐~ 가자, 윤명."
"…응. 이따 만나."
내 말에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권혜성과 윤명이다. 우선 입으로 사달을 낼 둘을 처리했다.
사실 그렇게 찾아볼 자료는 없었는데 거긴 정말 카메라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쉬려면 여기보단 거기가 제격이다.
가는 길목에는 상대 팀의 연습실이 붙어 있었으니 제작진의 감시도 피하고, 이정원네도 확인하고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다.
문채민 얘가 따라붙은 건 의외의 일이었다. 지쳐 보여서 쟤네랑 같이 들어갈 줄 알았더니 말간 얼굴이 여길 쳐다보고 있다. 이만 이동을 해 보자는 의미 같았다.
쟤는 진짜 찾아보고 싶은 게 있었나. 뒷통수를 긁적이며 뒤를 따라갔다.
* * *
"아까 연습하던 음원, 가이드본이었죠?"
"어, 곡 선택할 때 들었던 보컬리스트분 목소리였어."
"지나가면서 파트 확인이라도 해 보려고 했는데… 힘들겠네요."
"어쩔 수 없지, 뭐."
방금 전을 떠올리며 문채민이 말했다. 오는 길에 이정원네가 연습하고 있을 방을 지나갔다. 얼핏 들리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재수가 좋으면 목소리로 파트라도 구분할 수 있을 일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연습하고 있던 음원이 처음에 전달받은 가이드본이었다. 우연인가 싶다가도, 리더를 하게 된 사람의 성향을 생각하니 아닌 것 같았다.
견제에 대한 방어군. 염탐하는 게 목적은 아니었으니까, 별생각 없이 PC를 뒤적거렸다. 그냥 시간이나 때우다가 셔틀에 맞춰 움직일 예정이었는데, 문채민이 찾아볼 게 있다고 말을 덧붙여 시늉이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근데, 넌 뭐 찾아보려고?"
"여론 체크요. 외부에 있을 때는 우정환이랑 자주 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팀이 갈려서 혼자 해 보려고요."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트레픽에서 이런 것도 교육해?"
"네?"
"진짜 이유준이랑 똑같네."
"그 얘기 혜성이 형한테도 들었는데요."
"트레픽 애들 하는 행동이 비슷해서. 이제는 좀 무서울 지경이야."
"그래요?"
가볍게 웃어 넘긴 문채민이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인터넷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얘도 특이한 프로필을 단 계정을 갖고 있다. 예전에 본 적 있는 장면의 반복같았다.
나는 이름밖에 몰랐지만 팬덤이라면 꼭 하는 SNS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연습생들도 검색용 아이디를 만드는 듯하다. 할 일도 없으니 쟤가 하는 걸 지켜보기로 했다.
담담하게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는 과정이었다. 실력을 떠나서 현명한 타입으로 잘 빠져나가는 만큼 부지런한 성향들이다.
"…어? 이분, 태오 형 팬인데……."
"뭐가?"
"여기 이분이요. 태오 형 팬이시거든요. 형이 워낙 인기가 많으니까, 저도 종종 보고 있었죠. 꽤 재밌어요. 정보도 많이 들어오고, 형 사진도 엄청 보이고."
"그래, 그런데 그게 왜?"
"이거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들거나 지인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시물이 있으면 공유하는 시스템인데요."
"어, 그런데."
"이거 형 아니에요? 저희 대면 이벤트 때 같은데… 둘이 같이 사진 찍혔었네요?"
"…아, 이거 혹시 그때 그건가."
문채민과 다르게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프로필의 계정이었다. 닉네임으로 보이는 구간에도 길게 늘어진 영문과 숫자가 전부였다. 그런데 올라간 게시물 하단에는 큰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저건 그만큼 공유가 되었다는 의미로 보인다.
"아직 계정 이름도 없는 걸 보면 새로 오신 홈마분 같은데 반응이 엄청 좋네요? 사진 잘 나왔어요."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날 내 이름을 크게 불러 줬던 팬이었다. 강태오와 부딪쳤을 때 나와 있던 대포 렌즈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게 이 사진이었구나, 근데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 멈춰 있는 두 장에 눈길이 쏠렸다. 시커멓고 커다란 남자 둘이 장미를 든 채 렌즈를 돌아보고 있었다.
올라간 사진을 보면 강태오의 팬일 수도 있겠으나, 그 무거운 걸 들고 한달음에 달려와 준 정성이 있었다. 다른 걸 떠나서 이런 건 항상 감사해야 한다.
…근데 멘트는 왜 이런 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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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지 않아요.
러브&피스단
(사진) (사진)
#신해신 #강태오 #유어돌 #take_off #파이널_대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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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태오 얼굴에 한번 놀라고 사진에 붙은 제목에 두번 놀람
- 계정주님 어그로 실력이 보통이 아니시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
- 러븤ㅋㅋㅋㅋㅋㅋ앤 피스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개찰떡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근데 둘이 잘생기지 않았어? 나… 심장이 뛴다…
- 인정 싢해싢… 안꿇린다…? 날티 미남 아니야…?
- 얘네 와꾸 합 오지네 ㅋㅋㅋㅋㅋ ㅠㅜ 내가 기다린 으른미다 ㅠㅜㅠ
- 근데 제일 무섭게 생긴 애들 둘이 제일 기가 약하네 ㅋㅋㅋㅋㅋㅋ
- ?????? 진짜임?????????? 내가 보고 있는 거 진짜야??????????
- 리얼 간지허위매물임 얼굴보고 낚인 애들 많던데 물론 나도 그럼 ; ㅎ
- 하지만 그래서 더 좋아 ㅠㅠㅜㅠㅠㅠㅠ
- ㅋㅋㅋㅋㅋㅋㅋㅋ 간지허위매물이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해신아… 너 또 별명 생겼어…
- 쟤는 진짜 압도적인 캐릭터다; 제작진이 존나 좋아할만 하네;
- ㄴㄴ 처음엔 피디픽 아니었음 지가 살아난 거야 ㅜㅠㅜ 4화까지 아슬아슬했다;;
- 강텡 얼굴로 까는 건 노양심 인정 ㅠㅜㅠㅠ 미쳤다 ㅠ
- 벌써 머리 속에서 향수 광고 하나 뚝딱 했어 ㅠㅠㅠ
- 근데 싢 원래 저렇게 잘생겼었나? 방송물 엄청 먹는 것 같아
- 응 그래도 아직 강테오한텐 못 비벼~
- 누가 강태오한테 비빈댔나; 왜 이렇게 꼬였냐;;
- 아휴 정병들아… 이렇게 쓰면 또 정병워딩 쓰지 말라고 붙겠지;
- 튜닝?
- 지랄마쇼 ㅋㅋㅋㅋㅋ 튜닝할 시간 1도 없었음 1화부터 보고 와라
- 스타일링을 개 잘하는 것 같은데… 매번 지 와꾸에 맞는 거 찾아오네 해싢아 혹시 코디해볼 생각없니 우리 애들 좀 부탁할게
- 살도 많이 빠진 듯 ㅠㅠㅠ 1화 때 보고 지금 보면 마음 찢어져 우리 고앵이 ㅠㅜㅜㅜ
- 얘들아 먹금하자
- 난 저 둘다 극호임 애들 인성 좋은 거 눈에 보이고, 실력도 못 까잖아
- 소동물들이 넘쳐나는 돌판에 맹수상? 응 오히려 좋아
- 엄마 나 극락이야
- 포스 에바 얼굴 에바 반전성격 에바 이상 삼진 에바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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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수가 엄청 많은데요. 대충 봐도 형 응원하겠단 분들이 많아요. 잘된 것 같아요."
"…그렇지. 일단 저렇게 해 주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가볍게 웃는 문채민이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얘의 뒷통수를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생판 남이라고도 볼 수 있는 나였는데 사진을 찍고, 보정을 하고 또 그걸 개인 SNS에 올려 홍보까지 해 줬다.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 같았다.
저당금 때문에 시작한 건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기량을 해내야 할 것 같았다. 난 받기만 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니까.
"…명이 형이랑 민석이 형 팬덤은 아직도 사이가 안 좋네요."
"그래?"
"네, 둘이 계속 경쟁했잖아요. 반복해서 붙어 버리니까 팬덤에서도 말이 나오는 모양이에요."
"…아, 그건 나도 좀 예상했어. 거기 포지션 때도 메인 보컬로 겹쳤었지?"
마우스 휠을 내리던 문채민이 창을 닫았다. 자신의 팬만 보던 게 아니었는지 이런저런 여론에 강한 인물이었다. 안 그래도 그 둘에 대해서는 예측한 바가 있었다.
연습생 당사자들은 별 탈이 없었지만, 보이는 구도가 강하게 얽혀 있었다. 방송에서도 그걸 은근히 다룬다는 느낌이었다.
공평하게 올라가면 모르겠는데, 거진 윤명이 승기를 가져갔었지. 거기다 이민석 팬덤은 꽤 과격한 편이다. 그 탓이었는지 뒤에선 제법 욕을 먹고 있을 것 같았다.
걔는 이런 걸 굳이 안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윤명이 멘탈은 강하지만, 아직은 십 대 청소년이었다.
반대편인 이민석은 재데뷔를 다짐했을 정도이니 좋은 상황은 아닐 것이다. 잘 이겨 내고 있는데 여기에 기름을 뿌릴 필요는 없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사라질 적의, 식을 때까지 멀리서 두고 보는 게 정답이다.
"…채민아, 그거 말해 주지 말고 너만 알고 있어."
"네. 그럴게요."
"본인들이 알게 되는 거는 어쩔 수 없는데, 우리가 나서서 말해 주는 건 좋은 게 아닌 것 같아."
"형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당장은 같은 무대에 서야 하는 팀이니까… 또 정이 들었잖아."
"무슨 심정인지 이해되네요."
알려 주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로 저건 저 둘이 아니라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사연이었다. 나나 문채민도 찾아보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세상 사람 전부에게 사랑을 받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그걸 들춰 볼 필요는 없지. 미움 이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곳에 의지해 눈앞에 집중하기로 했다.
"우리도 슬슬 돌아갈까? 예상보다 많이 늦었는데."
"네. 그래요."
"내 것 봐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몸을 일으켜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새삼 파이널이라는 게 실감 나는 것 같았다. 끝이 오기는 하는구나. 왠지 모르겠지만 싱숭생숭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