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다시 모인 연습실이었다. 오전 중에는 멘토들의 평가가 진행됐다. 그래서 팀원들은 자율 연습을 반복하고 있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 때문일까, 묘한 긴장감이 사방을 휩쓴다.
저기서 후보군에 들지 못하면 팀 내 자체 투표에는 도전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녹화가 끝난 부분이라며, 반쯤은 편하게 내려놓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 봤으니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다짐했다. 센터는 못 되더라도 파트 분배에서 서브 보컬 1을 가져갔다.
솔직히 남들이 봤을 땐 이것도 욕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확신이 없다. 오늘 이 포지션에서 떨어질 걸 대비해 거길 노린 거였다.
상태 창이나 한번 점검해 볼까. 여기서 탈락하면 저것도 어떻게 될 지 모를 노릇이었다. 올릴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고, 코인도 바닥을 보이는 중이다.
작게 헛웃음 지으며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그러던 중 요 근래 방치해 뒀던 부분이 눈에 띄었다. 바로 스킬 트리다.
[신해신]
나이: 22
외모: A
보컬: A
댄스: B+
운: B-
끼: A
정보: 플레이어
이벤트: '당신의 아이돌, 그 시작' 진행 중
[보유 스킬]
'한번 보면 잊지 못해(F)' - On
'부릉부릉 운전기사(E)' - On
'저세상 귀염둥이(D)' – On
'가위바위보의 신(B)' – On
'폼生폼死(B)' - On
[현재 코인]
795 코인
…저세상 귀염둥이, 저거 끄는 걸 깜빡했네. 귀여운 노래를 하게 된 2차 미션에서 적용해 뒀던 부분이었다.
원래는 3차 때 스위치를 눌러 놓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정해진 선곡으로 인해 보류했다. 청량하고 밝은 기운이 넘치는 분위기여서 잘 하면 중첩된 효과를 받을 수 있겠다고 계산했다.
방송 내에서 미묘하게 허당처럼 다뤄지고 있었으니 최대한 아슬아슬한 지경까진 저걸 사용하고 싶었다. 파이널곡의 방향에 따라 재조정을 하자고 생각해 둔 참으로 그걸 홀랑 잊어버렸다.
'No Limit.' 격하고 빠른 템포에 카리스마 넘치는 퓨처 EDM 계열 댄스 곡이다. 일렉트로닉한 사운드가 섞여 저돌적인 면모가 강해 보였다. 그런데 이 곡의 센터 평가 영상을 저 스킬을 켠 채 촬영했다.
…큰일이네.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닥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날 응원해 주던 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숨을 내쉬고는 스킬의 전원을 꺼 버렸다. 이건 누군가를 원망하기에도 웃긴 실수다.
[신해신]
나이: 22
외모: A
보컬: A
댄스: B+
운: B-
끼: A
정보: 플레이어
이벤트: '당신의 아이돌, 그 시작' 진행 중
[보유 스킬]
'한번 보면 잊지 못해(F)' - On
'부릉부릉 운전기사(E)' - On
'저세상 귀염둥이(D)' – Off
'가위바위보의 신(B)' – On
'폼生폼死(B)' - On
[현재 코인]
795 코인
"팀 'No Limit.' 센터 평가 후보군 결과 나왔습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스태프의 외침이 들렸다. 그에 각자 흩어져 있던 연습생들이 한곳을 바라본다. 아직 파이널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정신 차리자. 눈을 감았다 뜨며 깊게 심호흡했다.
* * *
"센터 평가 후보군 발표해 보겠습니다."
"으악, 해신이 형, 템포가 너무 빨라요!"
"조, 조금만 천천히 가요……."
"이런 건 빠르게 공개하는 게 제일 좋아."
"해신이 너, 생각보다 저돌적이네."
둥글게 둘러앉아 있는 10인이었다. 바로 앞에는 길게 접힌 결과지가 놓여 있었다. 미련 없이 손을 뻗으니 주변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평소에는 잘만 나서면서 이럴 때는 겁을 먹네. 어차피 이게 최종인 것도 아니었다. 이 안에는 3명의 후보 이름이 적혀 있는 게 전부다.
거기서 다시 한번 가벼운 경합 내지 영상 판독을 통한 투표를 해야 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면 빠르게 해치워야 한다. 뒤로 물러설 시간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빨리 정해서 대형이랑 동선 잡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맞아요~ 고민해도 바뀌진 않잖아요~"
"…응."
"그, 그럴까? 형… 열어 주세요."
"좋아! 가 보자!"
정신을 차렸는지 여길 돌아보는 팀원들이었다. 그럼 망설이지 않고. 잡혀 올라온 종이를 펼쳐 버렸다.
"으악! 이렇게 갑자기?"
"혀, 형!"
"…헉."
물론 아직 연달아 터지는 비명에 내용은 확인 못했다. 그저 펼친 상태로 가슴팍 부근에 정지해 있는 중이었다.
"아니, 열어 달라면서요……."
"그래도 카운트 정도는 할 줄 알았죠!"
"그럼 어떻게 할까요? 바로 보여 드려요? 아니면 한 명씩 읽어 드려요."
"…그냥 한 번에 보면 안 돼?"
"…그래, 해신아. 바로 공개하자."
윤명과 이민석이 나지막하게 제안했다. 따지고 보면 저 둘이 가장 가능성 높은 후보군이다.
문채민과 권혜성도 실력으론 빠지지 않았는데 전자는 곡에 비해 말간 느낌이 강했고, 후자는 보컬 파트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남은 건 타고난 인지도의 윤명과 이민석이다. 말랑하게 생긴 건 윤명도 마찬가지였지만, 특유의 체격과 컨셉 소화력으로 이겨 낼 게 분명하다. 이민석은 원래 그룹인 원더보이즈에서 댄서를 할 정도로 몸을 잘 썼지. 거기에 경력직다운 능숙함이 눈길을 끌었을 것 같았다.
가장 강력한 인물 둘이 나서니, 모두가 동의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렇다면야 뭐… 결과지를 전원이 잘 볼 수 있도록 가운데에 밀어 넣었다.
[No Limit 센터 평가 후보군]
윤명 / 이민석 / 신해신
내가 잘못 봤나.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곤 다시 적혀 있는 글자를 확인했다.
뭐야, 왜 내 이름이 있는 건지 의문이다. 스킬의 영향을 받았을 게 확실한 구간인데? 안 그런 척하면서 저걸로 무사히 끝낸 이력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이너스 효과가 클 거라고 체념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여길 노렸던 건 맞았지만 진짜 이루어지니 이상한 기분이다. 내가 멘토들에게 인정받은 건가 궁금해졌다.
정적이 오가는 방 안, 영상 녹화로 꽤 살벌한 분위기를 풍겼던 조승훈과 오은재였다. 멘토들이 내린 결론이었기에 반론하진 못할 일이다. 그래도 눈빛이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얘들아, 여기 카메라 있다. 눈짓해 주니 그제서야 적당히 갈무리해온다. 대놓고 견제하거나 시기를 보이는 건 본인에게 가장 나쁠 일이었다. 잘하는 애들이 꼭 한 번씩 정신을 놔서 힘든 입장이다.
"어, 그러니까."
"해신이 형, 형도 후보군 들어갔으니 여기서부턴 제가 진행할까요?"
"그럼 나야 고맙지."
상황 정리에 나선 건 문채민이었다. 리더로 말을 이어 가기엔 민망해서 난처한 상황이란 걸 눈치챈 모양이다.
아쉬워하긴 했지만 자기 자리가 아니란 걸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현명하다고 해야 하나, 너무 이성적이어서 무섭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
"그럼 임의로 투표 부분까지 정리하겠습니다. 우선 센터 후보군은 윤명 형, 이민석 형, 신해신 형 세 분이십니다. 개인 역량 평가가 있고, 촬영 영상으로 확인하는 방법이 있는데 어떤 게 좋으신가요?"
"전 영상 평가요~ 아무래도 다 같이 있는 걸 보기엔 그쪽이 좋을 것 같아서요."
"저도요. 결국은 한 무대에 서야 하잖아요. 중심이 잘되는지 보려면 영상 쪽으로 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흐름은 영상 확인 쪽으로 정해지는 것 같았다. 경쟁이라 봐주겠다는 뉘앙스는 절대 아니었다. 역시 산 넘어 산이라니까.
멘토들에겐 나름 센터의 역량을 보여 준 것 같았다. 하지만 팀원들의 커트라인을 넘기지 못하면 힘들 것 같다.
인근에 자리한 이민석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1차를 제외하면 좋지 못한 일이 자주 있었던 연습생이다. 크다고 하기엔 애매하되 소소한 방해 요소들이 존재했다. 이번에도 그럴까 봐 불안해하는 얼굴이지.
반면 옆의 윤명은 지나치게 태연하다. 자신감… 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그냥 평소처럼 생각을 알 수 없는 느낌이다.
나 진짜 얘네랑 저 자리 놓고 싸워야 하는 건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방 천지가 적으로 느껴지는 사태였다.
* * *
"전 민석이 형 한 표요. 리드하는 게 능숙해요. 분위기도 잘 맞고요."
"어? 난 분위기론 신해신 연습생 쪽이라고 생각했는데. 스타일이나 음색 결이 좋지 않나."
"…그래도 메인 보컬이 센터 잡는 게 안정적이지 않나요? 명이 형이 가운데니까 균형이 맞는 것 같은데……."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당사자들보다 더 열띤 토론을 한다.
센터가 곧 무대 전체의 무게를 잡아 준다, 이건가. 후보군은 놓쳤지만 높은 퀄리티의 결과물을 만들겠다는 일념은 여전한 것 같았다. 하긴, 얘네도 좋은 무대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보단 해신이 네가 더 잘 어울릴 것 같긴 한데……."
"네?"
옆자리에 앉아 모두를 지켜보던 이민석이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으나, 내 귓가에는 정확하게 들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어딘지 쓰게 웃고 있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나오면 내가 이상하잖아. 식은땀이 절로 흐를 것 같았다. SOS 신호라도 보내고 싶은데 하필 나머지 후보가 윤명이다.
"…형의 능숙함도 굉장한데요."
"그래도 나 이 곡은 왠지 네가 잘 어울릴 것 같긴 했어. 어제 촬영할 때부터 생각했던 점이거든."
"다들 장점이 있는 거죠. 전 개인적으로 형이 센터인 곡도, 명이가 센터인 곡도 모두 다를 거라고 확신해요. 무슨 결과가 나오든 좋은 경연일 거예요."
"역시 리더는 네가 하는 게 정답이었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형들, 보기 좋아요."
"윤명, 넌 또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야."
"…'능숙함도 굉장한데요.'부터."
"그럼 제발 티 좀 내 줄래."
"하하, 너네 왜 애들한테 인기 있는지 알겠다. 정말 특이하다니까. 좀 더 빨리 친해졌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윤명과 대거리를 하고 있는 중으로 침울한 기색이던 이민석이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