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이 사람, 지금이 무슨 단계인지 알고 있는 건가.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마냥 날카롭고 어두운 것보단 이게 나았다. 어차피 경연은 좋은 퍼포먼스를 만드는 게 최고다.
1차적으론 데뷔가 꿈이겠지만 전부 무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뭐야, 형들~ 여긴 투표하느라 정신없는데, 거기만 재밌고~!"
"맞아요. 아니 저기, 경쟁하는 건 거기 세 명이잖아요. 왜 그렇게 화기애애한 거예요……?"
"진짜 이상한 형들이야. 그렇지?"
"…저기, 그럼 이제 발표해도 될까요?"
문채민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마치 뻘쭘해서 죽겠다는 표정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어딘지 다시 엄숙해진 현장이었다. 이것도 모두를 위한 과정 중 하나였다.
* * *
"음… 뽑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 정말 이렇게 될지는 몰랐는데……."
"민석이형, 그거 소감보단 사과문 같아요."
"축하는 드리는데, 저희가 더 부담스럽잖아요!"
"처음의 그 위풍당당함은 다 어디 갔어요!"
"…뭔가 진이 다 빠졌어. 민석이 형이 저러니까 이거 순순히 양보할 수밖에 없잖아요."
"혹시 지금 투표 무를 수 있어요?"
"늦었어요. 저희 센터는 이미 저 형입니다."
"…다들, 저에 대한 취급이 너무하네요."
모두의 앞에 서 있는 이민석이었다. 90도 가까이 허리를 접은 상태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 같다.
초반과 많이 다른 행동으로 자신감이 깎였는지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카메라를 떠나 참 수더분한 인물이었다. 나는 윤명과 함께 인정한다는 박수를 쳐 줬다.
"그럼 저희 팀의 센터는 이민석 연습생으로 확정하겠습니다."
"축하해요, 민석이 형."
"고마워. 해신아……."
"…형, 축하드려요."
"명이 너도 고맙다. 음, 기대에 지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
박빙에 가까웠던 승부임은 틀림없었다. 10명의 팀원에서 후보 셋을 제외하고 남은 7인에게 투표를 받았다. 그 결과가 바로 2:3:2다. 이민석은 한 표 차이로 당선이 됐다고 봐야 했다.
정작 당사자는 이름이 불렸을 때 뒤로 넘어갈 것처럼 놀랐다. 나는 멘토들에게 후보군으로 선정되고, 팀원들의 높은 지지율까지 얻은 걸로 만족하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내가 잘해 왔단 증거처럼 느껴졌으니까.
게다가 내 파트는 메인 보컬의 바로 아래 단계였다. 비중도 크니, 센터 놓쳤다고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다.
"민석이 형, 축하해요. 능숙함으로 중심 잘 잡아 주세요~ 아, 전 해신이 형 뽑았지만요. 형의 그 카리스마 넘치는 스타일이 좋았는데… 물론 성격은 논외."
"혜성아, 일단 투표해 줬다니까 이번에는 넘어가 줄게."
"와, 이게 짱이네. 앞으론 형 놀리기 전에 뭐 하나 해 주고 놀려야지."
"…매를 버는 타입."
"…윤명, 너까지 그러기 있어? 나 그거 유준이 형이랑 채민이한테 주구장창 들었는데… 아, 뭐야, 한 명 더 늘었어."
권혜성 덕분에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초반에는 견제와 불꽃이 튀어 걱정했던 바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제 겨우 한 걸음 뗀 거였지만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애들과 함께한다면 좋은 무대를 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다.
* * *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즐거웠다. 이번 프로젝트는 조금 과중한 걸 받은 찰나였다. 집에 갈 시간도 없어 랩실에서 살다시피 했던 매일이었다.
케이팝이란 취미가 있는 동료는 덕질을 하지 못해 말라 갔다. 일은 완벽하게 해냈지만, 눈에서 생기가 빠진 걸 목격하고 숨죽여 웃은 전적이 있었다.
오늘은 대망의 해당 프로젝트가 끝을 보인 날이었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지만, 해치웠다는 후련함에 마음이 가벼웠다.
본방송은 볼 수 있으려나. 가운을 벗으며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바라봤다. 사실 나도 그 취미 생활에 발을 담그고 있던 상태다.
테마곡 무대만이라도 봐 달라는 부탁을 들었던 과거였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심심풀이 가벼운 기분으로 영상을 봤다. 거기서 꽤 강한 흥미를 느낀 게 한 방에 '폴 인 러브' 이런 건 아니었지만, 인생에 있어 작은 즐거움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여유가 되면 해당 프로그램을 찾아보며 동료와 간단한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눈여겨보던 연습생의 이름이 '신해신'이라는 걸 알게 됐다. 정확하게 돌아가는 사이클은 몰랐지만, 일반인 출신의 무관계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생긴 것도 튼튼하더니, 성격도 꽤 저돌적이네. 어째 점점 재밌어지는 것 같았다. 보이는 모습들도 분석하고 싶은 유형으로 안 그러는 척 여기저기 잘 튀는 듯했다. 잠잠한가 싶으면 예상 밖의 행동들로 즐거움을 선사해 줬다.
음, 이걸 입덕이라고 하던가. 동료가 입에 달고 살던 단어였다. 열성 팬까지는 아니었지만… 저 사람이 데뷔에 성공하는 건 구경하고 싶어 졌다.
오늘은 퇴근 시간과 11화의 방영이 맞물려 있었다. 재방송이나 다운로드로 봐야겠네……. 아쉬움에 관자놀이를 긁적이던 찰나였다. 제출이 완료됐는지 탈의실로 동료가 걸어 들어왔다.
아까 전만 해도 잔뜩 지쳐 너덜거리던 사람이었다. 가운을 벗어 어깨위로 들쳐 보이는 게 오늘 하루 중 가장 발랄한 얼굴로 인사했다.
'제출 잘 끝내셨어요?'
'후후, 물론이죠. 아, 드디어 하나 끝냈네. 혜성아, 누나가 간다!'
'오늘 방송 보시게요?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방송 시간까지 20분도 안 남았어요.'
'완전 가능~ 완전 가능~ 아, 쌤. 쌤도 이거 보시죠?'
'…네? 네, 그렇긴 한데…….'
어깨를 치며 웃어 보이는 동료였다. 진짜 일할 때와 너무 달라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작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이니 입가를 가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 다 알고 있다니까요~ 쌤 신해신한테 완전 관심 있잖아요'
'선생님이 추천해 주셔서 봤는데, 괜찮더라고요.'
'음… 그럼 오늘 저랑 방송 땡기실래요?'
'…네?'
'쌤은 집 멀죠? 자가용 끌고 다니잖아요. 저희 집 자차로 5분이면 가는데 어때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사정이었다. 나는 현재 동료의 자취방에 와 있었다. 알고 지낸 진 제법 됐지만, 사적인 공간에 온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연예인 때문이라니… 스스로가 생소하게 느껴진다.
대충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걸었다. 방송을 봐도 차가 있어 귀가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어쩌면 나, 여기에 꽤 진심이었을지도? 입가를 매만지며 TV에 집중했다. 옆자리는 이미 잔뜩 몰입해 있는 상태였다.
"…앞에 방영된 분량은 보셨어요?"
"잘 시간 줄여서 봤죠~ 아, 허 교수님 완전 미워요. 인력 충원 안 해 줄 거면, 마감 기한이라도 늘려 주시지, 참."
"그래도 다 해냈잖아요. 그리고 그 와중에 챙겨 보신 것도 놀라운데요. 전 잘 시간도 부족했는데."
"잠은 죽어서 평생 자는걸요. 남들 다 보는데 저만 놓칠 수 없죠. 그나저나 쌤, 앞 내용 못 보셨어요? 그런데 오늘 이거 봐도 되는 거예요?"
동료는 제법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돌아보는 얼굴에선 크게 뜬 눈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진짜 특이한 사람이라니까. 동료 덕분에 알게 된 연습생도 유쾌한 인물이었다. 희한한 연관성이라며 조용히 대답해 줬다.
"신해신 관련된 부분은 찾아봤어요. 그래서 딱히 지장도 없고……."
"와~ 우리 쌤 진짜 제대로 입덕하셨구나. 하지만 우리는 적입니다. 선 그어요. 전 혜성이 픽이거든요."
"…아, 그 춤 잘 추던 친구요? 그래도 신해신이랑 꽤 친하지 않았어요?"
"오~ 그것도 아시네요? 친분이야 있죠. 하지만 데뷔는 다른 일인 걸요. 일단 본방부터 집중합시다."
피식 웃으며 화면에 집중했다. 때마침 익숙한 로고가 등장하고 있었다. 순위 발표식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방송 같았다. 음… 활기찬 구간은 아니겠네. 내가 좋아하는 웃긴 장면은 뜸할 것 같았다. 아쉬움에 턱을 괴곤 나머지를 시청했다. 대폭 줄어 버린 합격의 문이 등장한다. 예상대로 여기저기 심란한 표정들이 잡혀 나왔다.
"으음……."
"뭐, 불편하세요?"
"아뇨, 그건 아닌데… 제가 좋아하는 부분은 이런 게 아니거든요. 그, 왜,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 그런 걸 선호해서요."
"아, 쌤 재밌는 것 엄청 좋아하시죠. 그래서 신해신 픽인 건가? 오… 딱 맞네."
"일단 오늘 살아남을지도 좀 걱정되네요. 반응이 없지는 않은데, 안정적으로 보기엔 불안한 구석이 있잖아요."
"…쌤, 최애에게도 냉정하시네요. 이거 진짜 직업병이예요. 우리 여기서까지 분석하진 말아요… 너무 슬프잖아요. 그리고 원래 이런 건 감정으로 보는 거예요. 아이돌 서바이벌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묘미입니다."
"그런가요?"
제 픽이라고 할 수 있는 연습생은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화려한 행보를 보이지 않아 불안하면서도, 그게 또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효과를 자아냈다. 마침 2차에서 불렸던 순위가 나오고 있었다.
"신해신 원래 11위였죠?"
"네……. 지났는데, 안 불렸네요."
"웬일이야~ 올라가려나 봐요. 근데 얘 잘하기는 했어요. 실력도 좋고, 외모도 훌륭한데 초반에 너무 못 살려 줬죠?"
확실히 전 무대가 좋은 편인 것 같았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음원으론 충분한 퀄리티였다. 무대 구성도 괜찮았고, 팀 내 조합도 상향 평준화되어 있었다.
잘 하지도 않던 음원 스트리밍까지 돌리며 시간이 날 때마다 듣고 또 들었다. 그걸 동료가 알아주니 내심 뿌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팬심인가……? 생소한 감정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드리죠."
"쌤 완전 케이팝 팬 다 됐네~ 완전 좋아요. 동료가 생겼다."
"저희 원래 동료인데요."
"재밌는 건 그렇게 좋아하면서, 조크는 영 못 받아들인다니까~"
: 이제 8위를 호명해 보겠습니다.
"데뷔조 라인이네… 여기 지나면, 진짜 들어가는 것 아니에요?"
"…글쎄요."
난 저 사람이 매력 면에선 충분하다고 판정 짓고 있었다. 팬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와 상승하는 실력이 심상치 않았다. 꾸준히 보이는 노력도 좋았고, 인성이라든지 주변을 챙기는 성격도 훌륭했다.
그래서 성공할 가능성을 점치자면 하이 클래스라고 분석했다. 자, 신해신. 어서 보여 줘 봐. 난 네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길 바라. 가늘게 뜬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누군가의 성공을 바란다는 건 참 생소한 감정이었다.
: 8위는, 이제는 대표적인 성장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신해신 연습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