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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99화 (99/328)

99화

포장도로 바로 옆으론 작은 풀들이 무성했다. 남들은 힐링하러 찾아오곤 하는 정경이다. 작게 웃으며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체감으로는 엄청 오랜만에 오는 기분이었다.

회귀 전이 26살 무렵이라면 2년 만이겠네. 그것도 전부 내 시점에서였다. 22살인 지금이라면 방문한 지 반년이 좀 넘은 시간일 것이다.

사실 처음 돌아왔을 때부터 여기가 생각나긴 했다. 연락드릴까 그것도 잠시, 의지하게 될까 봐 애써 넘긴 상대였다. 이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빈털터리로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할망정, 폐를 끼칠 순 없다고 마음먹었다.

선선한 숲 공기를 맡으며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도보로 15분은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길게 진동이 울렸다. 안 봐도 누구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래도 환경이 사람을 유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막바지인데, 잔소리하지 말고 잘해 주자. 가볍게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터치했다.

[이유준]

"여보세요."

- 어? 형, 아침 일찍 전화드렸는데 안 자고 있었네요?

"응, 일찍 일어났어.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 별건 아니에요. 형도 이제 아시잖아요, 저희 자주 연락하는 것. (해신이 형!)

"옆에 혜성이야? 아직 이른 시간인데… 설마, 쟤 집에 안 갔어?"

- (아니에요! 저 집에 갔다가 왔어요!) 어, 어, 혜성아.

오늘도 여전히 시끄럽고 정신없는 애들이었다. 그래도 얘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고생은 많았지만 고운 정, 미운 정이 잔뜩 든 상태였다. 익숙한 레퍼토리에 대화를 하며 이동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오늘도 활기차네."

- 하하, 그런가요. 사실 마지막이니까요. 그동안 자주 봤는데, 너무 아쉽더라고요. 형, 오늘 시간 되시면 같이 만날래요? (해신이 형~ 나와요~)

"미안해.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

- …어? 그래요? 그러고 보니까 실내가 아닌 것 같은데… 형 밖이에요?

눈치만큼은 인정해 주고 싶은 이유준이다. 작게 응대하자 조용히 지고 들어간다. 왠지 평소보다 차분한 말씨인 것 같은데.

"응, 좀 멀리 나왔거든. 얘들아, 다음에 만나자."

-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식사 잘 챙기시고요. (에이, 형, 다음에 만나요.)

"그래, 너네도 몸 잘 챙기고. 파이널 힘내자."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아까와 달리 고요해진 사방이었다. 바람 부는 소리에 맞춰 풀들이 흔들렸다.

다 온 것 같은데, 생각하기가 무섭게 주황색 벽돌의 작은 집이 나타났다. 담벼락에는 들풀과 얼기설기 얽힌 덩굴이 가득했다. 이걸 보면 여기도 참 여전하다 싶다.

초인종을 누르며 문패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다.

- 이성미

- 김지현

- 최택민

- 최주형

띵동-

- 누구세요?

"저, 안녕하세요. 해신……."

- 어머, 이게 누구야! 해신아, 웬일이야. 문 열어 줄게. 얼른 들어오렴.

카메라를 통해 바로 나인 걸 알아보신 모양이다. 성격 급하신 건 여전하시네. 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열리는 문을 지켜봤다.

작은 화단 옆으로 장독대가 잔뜩 놓여 있었다. 얼마 전에 물을 뿌렸는지 조금은 축축한 마당에 짧은 풀 옆으로는 정비된 돌길이 놓여 있었다. 어릴 때는 저 돌만 밟으며 들어가곤 했지. 예전을 회상하며 따라 걸으니 현관문 입구가 활짝 열린다.

거기엔 조금은 그리웠고, 익숙한 분이 서 있었다. 이제는 연세 탓에 희끗희끗해진 단발머리의 여성이다.

"…안녕하세요, 은사님. 오랜만에 봬요."

여긴 갓난아기 시절부터 보호 종료 아동으로 사회에 나갈 때까지, 날 키워 준 보육원 은사님네 댁이었다.

* * *

"어휴, 잘 지냈지? 너무 놀랐잖아."

"제가 너무 갑자기 찾아왔죠? 미리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해신이 너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부엌 식탁에 앉아 대접받은 차를 마셨다. 은사님은 특유의 느슨한 미소로 나를 보고 계셨다. 이러고 있는 게 얼마 만인지 너무 먼 과거에 기억도 나지 않는 것 같다.

"그나저나 주형이는요? 얘가 좋아하는 롤케이크 사 왔는데."

"아, 잠깐 이 앞에 나갔다 온다고 했는데… 슬슬 올 때 됐어. 주형이가 엄청 좋아하겠다. 너 너무 뜸하게 온다고 툴툴거렸잖니."

"그랬어요? 최주형 이 자식, 절 그렇게 좋아하면서 티를 안 내는 거였네요."

"어릴 때부터 해신이, 너 참 잘 따랐잖아."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평화로운 기분에 잠겨 있었다. 의자 옆에 놓인 쇼핑백을 보며 작은 기대를 품던 중이다.

그때 벌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조금은 거칠고, 투박한 말투였다.

"아, 벌써 덥네… 다녀왔습니다. 어? 할머니, 저 왔어요!"

"주형아, 부엌으로 오렴."

"네? 거기서 뭐 하… 응?"

"최주형, 오랜만이다?"

"…어?"

나를 보고 일순간 굳어 버린 몸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21살의 장성한 청년으로, 회귀를 해서 볼 수 있었던 예전의 풋풋한 얼굴이다. 현재라면 17살인가?

계산을 하며 어안이 벙벙해진 최주형을 바라봤다. 아, 그리웠지. 저 얼빵하고 놀리는 재미가 있는 표정. 재밌다는 듯 피식거리니 그제서야 크게 소리 치는 애다.

"…신해신? 너 왜 여기 있어!"

"주형이 너도 여전하네?"

"할머니! 얘 뭐예요?"

"최주형, 해신이 형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괜찮아요. 쟤 항상 틱틱거리다가 집에 갈 때 되면 형이라고 부르거든요."

"…뭐야, 이게 뭔데."

"너 좋아하는 롤케이크 사 왔어. 이거 먹자."

"아니, 롤케이크고 뭐고 간에 설명 좀 해 달라고……."

은사님과 나의 장난에 졌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 최주형이었다. 옆자리에 앉으라며 의자를 꺼내 주니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따라 주는 착한 애다.

이 애는 보육원에서 날 돌봐 주신 은사님의 손주였다. 내가 이모와 이모부라고 부르는 은사님의 자녀 부부는 해외 발령으로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상태다. 제 고집으로 한국에 남은 최주형만 여기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종종 놀러 오곤 했던 집이었다. 다른 애들과 달리 입양을 가지 않고 쭉 보육원 한곳에서 살았던 나였다. 그래서 유달리 내게 마음을 써 주신 것 같았다. 은사님은 명절 연휴나, 휴가날이 되면 항상 날 데리고 본가로 내려가셨다.

거기서 알게 된 이 가족과는 나와 아주 친분이 깊은 사이였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떨어져 살게 됐지만, 1년에 1번씩은 꼬박꼬박 인사하러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도 24살을 넘어가선 힘들어졌지만 말이다. 건강 악화로 인해 은사님께서 요양원에 들어가셨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신해신 너, 오라고 할 땐 안 오더니. 그리고 1년에 한 번이 룰인 것 아니었어? 아직 반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방문하는 데 딱히 규칙 같은 건 없는데?"

"멍청아, 그럼 좀 자주 와.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내가? 남 걱정하기 전에 청소년씨부터 얼른 커."

"두고 봐. 스무 살 전에 이겨 줄 테니까……."

잘 아네. 최주형은 성인이 된 이후 거인처럼 키가 컸다. 미래에서 왔다고 알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자며 웃었다.

"그나저나, 너… 그, 그거 뭐야, 아이돌!"

"해신아,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단다. 아이돌이라니, 네가 하고 싶었다면 상관은 없지만… 주형이는 보다가 뒤로 넘어갈 뻔했어."

"하하, 사연이 좀 길어요……. 그래도 주형이 너, 형 나온다고 챙겨 봤나 보네? 이런 거에 관심 없지 않았어?"

"…신해신, 진짜 짜증 나."

슬슬 본론을 꺼내야 할 때였다. 안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파이널 미션을 앞두고 연습생들에게 공지가 내려왔다.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만큼, 가족들을 초대하라는 소식이었다.

…아, 가족? 깜빡 잊고 있던 부분이다. 시즌 3와 4 때도 마련된 가족 좌석이었다. 감동적인 서사와 연출을 위해선 빠지지 않는 구간이다.

내가 부모님 없단 건 다들 모르고 있지? 개인 출연이니 절대로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제서야 약간의 위기의식이 드는 게 솔직히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용하긴 했지만, 이것과는 별개인 일이었다. 주변에는 좋은 어른도 많이 있었고, 거센 사회의 풍파에 구르긴 했으나 나쁘지 않게 성장할 수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고, 일상을 보내는 아주 평범한 시민이라고 자부했다. 남들에게 말 못 할 사연처럼 여길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조금 다른 사례였다. 왠지 알 수 없는 동정론과 이상한 소문 같은 게 만들어질 느낌이다. 그건 별로 반갑지 않아.

나야 뭐,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어느 정도는 단련이 된 상태였다. 게다가 악플 회피하기 능력이 하늘 높이 치솟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나둘씩 파다 보면, 지인들에게도 여파가 갈 수 있었다.

그래, 숨길 수 있으면 숨기자. 흠잡으려고 드는 건 공개할 필요가 없지. 그래서 오늘 이 결정을 내렸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불편하진 않을까, 이마저도 고민을 했다. 친한 권혜성이나 문채민이 대가족이니 이쪽에 좌석을 양보할까도 염두에 뒀었다.

하지만 왠지 개인적인 욕심이 들었다. 여기만큼은 은사님과 주형이를 초대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물론 둘이 원치 않다고 한다면 사과하고 물러설 예정이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어, 그러니까……."

"맞다. 너 이제 파이널이지."

"어?"

"파이널 그거잖아, 생방송. 학교에서 애들한테 물어봤는데, 너 대단한 거라며? 뭐… 확실히 잘하긴 하더라. 그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지."

"맞아, 해신아. 선생님도 항상 보고 있었어. 정말 잘하더라."

"아, 감사합니다."

"우리 부를 거지?"

"……"

"아까부터 왜 이렇게 바보처럼 굴어? 생방송 때 가족들도 부른다던데, 설마 우리 아니야? 야, 너 진짜 그러는 것 아니다. 무조건 나랑 할머니지."

"아니, 부르고 싶긴 했는데……."

"너, 내 형 하라고 하니까 그것도 거절했잖아. 호적 메이트 거부했으면 이건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것 아니야?"

최주형이 격분하듯 눈을 부릅떴다. 저거라면, 내가 고등학생일 때 일이다. 은사님네 가족분들이 입양을 제의해 주셨다. 보호 종료 아동까지 별로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교 후에는 매일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날이었다. 그걸 보고 서둘러 여쭤봐 주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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