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좋은 것 같긴 해."
"오~ 명이 너도, 드디어 날 인정해 주는 거야?"
"응. 이거 멋있어."
"그렇게 말해 주면 부끄럽잖아~!"
"…두 번 말해 주니까, 반응이 별로 마음에 안 드네."
"너 진짜 너무하다."
"형들, 그만 진정해요."
이번 파이널곡에 대한 전반적인 컨셉은 저 둘이 맞춘 전적이 있었다. 모든 파트 배분이 완료된 시점, 연습은 순탄하게 들어가고 있었지만, 임팩트 있는 효과가 필요하던 상황이다. 고민하던 찰나에 권혜성과 배민형이 쑥덕거리더니 의견을 제시해 왔다.
'…카레이서?'
'네. 노래 인트로에 들어가는 시동 소리 듣고 민형이랑 생각해 본 거예요.'
'제가 레이싱 게임 마니아거든요! 듣자마자 이거다! 싶었죠~'
'랩 파트에도 분명 그런 가사 있지 않았어요? 전 바로 필이 왔는데… 다들 어떠세요?'
그 뒤는 더 돌아볼 것도 없었지. 완벽한 만장일치로 메인이 정해진 게 떠오른다. 어떻게 이런 걸 찾아냈냐며 모두에게 과한 쓰다듬을 받았었다. 중간에는 살려 달라며 외치던 둘에 헛웃음을 지었다.
뭐가 됐든 곡의 특색과 잘 맞는 분위기로 보인다. 얼핏 드러난 케이스 너머로 잡지에서나 본 적 있는 패치들이 비치는 게 각자의 특색에 맞춰 리뉴얼한, 다양한 구성의 복장이다. 정해진 순서에 따르면, 입을 차례까지는 한참 남은 구간이기도 했다.
테마곡 군무부터 들어갈 것 같은데. 드디어 교복으로 환복해야 할 타이밍이 찾아온 듯하다. 분주해진 사방에 슬슬 나도 합류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리허설에서 완벽하게 몸을 풀어야 할 것 같다.
* * *
"신원이 형!"
"민형아, 잘 지냈어?"
드넓게 펼쳐진 세트 위 단상이다. 오랜만에 보는 2단 무대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 기간으로 테마곡의 리허설을 위해 이동한 공간이기도 했다. 처음처럼 교복을 입고 조금은 그립던 얼굴들과 다시 마주했다.
우리 팀의 배민형은 성신원을 보자마자 달려 나가 버리니, 어지간히도 반가웠는지 정답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나 역시도 알던 사람들과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데 찾아가기도 전에 먼저 와서 안부를 물어주는 애들이다.
"해신이 형, 혼자 너무 멋있어진 것 아니에요? 치사하다~"
"영서, 너도 정말 여전하구나."
"칭찬이죠? 아니어도 칭찬으로 들을 거예요?"
얘는 1차 무대에서 내게 자주 장난을 치곤 했던 최영서였다. 3차 미션을 앞에 두고 탈락했던 인물이기도 했지. 그때는 불어 터진 만두처럼 울더니, 이제는 씩씩해 보여서 다행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문채민도 한달음에 다가온다. 다들 경쟁이니 뭐니 해도 쌓인 정이 적지 않았던 듯했다. 이래서 차마 미워할 수가 없다고 하는 거다.
"파이널 경연 해당 연습생분들은 2단으로 올라가실게요! 1단은 대형 정비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에 생존 연습생들이 턱을 돌려 위를 쳐다봤다.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연습생들에 반갑기도 잠시, 긴장되기 시작한다. 예전과 동일한 2단 세트였음에도 색다른 정경에 가슴이 벅찼다.
최종 등급 평가에선 B를 받으며 1층에 자리했던 과거가 상기된다. 이전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이번에는 17인이 아닌 20인의 연습생이 올라간다는 부분이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주변을 돌아보니 온통 아는 애들투성이다. 대형에 자리하며 몸을 풀다가 한 명과 눈이 마주쳤는데 쟤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강태오였다. 윤명에게 순위가 밀렸다지만 여전히 건재한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기도 하다. 생긴 것과 달리 조용하고, 조금은 나와 비슷한 구석도 지닌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반가운 것 같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형, 혜성아."
"어? 유준이 형~!"
"오랜만에 본다. 잘 지냈지?"
뒤늦게 올라왔는지 이유준 역시 무리에 합류해 온다. 항상 붙어 다니던 관계였는데, 파이널 이후로는 뜸했던 일화가 존재했다. 권혜성은 그런 이유준이 어지간히도 그리웠나 보다. 냅다 달려가 매달리듯 엉겨 붙는 게 천상 느긋하고 여유롭던 미소가 그대로인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뭐가 됐든 결국 모두 여기까지 살아남았어.
"유준이 형, 뭔가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아요."
"살이 좀 빠져서 그런가? 정원이 형한테 하드 하게 굴려졌거든."
"와, 정환이 마주치지 말아야겠다. 하소연 엄청 할 것 같은데요?"
"정답이야. 채민이는 벌써 시달리고 있더라."
과거만 해도 적응이 되지 않던 소란스러움이었다. 지금은 이게 없으면 어딘가 허전한 지경이다. 내가 익숙해지긴 했나 보네. 먼 산을 바라보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사방에선 본격적인 리허설에 들어간다는 외침이 커지고 있었다.
* * *
"잘 도착하셨어요?"
- 그럼, 잘 도착했단다.
"다행이네요. 힘드시진 않으시고요?"
- 가족석이라서 그런가, 아주 잘해 주시는데? 해신이 네 덕분에 방송국에도 다 와 보는구나.
모두가 있던 곳에서 꽤 떨어진 복도의 구석이다. 핸드폰을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통화했다. 오늘은 파이널인 만큼 개별 통화에 대한 제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스케줄이 끝난 후 여유가 생기면 연습생 모두 연락을 취하느라 정신없었다.
나도 그 틈을 타 빠져나왔다. 고령이신 은사님과 주형이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무사히 도착하셔서 자리에 앉아 계신 것 같다. 과도한 부탁을 드린 것 같아 마냥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뿐이다.
"…선생님, 정말 감사드려요."
- 또, 얘가… 오늘은 할머니라고 부르랬지. 듣는 귀도 많을 텐데.
"네. 그럴게요."
은사님 댁에 방문하고 귀가하려던 길이었다. 허락해 주신 것만으로도 큰일이었는데, 내 손을 붙잡곤 말씀하신 게 떠오른다. 파이널인 날만큼은 선생님이 아닌 할머니라고 부르라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카메라가 사방에 깔려 있을 환경을 배려해 주신 거다. 나는 덤덤한 편이었지만, 남들에게는 책잡힐 수 있을 거라며 걱정하시는 듯했다.
- (야, 너 그러다 큰일 난다? 하여간에 조심성이 없어요. 불안하게 말이야.)
"옆에 주형이 있어요?"
- 응, 주형아. 해신이 형이야. 너 바꿔 달래.
"아뇨, 그럴 필요는 딱히 없는……."
- 야, 신해신. 왜 나는 필요 없어?
"뭐야. 주형이 너, 삐졌어? 대한의 남아가 쪼잔하다."
- 뭐라는 거야. 넌 오늘 입단속이나 잘해. …이런 건 조심해야 하는 입장이잖아.
평소처럼 투덜거렸지만, 전부 나에 대한 애정이 담긴 말이었다. 옆에 있었다면 머리를 한껏 흐트러트려 줬을 텐데, 괜히 아쉽다.
"그래. 너한테도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할머니 오늘 잘 모셔 드리고, 내가 다시 연락할게. 문제 있으면 바로 전화해."
- 아, 잔소리는~ 알았어. 그리고 나중에 다 갚아! 너한테 이것저것 잔뜩 부탁할 거니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해 줄게."
-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야? 그럼 오늘 힘내. 기대할게.
"응. 주형아, 고맙다."
그렇게 전화가 끊긴 액정을 쳐다봤다. 여러모로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더욱이 강한 책임감과 막중함을 느끼는 게 여기엔 날 보러 와 준 사람들이 존재했다. 은사님과 주형이를 제외하고도 응원해 주는 팬들이 적지 않는단 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어제 하루는 가만히 앉아 애정 어린 댓글들을 읽고 또 읽어 내렸다. 저당금이라는 조금은 이타적이고, 계산적인 조건으로 시작하게 된 프로그램인데. 어느덧 이게 날 조금은 변화시킨 듯하다. 며칠 전부터 반복적으로 해 왔던 생각이 돈을 떠나, 일단 합당한 무대를 보여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진심이다.
이제 들어가 볼까. 다른 팀원들과 합류할까 싶어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던 무렵이었다.
…뭐지, 이 기시감? 코너를 돌기 직전 자동으로 몸이 멈춰 선다.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인데 내 촉이 다시 한번 강하게 발휘된 상황이었다. 하여간에 여기는 나오기만 하면 이상한 일에 엮인다니까. 어쩔 수 없지. 평소와 달리 조금은 무던하게 벽에 기댔다.
"한 실장님, 잘 지내셨죠?"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이건 박 CP 목소리잖아. 회귀한 이후로는 마주칠 일이 없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한참 윗선으로 원래도 나 같은 말단이 자주 볼 직급은 아니다. 일 잘하는 남현욱의 상사였지만, 실력은 썩 인정하기 힘든 타입이었지. 은근한 인맥 플레이가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던 게 떠오른다. 근데 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지 궁금하다.
"오늘은 불참하신다고 들었는데……."
연이어 남현욱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까지 이어진다. CP에 메인 PD? 심상치 않은 조합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같이 일했던 전적으로 보아 저 어투는 어딘가 불편하단 기색이다.
천하의 남현욱이 떨떠름해하고 있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태연자약하던 상사가 저런 모습을 보여 신기한 기분이 든다.
"기존 일정으로 인해 힘들 것 같아, 제가 대리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오시고 싶어 하셨는데, 큰 미팅이 잡혀 있어서요. 많이 아쉬워하셨습니다.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 전달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예… 저도 많이 안타깝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다음에는 꼭 만나 뵐 수 있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먼저 대답한 남현욱이 껄끄럽다는 듯이 말을 흘렸다. 하나도 안 안타깝다는 목소리면서 무슨. 뒤의 박 CP만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듯했다. 도대체 누구길래 저러는 거야.
들리는 음성으론 둘을 제외하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제작진 쪽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걸 떠나서 대하는 태도가 내가 아는 인물이라고 보기 힘들다. 호기심에 가볍게 얼굴을 내밀어 상황을 판단하니 예상대로 한 명은 박 CP였고, 나머지 하나는 남현욱이다.
그 외의 사람은 단정한 비즈니스맨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박 CP 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옆태가 드러났다, 깔끔한 인상의 사내다.
넉넉하게 잡아도 마흔을 넘기진 않겠는데? 그마저도 복장 때문에 올드 해 보이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단정한 말씨를 구사하는 게 그리 다채롭진 못한 표정이다. 깍듯한 뉘앙스가 평소에도 익숙한 성향으로 보이면서 서류 가방까지 든 게 현장 관계자라곤 볼 수 없을 듯했다. 이상한 조합의 무리네.
아니지. 애초부터 이런 일에는 연관이 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았다. 뭐가 됐든 난 무대에만 집중하면 되는 입장이다. 그래서 소리를 죽이고는 그들이 멀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런 것도 정말 마지막이네. 진짜 다사다난한 날들이었다. 방송국을 다녔을 때 이상의 스펙터클 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고 장담한다. 신해신, 수고했고, 오늘 잘 마무리하자. 벽을 타고 미끄러지듯 쪼그려 앉으며 천장의 백열등을 올려봤다. 여러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다.
* * *
"쌤, 재능 무슨 일이에요?"
"뭐가요?"
"방청이요! 이게 진짜 되네."
"오고 싶어서 넣은 것 아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