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본경연으로 무대에 올라간 장면, 승리의 기쁨으로 팀원들과 얼싸안고 있는 사람, 탈락자와의 아쉬운 이별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
이거, 나도 울어야 하나? 공감은 됐지만,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여러 추억과 별개로 슬픈 기분은 들 리 없다. 정든 애들은 누구보다 현명한데 못살 것 같지도 않고, 훌륭하게 성장할 인재들이었다.
이게 완전한 끝도 아니니까 보고 싶다면 연락해서 만나면 될 일이다. 그래서 입술을 말아 물곤 조용히 숨죽여 버텼다.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연습생이 눈가를 훔치고 있는 게 아, 이 사람들. 마지막까지 정말 날 곤란하게 만든다.
['함께'라서 견딜 수 있었습니다…….]
아홉 칸으로 분할이 된 화면 속, 저건 그동안 우리가 동고동락했던 장소들이다. 연습실, 숙소, 세트장. 눈에 익은 환경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제 끝났나? 그럴 리가 없지…….
[To. 선의의 경쟁자이자, 뜨거웠던 나의 우정에게]
: 어? 지금 나오는 거예요? 음, 좀 부끄러운데. 채민아……. 으악, 후! 참아 볼게요. 좋아, 문채민! 나 우정환이야. 항상 붙어 있으면서도 이런 말 할 일이 없어서 못 했는데… 정말 고맙다. 넌 내 최고의 친구이자 최고의 라이벌이야. 앞으로도 계속 널 응원할게. 물론 나도 응원해라? 정, 채! 파이팅!
"어, 어우…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근데 왜 네가 먼저야. 다음부턴 채, 정으로 해."
"여기서까지 그런 걸 따지냐."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린 소리다. 우정환이 두 손 위로 얼굴을 파묻고 있는 게 보인다. 곁에는 문채민이 함께 서 있는데 쳐다보는 눈길이 미묘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쟤 지금 기뻐하는 건가? 안 그래 보여도 솔직하지 못한 문채민이었다. 겉으론 틱틱거렸지만, 우정환과는 친분을 자랑했다. 저쪽에서 위기를 겪자 잔소리하면서도 달려간 사이였지. 남고생들의 우정이란 원래 다 저런 거다.
: 음, 태오야. 남들은 널 무뚝뚝하고 과묵하다고 말했는데. 항상 네가 보여 준 그 선의가 정말 좋았어.
여긴 강태오였나 보네. 의외의 연습생 조합이 등장했다. 어울려 다니는 걸 몇 번 보지 못한 이민석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백스테이지 싸움 건 때도 강태오가 나서서 무마한 일이 있었다. 티를 내지 않아 몰랐는데, 이래 저래 정을 꽤 쌓았던 듯하다.
그렇게 몇 명의 연습생들이 덕담을 주고받았다. 작게 띄워진 화면으론 민망해 죽겠다는 얼굴들이 비쳐 온다. 고문과 다름없는 행태에 같이 웃고 있을 무렵이다.
일부만 불러서 찍은 거였구나. 나는 해당 사항이 없어서 다행이다. 닭살 돋게 저런 걸 어떻게 해. 그나마 물기 어린 분위기는 벗어난 현장으로 관객석에서도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 해도 되나요?
어? 쟤가 왜 저깄지. 그러던 중 화면 가득 나타난 인물에 깜짝 놀랐다. 몸을 틀어 멀리 당사자가 있는 곳을 바라보는데 말을 안 해 줘서 몰랐지, 저기 불려 갔었나 보다. …하하, 설마 말도 안 돼. 저 멀리서 머쓱해하는 이유준의 옆모습을 구경했다.
: 고마웠던 친구들은 많이 있지만. 그중 한 명을 꼽자면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해신이 형. 형을 만나서 정말 행복했어요. 사실 처음엔 제가 많이 불안정했거든요.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겁먹었던 시간들이 이어졌죠. 그런데 그럴 때마다 형이 제게 큰 위로가 됐어요. 아무 말 없이 뒤에서 챙겨 준 모든 일…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예요. 형, 정말 고마워요. 제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야. 이 분위기 뭔데. 민망함에 손을 들어 입가를 틀어막았다. 주변에선 날 훔쳐보는 눈길들이 이어진다. 앞서 호명된 연습생들의 심경을 알 것 같은 게 왠지 저쪽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이런 건 백스테이지에서나 보여 주란 말이야.
그 뒤로도 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까지의 일상들이 스쳐 지나가니 서슴없이 망가지고, 뒹굴었던 나날이다. 얼핏 기억나는 순간들엔 나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추억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도 모두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 더는 두렵지 않아요.
: 이젠 용기를 갖게 됐어요.
: 무대를 사랑하고 또 응원해 주시는 팬분들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 이게 제 꿈이자, 희망이니까…….
: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가겠습니다.
[나는, 우리는, 모두는…….]
[그렇게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
[지금 바로 도약하세요.]
[3]
[2]
[1]
[0]
[생방송 문자 투표를 종료합니다.]
그렇게 길다면 길었던 VCR이 마무리됐다. 어딘가 뻘쭘하고 부끄러운 현장에 팬들은 소리 높여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모두의 환호성을 받으며 아득한 기분에 잠겼다. 옆에서 권혜성이 내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게 얘한테 위로를 다 받아 본다. 시선을 마주하곤 기특함에 웃어 줬다.
"자, 이제 대망의 최종 발표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로 고우림이 걸어 들어왔다. 아까와는 달리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이다. 연습생들은 그에 맞춰 자세를 바로잡았는데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7개의 자리가 눈에 띈다. 내가 앉는 건 무리겠지.
사실 어느 정도는 체념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파이널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했으니 책임을 다할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내 일과는 상관없이 겸허하게 축하해 주기로 다짐했다.
"최종 데뷔 멤버는 6위부터 시작하여 1위까지를 먼저 호명합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멤버, 7위를 발표하겠습니다."
연습생들 사이에선 긴장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진 웃고 울었지만, 모두의 목표는 저것이었다. 이 하나만을 위해 달려왔던 수개월의 시간, 뒤에서 흘린 눈물과 땀방울이 적지 않단 건 내가 가장 잘 안다.
간절하겠지. 입버릇은 항상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말했지만, 저 애들의 마음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걸 겪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럼… 광고부터 보시고 가겠습니다."
…내 감동 돌려줘. 고개를 푹 바닥으로 숙였다. 그건 나뿐만이 아닌 듯한 게 사방에 있던 연습생들이 탈진한 것처럼 늘어진다. 화면이 전환된 걸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니, 관객석에서는 야유와 같은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러면서도 고우림은 능글거리며 여유롭게 웃고 있다. 큐 카드를 재정비하면서도 내려가지 않는 입꼬리다. 진짜 저 사람도 성격 나쁘다……. 아까 전에 본 은근한 배려는 기억나지 않는 것 같다. 안 그러는 척, 같이 즐기고 있는 거라고 확신했다.
멘토들도 비슷했는지 멋쩍게 웃고 있는 얼굴들이 포착된다. 그중 서계현이나 민나연만 머리가 아픈 것처럼 이마를 되짚었다. 원겸은 신난다는 듯이 낄낄거리는 표정으로 나머지는 졌다는 듯이 두 손을 흔들었다.
남현욱, 이건 절대 잊지 않겠어. 고마워하고 싶어도 고마워할 수 없는 상사다. 뺀질거리는 얼굴에 모든 게 체념이 됐다.
그렇게 체감상 1시간 같았던 몇 분이 지났다. 그사이에는 가족석으로부터 친지들의 응원이 전해지고 있다. 연습생들 중 일부는 작게 그 방향으로 손을 흔든다. 마음의 여유를 위해서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채민은 대가족이라더니 진짜였네. 압도적인 가족 수의 문채민네가 눈에 띈다. 막둥이라고 얘기했던 걸 얼핏 들은 기억이 나는데. 부모님으로 보이는 두 분을 제외하고도, 3명이나 되는 형제가 자리했다. 나이 터울이 많이 났는지 제법 성숙해 보이는 외관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차분한 애와 달리 격정적인 성격 같았다. 참 밝으시네. 그게 부끄러웠는지 문채민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채민아, 너희 누나들이랑 형은 오늘도 활기차다?"
"조용히 해. 부끄러우니까."
"그래도 오늘은 채정이 누나랑 채훈이 형 안 싸우네."
"…오기 전에 싸웠대."
"안 싸운 게 아니라 벌써 싸운 거였어?"
"작은 누나가 연락했어. 여기서도 그러려고 해서 창피하다고."
음, 그만 알아보자. 그렇게 다른 곳을 향해 방향을 틀던 찰나였다. 가만히 여기를 바라보시던 은사님과 눈이 마주친다. 평소처럼 인자하고 다정한 미소를 띠신 얼굴로 전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신 것 마냥 오른손을 흔들며 웃어 보이란 제스처를 하신다. 그래, 웃어야지. 옆에선 최주형이 검지와 중지를 펼쳐 자신의 눈과 나를 번갈아 짚고 있었다.
지금 저거, 지켜보고 있다는 뜻인가? 이마저도 쟤다워서 기분이 풀리는 듯하다. 하루 종일 오락가락했는데, 이제야 안정을 좀 찾은 것 같았다.
"형, 형 가족분들이에요?"
"어?"
"아까부터 저분들 보고 계속 웃었잖아요. 할머니랑… 동생분?"
나를 지켜보고 있던 권혜성으로 떨어져 있는 이유준과 달리 아까부터 근처에 상주해 있었다. 가족이라……. 어색한 단어였지만, 피식 웃으며 공감해 주기로 마음 먹었다.
"응. 할머니랑 내 동생."
"역시, 안 그래도 형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랑 닮았어?"
"네! 할머님도 형이 우리 챙겨 줄 때 얼굴이랑 많이 비슷하신걸요? 유전자는 대단하구나~"
핏줄 하나 이어지지 않은 내가 닮았다니, 조금은 웃기기까지한 상황이다. 그래도 어딘지 감회가 색다른 것 같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저 사람들을 닮을 수 있다면 내가 영광인 일이다.
* * *
중간 광고가 마무리되는 무렵, 인근의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신호를 보내 온다. 풀어져 있던 연습생들도 긴장된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고우림은 웃고 있던 얼굴을 굳히고 정면을 응시하는데 아, 적응 안 돼.
떨리는 것도 잠시, 체념한 마음이 컸기에 아무렇지 않아졌다. 주변을 돌아보며 희게 질린 애들을 쳐다보니 머리 쓴다고 잔재주 부릴 때는 언제고, 이럴 때면 제 나이처럼 구는 게 신기하다.
이어 마이크를 낀 제작진의 손짓이 내려왔다. 다시 시작된 발표의 순간이다.
"자,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는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 이젠 정말로 순위 발표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제 눈앞에는 긴 여정을 달려온 20명의 연습생분이 서 계시는데요. 그럼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발표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호명이 되신 분은 자리에서 나와 단상 위의 의자에 앉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관객석에선 흥분에 잠긴 환호성들이 터져 나왔다. 옆에 있던 권혜성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우림의 입만을 지켜봤다.
"6위는……."
카메라가 연습생들과 대표 너머의 단상을 비췄다. 그에 모두가 숨죽인 것처럼 호흡을 멈췄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머뭇거린 고우림이 웃는다. 그리고는 이내 씨익 입꼬리를 당기며 시원하게 이름을 불러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