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113화 (113/328)

113화

"그걸 떠나서 집 정리는 하고 들어가자."

쓰지 않는 물건들은 처분해 놓을 계획이었다. 생활할 일이 적을 테니, 정리를 해 놓을 심산이었다. 눈대중으로 필요 없을 것 같은 물건들을 체크했는데 숙소에 갖고 갈 개인 짐을 제외하고 최소한의 생활만 가능하게 꾸려 놓을 예정이다. 하나둘씩 견적을 내리며 체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상 좋은 집주인 어르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6년이나 보증금 인상 없이 살게 해 주셨던 은인이다. 자주 연락하진 않았지만, 내 사정을 봐주셨단 걸 알 수 있었지. 월세 정도면 양해해 주신 것에 반해 큰돈도 아닌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배려는 그것뿐이니까.

"일단 수중에 남아 있는 돈에, 간간이 나왔던 출연료랑 돌려받은 1억을 더하고, 여기에 묶여 있을 보증금은 제외하자. 그래도 당분간 생활비는 괜찮겠네. 거의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다 할 테니까……. 고정 지출만 자동이체 해 놔야지."

사회에서 살아남은 경력은 다사다난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철저하게 준비하고자 했다. 머릿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들기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적었다.

"아, 맞다. 그 돈은."

기존에 갖고 있던 걸 제외하고서도 남은 통장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안에도 천 단위의 현금이 들어 있었는데, 쓰고 싶지 않아서 묵혀만 둔 상황이다.

"…지금 돌려드리면 받으시려나."

그건 보호 종료 아동으로 사회에 나왔을 때, 자립 정착금으로 받은 500만 원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그게 끝이었겠지만, 은사님네 가족분들이 더해 주신 사비가 같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극구 거절했는데, 받지 않으면 다신 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너무 강수를 두시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챙겨야 했던 통장이다. 그럼에도 딱히 쓰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지. 생각해 주신 정성만으로도 충분한 심경이었다.

보증금은 학창 시절 알바하며 모아 둔 돈으로 충족했으니 여태까지 아껴 두고 있을 수 있었다. 언젠간 반드시 은혜를 갚으며 그 금액 이상으로 돌려드릴 계획이었다. 로또에 당첨됐을 때도 이게 먼저 떠올랐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금전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내가 갚을 수 있는 은혜는 이런 방식뿐이다.

천천히 곱씹어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보단 조금 더 기간을 두고 돌려드리는 게 나을 것 같다. 은사님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저당금을 좀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만큼 아이돌 활동으로 돈을 버는 데는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목표한 건 온전한 저당금의 회수였으니까. 게다가 도리어 사람들에겐 갚을 것이 있었다. 보내 준 응원에 보답해, 그만한 무대를 보여 주는 일이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난 받기만 하는 성격은 되지 못한다. 물론 로또는 제외다. 그건 다른 일이지. 합당한 내 돈이잖아. 그런고로 제발 좀 돌려줘.

"…이건 차차 해결해 나가자."

모든 건 회사 계약서를 확인한 후에나 가능했다. 본격적인 준비 기간에 대해 고지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방문하기 힘들어질 보금자리를 훑어봤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피식 웃어 보이곤 외출에 대한 짐을 꾸렸다.

* * *

방금 전 택시에서 내린 참이었다. 저당금의 일부를 돌려받아 할 수 있던 행동이다. 주변의 시선만 아니었어도 대중교통을 탔을 텐데. 문제가 생길 걸 방지하자면 이게 옳은 선택이었다.

잘하고 있는 걸까?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단 걸 알고 있었다. 몇 번을 다짐했어도 성격은 어쩔 수 없었다. 몰라, 가 보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소속으로 들어가게 될 '메이터스(MAYtus) 엔터테인먼트'의 사옥 앞이다. 순식간에 끝나 버린 휴식기로 찾아온 계약일이었다.

갈아 치우는 속도가 빠르네. 예전에 들은 일화가 있어 알고 있는 회사다. 남아 있어야 할 흔적이 보이지 않았는데, 거기서 신기하단 마음이 들었다. 자세한 건 하나씩 체크해 보기로 했다.

왠지 사자의 주둥이에 몸을 밀어 넣는 기분인걸. 애써 담담한 척을 하며 건물 입구로 발을 옮겼다. 자동문을 열고 들어가니 깔끔한 인테리어의 로비가 눈에 띈다.

"저기,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신해신' 님 되시죠. 말씀 전달받았습니다. 4층 미팅 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옆에 있던 안내 데스크에 다가간 찰나, 단정한 유니폼 차림의 직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내 소개도 안 했는데, 잘 알고 있었단 기색을 보인다. 너무 철저하잖아. 아직 약속 시간까진 30분가량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사전부터 준비해 놓은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지나 미팅 룸에 도착했다. 크지는 않았지만 갖출 건 다 갖춘 회사로 보인다. 문안으로는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먼저 온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직원분의 노크하에 들어와도 된다는 대답이 떨어진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몇 걸음 떼기가 무서운 순간이다. 등 뒤에선 직원분에 의해 문이 닫혀 버리고, 몸을 돌리니 아는 얼굴이 말을 걸어온다. 아, 얘라면 겁먹을 필요가 없다.

"형, 안녕하세요."

"누군가 했더니, 채민이 너였구나."

들렸던 대답의 주인공은 익숙한 문채민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어 보였는데 텅 빈 디귿 자 테이블이 놓인 방이다. 개중 아무거나 근처의 의자를 끌어 앉으니 앞에 보이는 여백의 공간과 스크린이 인상적이다.

역시 회사는 회사인가. 깔끔한 환경에 이제야 실감이 나는 듯했다. 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문채민이 말해 오는 게 나도 빨리 온 편이었지만 얘는 더 부지런했다. 고등학생이라서 그런가 싶다.

"태오 형도 와 있어요."

"강태오 연습생도? 아니지, 일단 호칭을 못 바꿨네. 그건 둘째 치고 어디 갔는데?"

"잠깐 화장실 간다고 나갔는데… 어, 형 오셨네요."

놀라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돌아보니 사복을 입은 강태오가 여길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인사하는 애로 팀원을 해 본 전적이 있었다지만, 얘랑은 말조차 편하게 하지 않았다. 서로 간의 거리가 먼 관계로 느껴진다. 아, 불편해.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입니다."

"그, 강태오 연습생도요."

"형들, 왜 이렇게 어색해하세요?"

그럴만한 사이니까 그렇지…. 문채민이 없었다면 숨이 막혔을 상황이었다. 우리와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강태오가 착석하는데 그러고 보니까 해당 위치에는 작은 가방이 올라가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짐이 놓여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찰나였다.

그렇게 우리 셋을 기점으로 시간이 흘렀다. 문채민이 입을 열면 둘이 번갈아 가며 대답을 해 주는 구도다. 미묘한 침묵과 간극 속에서 하나둘씩 다른 애들이 등장했다.

세 번째로 온 건 반가운 인물, 이유준이었다. 나와 같이 직원분의 안내하에 미팅 룸에 입실했다. 그래도 나보단 훨씬 여유롭고 안정적인 태도다.

"감사합니다."

"유준아."

"어? 형, 먼저 도착해 있었네요."

"유준이 형, 안녕."

"채민이도 안녕. 다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아직도 20분은 남은 것 같은데… 어, 강태오 너도 와 있었네."

"어, 이유준."

문채민보단 조금 더 능숙한 성격이었다. 덕분인지 분위기가 풀리는 것 같다. 나야 다른 애들보다 얘나 권혜성이 편한 입장이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은 인물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5분 지나고 이번에는 이정원이 등장했다. 얘도 이유준과 비슷하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태도다. 그래도 좀 더 사무적인 느낌이 강하다. 눈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멀쩡한 모습을 보이는 게 얘넨 진짜 떨리지도 않나 보다. 기도 참 세다. 부러워라.

"다들 일찍 왔네? 난 내가 꽤 빨리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태오 형이 제일 먼저 와 있었어요."

"강태오, 넌 도대체 몇 시에 온 거야?"

"그렇게 빨리 온 건 아니야."

"형, 1시간 전에 와 있었다면서요. 데스크 직원분한테 들었는데."

"……."

이유준과 문채민의 대화에 시선을 피하고 있는 강태오였다. 저 기분 뭔지 알지. 트레픽 출신들은 동시에 상대하기 힘든 편이다. 구해 주곤 싶었으나 내 코가 석 자라서. 미안하다, 강태오. 알아서 살아남아라.

모르는 척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부근으로, 갑자기 이정원이 내게 말을 건다. 내 전담은 쟤였나보네. 낯가리는 유형 둘이 다른 타입들에게 괴롭힘당하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이 마음을 착하게 써야 한다는 것 같았다.

"해신이 넌, 잘 지냈어? 오랜만에 본다."

"어, 잘 지냈지. 본가 내려가서 쉬다가 왔어. 정원이 넌?"

"나도 비슷해. 본가 얘기하는 거 보니까 따로 사나 보네. 어쩐지 얼굴이 좀 좋아졌더라."

"그래? 너도 좋아 보인다."

"응, 좀 쉬었거든. 그나저나 아직 안 온 건 둘이지?"

"네, 명이 형이랑 혜성이 형이요."

"꼴찌는 혜성이라는 거에 한 표."

"갑자기 그렇게 가는 거예요? 음, 그러면 저는……."

이야기의 주제가 단박에 뒤집혔다. 아직 오지 않은 인물들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둘 중 누가 더 늦게 오냐는 것으로 차분한 어조였지만, 계약을 코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대단하다 싶은 대화다. 맞다. 얘네 원래 이런 애들이었지.

머쓱함에 주변을 살펴보다 강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저기도 나와 비슷한 심경인 것 같은 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피곤하단 인상이다. 서바이벌 때는 몰랐지만, 마음이 잘 맞을 것 같아. 이 안에선 유일하게 나와 비슷한 성향을 지닌 듯했다. 저런 애가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저는 명이 형이요. 제시간에는 맞춰 올 것 같긴 한데, 한 2분 남기고 들어올 것 같아서요. 혜성이 형도 지각은 안 하지 않아요?"

"혜성이 생각보다 부지런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우리 입소할 때마다 빨리 와 있었어."

"생각보다 부지런하다니. 유준아, 너 좀 너무하다."

"형도 공감하시지 않았어요?"

"아니, 뭐. 그렇긴 한데. 근데 혜성이가 아침잠이 많잖아."

"…형들, 저 다 들었어요."

그때,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불만 어린 입장으로 옆에 직원분이 있는 것은 동일했으나, 들어온 당사자가 뿔이 나 있다.

권혜성, 예상보다 빨리 왔네. 평소처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의 인물이다.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와 조용히 투덜거리는 게 아무래도 밖에서 우리의 대화를 들은 것 같다.

난 마지막에 한마디 얹은 것밖에 없는데. 죄가 있다면 저 셋에게 휘말린 것이다. 시작은 저기 있는 삼인방이 열었다.

"혜성이 형, 안녕하세요. 전 형 말고 명이 형 뽑았어요."

"채민이, 너도 똑같아. 지각'은'이라고 했잖아."

"형, 귀가 좋으시네요."

"혜성아, 일단 앉아. 아직 초면이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