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우리가 무슨 초면이에요. 볼 거 못 볼 거 다 봤잖아요. 그리고 유준이 형이 제일 너무해요. 첫날이니까 얌전히 있기는 하겠는데… 언젠가 갚아 주겠어."
"그래."
"아~ 취소 취소. 저 형은 못 이기겠다."
권혜성이 이유준의 근처에 앉았다. 정해진 약속 시간까진 10분 정도를 남긴 참으로 윤명, 얘 진짜 지각하는 건 아니겠지? 괜히 내가 다 불안해지는 광경이다.
파이널에서 겪었던 경험에 의해 문채민의 말이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진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상이다. 전화라도 해 봐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아닌가, 강태오도 조금은 신경 쓰는 기색이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상황을 파악하던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문이 열리며 당사자인 윤명이 들어온다. 정말 3분을 채 남기지 않은 타이밍이다. 아니, 뭐. 약속은 지켰지만. 윤명 쟤도 진짜 대단하네. 보통 사람의 여유로움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명이 형, 아슬아슬했네요."
"고속도로 공사하더라. 차가 많이 막혔어."
"안녕, 네가 꼴찌야."
"…그거 중요한 거야?"
"어? 음, 아니. 생각해 보니까 그러진 않네. 지각 안 했으면 됐지, 뭐."
조곤조곤한 대화 사이로 강태오의 나직한 한숨이 섞여 나왔다. 쟤네들은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들린 부분이다. 미묘하게 내리깔린 시선으로 앞으로가 걱정스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난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저래 봬도 머리는 똑똑한 애들이었다. 아마도…….
* * *
약속했던 정각이 됨과 동시에 모르는 인물이 들어왔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다. 베이지색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가볍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에 따라 의자에서 일어나 같은 느낌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옆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함께 있다. 저기는 어린 것 같은데. 같이 들어온 이보단 젊은 청년이다. 손에 들린 파일철 속으론 흰색의 서류가 가득 들어 있는 게 오늘 미팅의 무게를 실감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메이터스 엔터테인먼트 실장인 한지헌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예상보단 널널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완벽주의자들의 모임이어서 굳어 있었는데, 이쪽에 한해서는 풀어 주려는 것 같다. 그나저나 실장이라고? 예상 외의 직급에 의문이 든다. 하긴 대표라고 바로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안 했지. 여긴 나름 사연이 있는 엔터테인먼트였으니.
게다가 실무는 윗선 아래 자리에서 진행됐다. 그래, 자고로 높은 사람은 안 마주치는 게 나은 법이다. 차라리 잘됐다며 되는 대로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 희한하게 낯이 익은데? 초면일 텐데도 불구하고 익숙한 게 어디서 봤더라… 고민에 빠진 찰나였다.
"오늘은 아티스트 여러분의 계약을 비롯하여,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자 모셨습니다. 우선 계약서 확인부터 들어가겠습니다. 재민 씨, 부탁할게요."
"네, 안녕하세요. 매니지먼트실의 박재민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계약서 배부해 드리겠습니다. 실례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여기 사람들은 원래 이런가. 어딘지 아주 깍듯한 태도의 직원이다. 한지헌만큼 포멀한 재킷 차림이었는데, 단정한 몸짓으로 전원의 앞에 서류를 내려놔 준다.
스테이플러로 찍힌 종이 뭉치에 잠시 어지러운 것 같았다. 회사에 입사했을 때나 쓰곤 했던 서류로 어딘지 감회가 색다른 것 같았다. 물론 그때는 아티스트 계약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비밀 유지 조항 이런 것도 있으려나. 스태프 일을 할 때면 빠지지 않고 서명했던 구간이다. 예전과 오버랩되는 장면에 글자를 읽어 봤다.
"그 전에 제가 먼저 말씀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장기 해외 출장에 나가 계신 관계로 인사가 조금 늦어지실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 사과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아티스트 여러분께는 양해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너무 FM 아니야? 어떻게 보면 긍정적인 구간이기도 했다. 데뷔를 한다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들이다. 실장을 통해 전달한 걸 넘어서, 이제 연습생 딱지를 벗어난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윗선에서 허물없이 사과한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제멋대로인 대표들이 넘치는 판국에 인성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도리어 제법 좋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뭐지? 내가 소문으로 들었던 정보들과 갭이 큰 것 같다. 뭐, 그 구간도 유추하며 마친 부분이었다.
"계약 기간은 오늘을 기점으로 정확하게 2년 6개월입니다. 저희 메이터스에서 아티스트 여러분을 성심성의껏 케어해 드릴 예정입니다. 자세한 항목은 1페이지부터 10페이지까지에 전부 기재가 되어 있습니다. 서명은 2부씩 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1부는 아티스트분들께서 갖고 계시면 되시고, 나머지 1부는 저희 메이터스에서 보관할 예정입니다."
한지헌의 설명하에 서류를 검토했다. 이거 원, 데뷔보단 입사하는 기분인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회사, 엄청 꼼꼼한 편인 것 같다. 하긴, 회귀 전에도 몇 번 언급됐었다.
헷갈리는 부분은 박재민이 캐치 해 줬다. 단둘만 들어와서 계약의 전반을 맡고 있는 그림으로 오늘은 오리엔테이션 개념의 만남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서명을 끝내자 박재민이 종이 무더기를 거둬들인다. 그리곤 아티스트 보관용은 서류 봉투에 담아 재전달해 주겠다고 말한다.
"장시간 설명에 지루하셨을 텐데, 감사드렸습니다. 그럼 다음으로는 숙소 관련 사항 안내 드리겠습니다."
"숙소요?"
"네, 오늘을 기점으로 하이사인 여러분은 저희 메이터스 소속 아티스트로 입적되셨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숙소 입실이 진행될 예정이며, 본격적인 데뷔 준비는 그 이후부터 들어갑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컨펌 해 주신 일정으로, 모든 사항은 여러분의 사전 동의하에 실행되겠습니다. 혹시 문제 있으실까요?"
"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저, 여쭤볼 게 하나 있는데요."
그때, 펜을 돌리고 있던 문채민이 손을 들었다. 똑 부러진다 싶었는데, 궁금한 건 가감 없이 질문하는 모습이다.
"네, 문채민 씨, 말씀해 주세요."
"대표님은 출장 일정 이후로 만나 뵐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혹시 저희 전담 팀원분들도 그 이후로 인사드리는 걸까요? 매니저님이라든지……."
"네, 잘 질문해 주셨습니다. 데뷔 준비에 들어가는 첫 단계에서 하이사인 여러분의 전담 매니지먼트 팀을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팀원들은 이미 꾸려져 있으며, 전원 모두 프로페셔널한 각 분야 전문가들입니다. 만나 뵐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빠른 시일 내에 인사시켜 드릴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근데 문채민 씨는 궁금해하시는 것 같으니까… 일단 먼저 한 분 말씀드려 볼까요?"
"…네?"
처음으로 느슨하게 웃어 보인 한지헌이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박재민을 바라봤다. 모두의 눈길이 집중된 사이 손을 모아 다소곳하게 허리를 폈다. 꾸벅 숙였다 들어 올린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 속여 먹는 걸 좋아하는 것 같지.
"여기는 매니지먼트실에서 아티스트 매니징 팀에 속해 계시는 박재민 스케줄 매니저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하이사인 여러분의 스케줄 관리를 전담으로 맡을 매니저 박재민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다른 팀원분들을 대표하여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와, 매니저님이셨구나."
박재민의 인사에 문채민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매니지먼트실 소속이라고 하길래, 뭔가를 맡고 있을 줄은 알았다. 하지만 매니저였을 줄이야. 어째 여기는 사람들의 성향이 전부 비슷한 것 같았다. 성실하다 못해 신뢰감이 넘치는 타입들이란 소리다.
너무 잘 풀리는 것 아닌가. 도리어 불안해진다. 어디든 빌런이 하나쯤 있기 마련인데. 지금까지 만난 직원들은 정상인이다 못해 인재처럼 느껴진다. 혹시 대표가……. 아니야, 그게 아닌 건 잘 알고 있잖아. 별 무서운 생각을 다 하고 있다.
"그럼, 아까 전 하다 만 숙소 이야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숙소로 선택한 건물은 ○○역 근처 ○○동에 있는 이곳입니다."
한지헌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리모컨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설치된 빔 프로젝터를 통해 준비한 슬라이드를 보여 주니 하얀 화면 위론 지도와 건물의 사진이 나타난다. 아무래도 저기가 우리의 숙소인 것 같았다.
"메이터스 사옥과의 거리는 차로 10분 정도이며, 모든 이동은 로드 매니저님의 도움하에 이뤄집니다. 실질적으로 먼 거리는 아니어서, 원하실 땐 편하게 방문 가능하십니다. 또한 숙소는 40평형에 방 4개가 있는 고층입니다. 입주일은 여기 적힌 이날로 픽스되었으며, 기타 문의 사항은 편하게 여쭤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 점 있으신가요?"
…아니요, 너무 완벽한 설명입니다. 거리 뷰를 통한 이동 경로와 소요 시간, 입주일을 비롯하여 사용하게 될 공간에 대한 간략한 설명까지. 모든 회사들이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퇴사하는 일이 없을 텐데.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이정원과 이유준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강태오도 한시름 놨다는 듯이 끄덕거린다. 그렇게 길다면 길었던 첫 대면이 끝나 가고 있었다.
* * *
- 그러니까, 해신 학생, 방은 안 빼는데 자주는 못 올 것 같다고?
"네, 그, 어르신 혹시라도 오셨다가 헛걸음하실 것 같으셔서 미리 연락드렸어요. 제가 주기적으로 정리할게요."
- 나야 미리 말해 주면 고맙지. 그나저나 어딜 가 있길래 자주 못 와? 정 그러면 방 빼도 괜찮은데… 내가 해신 학생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정이 좀 있어서요. 그리고 아니에요. 계약 기간도 남아 있는걸요. 종종 들러서 생활은 할 것 같거든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이고,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련히 잘하겠지……. 그럼 일단 그렇게 알고 있을게. 늙은이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예, 문제 있으시면 또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통화를 종료하며 방을 돌아봤다. 가져갈 짐은 캐리어 안에 챙긴 뒤다. 쓰지 않을 것 같은 가구들과 잡동사니를 정리하니 휑해진 공간이 보인다. 생활할 땐 그렇게 좁아 보였는데. 최소한의 물품만 남겨 놓은 자취방이다.
마지막으로 청소를 하며 이곳에 대한 작별 인사를 했다. 당분간은 바빠서 오기 힘들 게 분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