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일단 월세는 자동이체 신청해 놨고, 통장에 있던 돈들도 분배해서 다시 묶어 놨고, 생활비 따로 빼 놨고, 집 정리도 끝. 그럼 진짜 입소만 남은 건가."
오늘은 한지헌에게 설명 들은 숙소 입소 날이었다. 정식 일정은 정오 이후여서 여유가 있었는데, 이런저런 마무리를 하다 보니 출발 시간이 되어 있었다. 환기를 위해 열어 놨던 창문마저 닫고 신발을 신었다. 독방은 무리일 것 같아 많은 짐을 챙기진 않았다. 하지만 평소보다 묵직한 캐리어다.
필수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만 챙겼다. 그래도 프로그램 입소 때와는 많이 다른 기분이다. 캐리어를 들고 계단 위를 올라가니 동네에선 흔히 보기 힘든 차량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제가 늦었나요."
"아니에요. 아직 여유로운 시간입니다. 그럼 출발할까요?"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일전에 인사를 나눴던 박재민이다. 오늘은 평일로, 회사에 출근해야 했는데.
"저 때문에 외근하게 돼서 죄송합니다."
"하하, 아티스트분들 백업하는 게 저희 일인걸요."
내 짐을 뒷좌석에 실어 나르고는 운전석에 착석했다.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는 게, 익숙한 모습이다.
대다수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어 입소에는 무리가 없다고 말했다. 혼자 사는 이유준 역시 자취방을 처분했다며 본가에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덕분에 가족들이 데려다 준다고 이야기해 왔다. 강태오는 지인의 차량을 이용할 예정이라고 덧붙여 왔었지.
모두 이동에는 무리가 없을 일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가용을 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못했다. 그것도 그냥 택시를 타고 가면 되겠다고 생각해서 넘겼던 게 떠오른다. 그런데 대강의 사정을 알아챈 회사에서 제안하듯 물어 왔다. 스케줄 매니저인 박재민의 일정이 비니 픽업을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별것 아닌 걸로 번거롭게 하는 기분이 들어 거절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이런 건 자신들의 몫이라며 강경하게 나와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불편하신 건 없으시죠?"
"네? 네. 전혀 없습니다. 그, 감사드립니다."
"신해신 씨에 대한 말씀은 미리 들었는데, 정말 유하시네요."
"…그런가요?"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치자 낮게 웃어 보이는 사람이다. 29살이라고 들었는데, 깍듯하게 대해 줘 이상한 기분이다.
하긴, 메이터스에서 마주친 모두는 과할 정도로 칼 같은 인물들이었다. 자신보다 11살은 어린 문채민에게도 90도로 인사했다. 덕분에 걔가 당황한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흔한 일은 아닌데, 여러모로 재밌는 사람들이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저희 대표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아, 궁금하실만하시죠. 저희가 외부에 알려진 게 없긴 하죠? 음, 대표님은… 이거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네? 네, 물론이죠."
"하하, 신뢰가 가네요. 거창한 건 아니지만, 서 대표님은 믿으셔도 되시는 분입니다. 현재 팀에서 실무를 제대로 겪어 본 건 아니지만, 준비는 꽤 오래 하고 있었거든요. 시즌 2 참가 서류를 받을 때부터 들어간 프로젝트라서 팀원분들은 모두 파악했는데, 이런 사람들을 모은 걸 보면 대표님은 정말 철두철미하신 분이세요. 일단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네요. 혹시 제가 겁먹게 해 드린 걸까요?"
"…아니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저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어지간히도 일벌레인 모양인데, 긍정적으로 따지면 속 썩을 일은 없을 듯하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별로 마주치고 싶은 타입은 아니다. 상대하기 지칠 것 같아. 난 지금 시스템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입장이다.
"왠지 지금 되게 무서운 분 상상하고 계실 것 같은데, 실물 보시면 조금 놀라실 수도 있겠네요. 저희 대표님 잘 웃으시거든요. 그러니까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네, 그렇군요."
철두철미하다며, 잘 웃는다고? 이 무슨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인가 싶다. 뭔가 조합이 되지 않는 이미지들의 연속으로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거지, 문득 과거에 듣게 된 사실들이 떠올랐다. 스태프였던 탓에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
해당 방송이 방영된 케이블 N.net에는 대형 투자자 기업이 하나 있었다.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영상 및 콘텐츠 제작을 맡고 있는 회사 '엔필름'이다. 영화까지 포함하며 기획 관련된 곳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았다. 판권 배급과 OTT 업계까지 들어가서 돈을 쓸다시피 벌고 있었다.
하지만 방송 쪽에서 유명한 것과 달리, 엔터에는 딱히 관여하지 않았지. 원래도 목적이 아니었는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그런 엔필름에서 소속사를 차렸다. 당신의 아이돌 시즌 1이 시작할 무렵이다. 산하 레이블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는데, 이름이 '레인디(RAIN-D)'였던가……. 초창기라 작게 꾸린 곳이라고 알고 있었다. 푸시 해 준다는 느낌보단 두고 보겠다는 성향이 강했다고 했다. 그런데 방송이 초대박 나며 상상한 규모 이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시즌 1의 걸 그룹은 이 레인디의 소속이 됐다. 원래도 이럴 목적으로 만든 곳이긴 했지만, 기존의 계획과는 조금 다르게 움직인 것 같다. 덕분에 해당 그룹의 팬덤에선 말이 많다고 들었던 게 떠오른다. 실력파 멤버들에 비해 어설픈 구성으로 유명했다고 했던가.
그런 레인디는 걸 그룹의 해체와 동시에 사라졌다. 정확히는 사라졌다기보다 변모해 있었다. 시즌 2의 시리즈 제작이 확정된 이후였다. '메이터스(MAYtus) ent.' 레인디를 뒤집어 엎어 만든 회사다.
메이터스는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이슈가 된 부분이었다. 상호명부터 통으로 교체했다고 말했는데 이건 엔필름이 시즌 1을 기점으로 추세 파악을 완료한 것이다. 이게 된다고 확신한 거였지.
아무튼 이 일은 시즌 3와 4 때 신입들에게까지 전달됐다. 큰일이어서 계속 이어진 소문으로 밥을 먹으면 누군가는 이 얘기를 꺼냈다.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된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시즌 3의 막바지 촬영, 연출 팀의 부원들과 소속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도 메이터스겠지?'
'당연하지, 거기 말고 엔필름이 다른 데 보내려고 들겠어? 심지어 일 잘하잖아.'
'저 같아도 메이터스로 가고 싶을 것 같은데요. 신흥 괴물이라고 불렸잖아요.'
'그래요?'
'아, 해신이 너는 모르겠구나. 메이터스가 원래는 레인디라는 여론 파악용 엔터였거든. 근데 2 때 뒤집었어. 엔필름에서 공격적으로 꾸린 거지. 각 분야 인재들만 모아서 만든 스폐셜 기업 같은 곳이야.'
'지금도 엄청 잘나가지 않나?'
'시즌 2 때 애들 몇 명 흡수했잖아. 보통 해체된 이후에는 자기 소속사로 돌아갈 텐데… 이것도 대표가 힘 좀 썼다는 얘기 돌더라. 물론 당사자들도 거기가 마음에 들었겠지. 물량 공세를 떠나서 케어론 엄청나잖아? 거기 사람들 일하는 거 들어 보면 무슨 로봇 같던데.'
'대기업의 횡포 같은 거예요?'
'하하, 네 입장에선 그렇게 보이려나? 횡포보단 이런저런 머리를 잘 써. 일머리가 좋은 애들의 모임인 거지. 대처도 빠르고, 기획도 훌륭하고…….'
'실적 보면 굉장하던데? 물론 시리즈가 흥행해서 그에 따른 파급력도 크겠지만. 아마 3도 4도 애들 다 거기로 갈 거야. 그리고 가능하면 또 흡수하겠지.'
'아, 맞다. 형! 저 그거 들었는데… 메이터스 요즘 배우 팀도 꾸리고 있다는 거 사실이에요?'
'야~ 너 소식 빠르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르는데, 예전부터 밑 작업 들어가고 있었대. 드라마 팀에 조연출 하는 친구 하나 있는데 걔가 알려 준 거거든.'
'헉, 장난 아니다… 괴물 맞네.'
'내가 아는 후보로만… 김윤원, 이나경, 최인조? 일단 이 셋이던가…….'
'그 셋이요?'
'이나경은 유명하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앞뒤 둘 때문에 그런 거지? 걔네 지금 엄청 괜찮은 작품 들어가기 직전이래. 장은솔 작가 신작이라던데… 그거 미리 알고 메이터스에서 선수친 것 같다더라. 얘네 무조건 뜬다고 체크한 거지. 하여간에 물밑 작업은 엄청 빨라요.'
'선배. 거기 너무 살벌한 것 같은데요.'
'이제 알았어?'
'메이터스 사람들, 저희랑 마주칠 일은 없겠죠?'
'하여간에, 신해신 생각 진짜 많아. 걱정 마세요~ 저희랑 마주칠 일은 전혀 없으니까요~ 나도 얼굴 한번 못 봤어.'
'어? 형도 못 봤어요?'
'희태만 못 본 거 아니야. 나도 못 봤어.'
'지수 누나도요?'
'거기 사람들 공식 석상에서 얼굴 잘 안 보여. 아는 건 소속사 애들이나, 남 PD님, 윤 작가님? 아니면 그 윗선이겠지. 우리도 한때 실물이 존재하냐고 내기했었잖아.'
'맞아, 항간에 소문 엄청 돌았는데… 주가용 고스트 기업 아니냐고까지 말 나왔지?'
어째 여러모로 미스터리 한 회사다. 아무튼 일만큼은 잘하는 곳일테니까. 그래서 초반에도 이 부분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대표라, 이 이상한 사람들의 우두머리란 거지. 기왕이면 오랫동안 마주치지 않길 원했다. 자고로 모든 상사란 만나지 않는 게 좋은 편이다.
난 아이돌 활동만 잘하면 되는데. 그래서 그냥 얌전히 입 다물고 잘 따르기로 했다. 창문 밖으로는 사진으로 확인한 건물이 보였다. 숙소 근처에 도착한 듯하다.
* * *
해신이는 최종 7위에 불리며 하이사인의 멤버가 됐다. 현장에 가지 못해 TV로만 보고 있던 날로 마지막까지 불리지 않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신해신 불러 줘……. 그날만큼은 온갖 신을 다 찾은 것 같았다. 무교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간절한 심경이었다.
다 괜찮다는 듯이 웃으며 다른 연습생들을 달래 주는 최애가 보인다. 바보야, 너부터 챙기라고.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휴지로 찍어 눌렀다.
신해신이 이름이 불렸을 땐 폭발하듯 터져 나온 울음이다. 지나가던 엄마 아들이 당황했을 정도의 오열이었는데 당사자도 울지 않았지만 내가 더 감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 이제 네 사진 찍으러 다닐 수 있는 거야? 화면 속, 미소 짓고 있던 이에게 질문했다.
그렇게 프로그램이 종방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애들 데뷔 언제 기다려. 이름이 불린 건 좋았으나, 오피셜을 기다리는 게 고역이다.
책장 위에 놓여 있는 카메라를 쳐다보니 대면 이벤트 이후론 쓸 일이 없었던 물품이다. 홈마라고 할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지만, 저 애와 멤버들이라면 열심히 촬영을 다닐 생각이 있었다. 계정도 다 팠고, 지인들도 하나둘 만들어 가던 과정이다. 난 진즉 준비가 끝나 있었다는 뜻이다.
"제발 빨리 나와. 내 카메라에 곰팡이 피겠어."
오늘도 허망하게 인터넷을 뒤적이던 하루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과거의 기억을 재탕하는 것뿐이었다.
데뷔 멤버가 확정된 이후 SNS의 온갖 토픽은 유어돌로 잠식되어 있었다. 그만큼 화제가 되기도 했던 서바이벌이다. 자극적인 건 있었지만, 타사에 비하면 클린한 게 한몫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