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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117화 (117/328)

117화

"…어차피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거요."

어쩌다 보니 휩쓸려 너도 나도 제비를 뽑아 들었다. 끝에는 뭔가 검은 글씨로 적혀 있었는데, 자신의 것을 확인하느라 바빠 보인다.

독방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 그 와중에 모든 멤버가 힘들 것 같아 포기한 상태였다. 얘도 쟤도 다 힘들다. 그냥 독방에 가고 싶어.

내가 들고 있는 제비의 끝에는 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같은 걸 가진 사람과 룸메이트인 모양이다. 1번이라니, 누구지? 그나마 무탈한 애이길 바랐다. 사실 후보군으론 이렇다 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다들 개성이 너무 강한 편이다.

"그럼 공개할까? 난 1번인데, 같은 거 갖고 있는 사람?"

…안 돼. 권혜성을 피했더니, 이정원을 마주쳤다. 쟤는 일 처리가 빨라서 좋았지만, 그걸 떠나 좀 선이 있는 인물이다.

"1번 누구예요? 전 아닌데?"

"어, …나야."

"뭐야, 해신이 너였어? 너라면 환영이지."

"안 돼! 해신이 형, 절 버리지 마세요……!"

"일단 내가 버린 건 아닌데."

"미안하다. 혜성아, 해신인 내가 챙겼어. 그러니까 포기해."

"……."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웃고는 있었지만 난처한 상황이다. 잠버릇을 떠나, 대하기가 힘든 성격의 이정원으로 낙첨됐다. 차라리 이유준을 붙여 달라며 차선을 원했다.

해탈에 가까운 상태로 앉아 있으니, 그런 나를 본 이정원이 웃는다. 얘, 내가 피하고 있는 거 다 아는 것 같지. 척 봐도 어딘지 성격이 좋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지, 성격이 나쁘다기보단 좀 꼬인 구석이 있다고 해야 하나. 강하다고 말하면 되는 걸까. 먼 산을 바라보자 저들끼리 맞춰 보는 애들이다. 난 이미 망했으니 뭐든 상관없는 뉘앙스였다.

"어? 유준이 형, 3번이야? 나랑 같은 방인데……."

"채민이 너는 익숙하지. 잘됐네."

이유준은 문채민과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됐다. 트레픽 애들은 전부터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은 게 그러면 남은 사람들이…….

"뭐야? 태오 형이랑 명이 형이랑 혜성이 형 셋 중 하나가 독방이고, 둘은 룸메이트야?"

"저 방 재밌겠다."

강태오가 너무 불쌍하다. 조용히 입을 틀어막으니 모두의 시선이 한 명에게 쏠려 있다. 쟤가 독방이 아니라면 극단적인 성향의 방이 만들어지는 거다. 그에 이정원도 흥미진진하단 얼굴을 보인다.

"미안한데, 내가 독방이거든."

저 혼자 살 길 찾아 나갔구나.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제비 끝을 보인 강태오였다. 끝에는 별표가 그려져 있었는데, 저건 혼자 방을 사용한단 뜻이었다. 그래서 안색이 멀쩡했던 거군. 무언가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면 가장 먼저 질려 있었을 인물이었으니, 운도 좋게 잘 빠져나간 것 같았다. 어? 그렇다는 건…….

"…다시 하면 안 되는 거야?"

"뭐야, 명이 너, 너무해."

"채민아, 방 바꿔 줘."

"명이 형, 거절할게요. 전 결과에 수긍하는 사람이라서요."

"…치사해."

"문채민 너도 그렇고 다들 나에 대한 취급이 너무한 것 같은데?"

"…제일 너무한 건 권혜성, 네 잠버릇이야."

윤명과 권혜성이 최종 룸메이트로 확정됐다. 동갑 둘이 들어갔는데, 저기도 반대 스타일의 사람들이었다. 특이한 걸론 빠지지 않았으나, 다사다난한 일상이 예측됐다. 저런 걸 보면 이정원이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쟤는 다리 치울 일이 없겠지.

"저 방 재밌네. 뭐, 우리도 만만치 않긴 하지. 해신아, 앞으로 잘 부탁해."

취소하겠다. 얘도 똑같아 보여. 차라리 다리를 치우겠다. 윤명, 권혜성 내놔. 어째 방 하나를 정했을 뿐인데, 많은 걸 한 기분이었다. 간신히 룸메이트 정하기가 끝이 났으나, 이거 하나로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의문이 든다.

현타가 왔지만, 진행은 이정원이 해 줬기에 아무 말 하지 않고 따랐다. 이제는 짐을 챙겨 방으로 들아가면 되나 싶었다. 그런데 다른 안건이 나타났다. 조용히 지켜보던 윤명이 손을 들어 질문한 것이다.

"우리 지금 다들 뒤죽박죽 말하고 있지 않나? 나, 강태오 형… 이랑도 이야기 많이 안 해 봐서……."

"……."

윤명의 부름에 움찔 몸을 떤 강태오다. 그러고 보니 저 둘은 계속 같은 숙소를 썼으면서 그렇게 친한 관계가 아니었나 보다. 형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어색한 기운이었는데, 이건 한마디로 호칭 좀 정리하고 들어가잔 소리였다.

따지고 보면 이런 건 초장에 끝내 둬야 한다. 나만 해도 강태오와는 존댓말을 구사하고 있었다. 우리 중 제일 낯가리는 건 쟤인 것 같았는데 과묵한 척했지만, 비슷한 과란 걸 눈치채고 있었다. 카메라가 없어서 그랬는지 조명받는 것에 당황스러워한다. 탈 인간처럼 생겨서 참 친숙한 성격이었다. 물론 아주 마음에 든다. 성격이.

"그래. 나도 그 생각 했어. 명아, 말 잘 꺼냈다. 일단 여기서 가장 맏형은 나랑 해신이인가."

"우리 둘이 22살이니까. 난 반말해도 괜찮은데, 정원이 넌 어때? 애들 존댓말 계속 시키긴 불편할 것 같잖아."

"나도 찬성해. 얘들아, 그냥 우리한테 반말해."

"어? 진짜요?"

"흐음, 해신이 형한테 반말이라~ 존댓말 한 지 너무 오래돼서 잘 안나올 것 같은데요?"

이정원과 나의 결정에 이유준 그리고 권혜성이 놀랐다는 듯이 쳐다봤다. 생각해 보니까 저 둘은 오랜 시간 존댓말을 고수하고 있었다. 장난은 툭툭 치는 애들이 이런 건 예의 차린다.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은데? 떨떠름하게 웃자 이유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능숙한 걸론 탁월한 애답게 가장 먼저 말을 놨다.

"그럼 나야 편하지. 해신이 형, 나 반말한다?"

"그래."

허락은 해 줬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다. 뺨을 긁적거리니 권혜성도 신나게 외쳐 왔다.

"그럼 나도 할래! 정원이 형, 해신이 형~~~"

"난 옛날부터 했는데."

"아, 그러고 보니까 형, 명이랑은 언제 말 놓은 거야? 알고 지낸 건 내가 훨씬 오래됐는데."

"…물어보니까 바로 허락해 주던데."

"채민이 너도 그냥 반말해. 매번 존댓말 하기도 힘들잖아."

"그래도 괜찮아요?"

"4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뭘."

이정원의 쿨함에 문채민이 놀랐다는 듯이 눈을 떴다. 하긴 쟤는 가장 어려서 모두에게 존칭을 쓰고 있었다. 앞으로 같이 지내야 할 텐데, 편하게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다른 애들이야 얼추 아는 사이라 치고, 문제는 쟤인데.

나와 이정원이 동시에 한 명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혼자만 딴청을 부리고 있던 강태오다. 우리 둘 다 얘와는 긴 인연이 없는 편이다. 팀을 한 것과 별개로, 미묘한 벽이 존재하는 사이지.

여기랑도 말은 터야 할 텐데. 다들 반말하는데 한 명만 거리를 두는 건 이상한 그림이다. 물론 이정원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강태오 연습생… 이라고 하기도 애매하죠? 그, 반말할래요?"

"그래, 태오야. 너도 반말해라. 특히 너랑 해신이 둘 엄청 어색해 보여. 하는 행동은 비슷하면서."

"정원아, 뒤에 말은 안 해도 돼."

"그래. 반말할게. 그, 형도 반말해."

"네? 어, 그래."

"우와, 보기만 해도 숨막힌다."

"낯가림 vs 낯가림인가."

그 와중에 눈은 절대로 마주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 앉아 다른 곳을 바라본 채 말을 놨다. 숨 막혀. 아직은 이름을 부를 자신이 없는 게 이건 천천히 시도해 보자며 주제를 돌렸다. 그렇게 나와 이정원은 정해진 찰나였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다 반말하는 게 어때? 강태오, 네 의견은."

"유준이 형, 화끈하다."

"형들도 한다고 했는데, 우리라고 존댓말받을 순 없지."

"어? 그럼 내가 제일 좋은데. 어리니까 이득이네."

"난 찬성."

"명이 형, 형보단 태오 형이 찬성해야 하는 거 아니야?"

20살로 동갑인 이유준과 강태오로 우리가 상관없다고 못 박아 버리니 저기도 그냥 말을 놓자는 식으로 전개됐다. 그걸 환영하는 건 어린 축에 속하는 십 대 3명이었다. 복잡하게 가느니, 시원하게 해치우는 게 나아 보인다.

빠른 진행에 휩쓸린 강태오가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휘말린 기색이 강했지만, 본인도 공감하고 있었나 보다.

쟨 저래도 빛이 나네. 예전부터 느낀 점인데 신기한 수준의 미모다. 스탯 수치로는 A+ 정도이지만, 주관적으로 봤을 땐 더 높은 것도 가능해 보인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나. 아니면 취향이 아니었나. 그런 거 탈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파이널 이후론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상태 창이었다. 고정된 홀로그램을 향해 넌지시 질문해 봤지만, 대답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래, 기왕이면 당장의 평화를 즐기자.

"마음대로 해."

"와~ 태오 형~"

"…태오 형?"

"붙지 마. 둘 다 왜 그러는데."

근처에 앉아 있던 권혜성과 윤명으로 강태오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양옆을 차지한다. 전자는 정말로 신이 나서 붙은 것 같았고, 후자는 강태오의 반응이 재밌던 듯하다. 윤명이 질색하는 강태오에게 몸을 기댔는데 덩치도 큰 게 치대니 기겁하는 안색을 보였다.

윤명, 쟤도 진짜 희한한 성격이란 말이야. 어쩐지 동갑내기 둘이 묶여 있으면 힘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뭐, 당장은 강태오가 맡고 있으니 상관없다. 나만 아니면 돼. 그와 동시에 마지막으로 문채민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나 그냥 다 반말한다? 혜성이 형이랑 명이 형 반응 보니까 안 물어봐도 될 것 같아서."

"막내야, 의견 정도는 구해 주지 않을래?"

"혜성이 형, 나랑 1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

"아~ 문채민도 이기기 힘들다니까. 아니 트레픽 출신들은 다 왜 그래? 유준이 형도 그러고 둘 다 똑같아."

"하하, 그럼 우리 할 건 끝난 거지? 이제 방 가서 정리할까?"

거실 한편에 놓여 있는 캐리어를 바라봤다. 얼른 저것만 챙겨서 방에 들어가고 싶다.

"태오, 넌 되게 힘들어 보인다?"

"이 둘만 떨어져도 안 그럴 것 같은데. 권혜성, 윤명, 존댓말 시키기 전에 떨어져."

"에이, 냉정한 형이야, 정말."

"음, 이제 재미없네. 나도 방 가야겠다."

강태오의 단호한 행동 이후로 각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 옆 가장 작은 방은 독방으로 강태오 몫이 됐는데 나머지 3개는 비슷한 사이즈였으나 위치가 달라 고민이 된다. 부엌을 정면으로 가장 안쪽에 1개, 화장실 옆으로 1개, 현관 옆 강태오의 방과 마주한 곳에 1개가 있다.

어떻게 정해야 할지 고민하며 서 있던 찰나, 연장자 팀인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선뜻 반말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라고들 한다.

"넌 잠귀 밝아? 그러면 현관 쪽은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 그렇게 밝진 않아. 그래서 상관없어. 네가 좋은 곳으로 고를래?"

"그럼 우리 저기 쓰자."

이정원의 손짓에 따라 우린 화장실 옆의 방을 사용하게 됐다. 다음으론 이유준과 문채민이 고르게 됐는데 어딜 쓸진 훤히 알 것 같았다.

"아, 맞다. 유준이 형 잘 깨지."

"어, 나 좀 예민해서."

"맞아. 형 귀마개 안 끼면 못 자던데. 윤명, 우리가 현관 앞에 쓸래?"

"응, 난 잘 자서 상관없어."

"형~ 나랑 명이가 현관 앞 쓸게. 형네가 제일 안쪽 써."

"그럼 고맙지. 나랑 채민이가 저 방 쓸게."

예민한 성정의 이유준이 모두의 배려를 받아 가장 안쪽 방을 쓰게 됐다. 프로그램 내 숙소에서도 자주 잠을 설쳤는데, 여기선 적응하려나 의문이 든다. 뭐, 룸메이트가 문채민이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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