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121화 (121/328)

121화

"…해신이 형이랑 유준이 형, 아까부터 둘이 치사하게 자꾸 속닥거릴 거야? 나 진짜 삐진다?"

"네, 네. 권혜성 어린이. 진짜 별거 아니어서 그랬어. 해신이 형 잘 못자는 것 같길래 내가 이런저런 방법 좀 알려 준 거야. 형은 걱정할까 봐 숨긴 거고. 이제 됐지?"

"진짜? 그거였어? 에이, 뭐야."

머리 위로 뒷짐을 진 권혜성이 다시 발랄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이유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술술 하는 인물이긴 했다. 하지만 저건 내가 창피해할까 봐 둘러대는 거였다. …빚을 져버렸네.

고마운 마음에 등 뒤를 툭 쳐 주곤 그대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니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 *

"안녕하세요. 하이사인 데뷔 프로젝트의 전체 총괄을 맡은 A&R 팀 팀장 윤재희입니다. 다시 한번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긴 저희 팀원분들이며, 조은송 씨, 이상훈 씨, 심평화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이사인 여러분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와, 드디어 만나 뵙게 됐네요. 오늘을 위해 정말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답니다. 잘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까 전보단 조금 작은 장소였는데, 그래도 그렇게 갑갑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깔끔한 인테리어와 11자 모양으로 배치된 책상이 인상적이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맞은편의 사람들이 인사해 왔다. 역시 전담 스태프가 더 있었어.

오랜 시간 준비했는지 두툼한 서류가 놓여 있었다. 측면에는 스크린이 내려온 단상이 보이는데 그 앞으로 윤재희가 서류를 들고 서 있다. 그의 뒤로는 지켜보는 자세의 한지헌까지 존재했다. 정말 대표란 사람 빼고 다 본 기분이다.

"그럼 데뷔 프로젝트 'Realize HISIGN'에 대해 소개해 보겠습니다."

불이 꺼지며 빔 프로젝터에서 빛이 나왔다. 화면 위론 프레젠테이션이 비치는 게 깔끔한 템플릿의 보고서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아이돌 그룹 세계관과 컨셉이란 것 같지.

"'Realize HISIGN' 첫 데뷔 메인 컨셉으로 제안하는 것은 바로 '자각'입니다. 아티스트 여러분께선 프로그램을 통해 도전하고 역경을 이겨 내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자신에 대한 가치 그리고 믿음과 용기를 자각하는 이 과정이 그룹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아성찰'을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에서 밀었던 캐치프라이즈 '도약'과 함께 연결할 계획입니다. 'Realize, 스스로 자각하고 실현하여 도약하는 모습.' 이게 바로 주된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보여 주기 위해 결정한 세계관이 바로 이것입니다."

윤재희가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템플릿이 등장했다. 까만 밤하늘 위로 빛나는 별자리 사진이 올라가 있었다. 이건 생방송에서 그룹명을 공개했을 때 보여 준 것과 흡사한 느낌이다.

이 사람들 거기서부터 연계하고 있었던 건가. 시청자들은 모르고 있을 대형 스포일러라고 확신했다. 꼼꼼하다 못해 치밀한 수준의 기획에 혀를 차고 싶어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기획하고 있었던 거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래서 시즌 2와 후속 그룹이 성공했던 거였구나.

"세계관의 시작은 별자리를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저희는 은유적인 방법을 통해 멤버 7인 7색의 빛남을 보여 드릴 예정입니다. 그 소스로는……."

"어? 놀이동산이다."

"맞습니다. 한밤중의 놀이동산입니다. 암흑 속 불이 꺼진 놀이 기구 7개는 하이사인 여러분을 뜻합니다. 자신에 대한 깨우침을 끝내고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불이 들어온 놀이 기구로 표현할 예정입니다. 최종 데뷔곡 앨범 컨셉은 'dreamlike'로 픽스되었습니다."

"해당 컨셉에 부합되는 후보로는 3곡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평화 씨, 부탁드립니다."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번 데뷔 앨범 타이틀 곡에 대한 셀렉팅을 도와드릴 심평화라고 합니다. 저희는 하이사인 여러분들을 기다리면서 모티브와 부합한 곡을 수급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엄중한 심사를 거쳐, 최종 후보군으로 올라간 것이 바로 이 3곡입니다."

'Realize HISIGN' - dreamlike Title list

[ Light ]

[ hopeful ]

[ Night (한밤의 동화) ]

"최종 픽스는 아티스트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 아직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수급만 체킹 했을 뿐이라, 부담 갖지 마시고 좋은 의견 있으시면 편히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은 둘 중 한 곡은 수록 겸 커플링 곡으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싱글 앨범일 가능성이 높아 그 점 먼저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곡부터 들어 보시겠습니다."

빠른 진행이 눈에 띄는 회사답지 않게 여기선 선택을 보류한 기운이 감지됐다. 직접 멤버들을 만나 보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볼 속셈 같았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일 처리만큼은 꼼꼼한 사람들이다. 이 부분을 제외하곤 모든 게 준비되어 있다는 기색이 강하다.

"팝 댄스곡에 신스 베이스인가."

이정원은 바로 곡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듣자마자 알아챈 게 역시 음악적 조예가 깊은 애였다. 첫 곡부터 멜로디컬 한 게 여름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컨셉은 매니악한 구석이 있었으나, 노래 자체는 호불호가 강하지 않은 미디엄 템포의 팝 댄스곡이다.

"음, 난 두 번째도 좋은데? 여기도 팝 댄스지?"

"어, 분위기로 봐선 전부 그쪽 계열인 것 같아. 그런데 여긴 첫 번째보다 베이스 라인이 좀 빠르다."

"밤보단 낮 느낌이 나는 것 같은데. 안무 들어가긴 좋을 것 같아."

두 번째 곡까지 확인하던 과정으로 간단한 정보가 적힌 서류를 넘기며 애들과 의견을 나눴다. A&R 팀과 한지헌은 그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빛들이 매서운 게 성향을 확인하고, 피드백을 기재하는 것 같다. 전문가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이 노래는 아까보단 템포가 빠른 듯하다. 이정원이 언뜻 업 템포곡이라 말하는 게 들렸다.

"그럼, 마지막 'Night(한밤의 동화)' 들려드리겠습니다."

시작은 오르골 베이스의 느린 멜로디였다. 한밤의 동화라더니, 잘 어울리네. 인트로가 아련하게 시작됐다면, 후반부는 몽환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어느 순간 끊기며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신디사이저가 중첩됐는데 드럼으로 들리는 베이스와 느리지 않은 비트가 적당한 텐션을 유지한다. 싸비로 들어간 중독성 강한 훅과 귀에 들리는 멜로디가 좋은 시너지를 느끼게 해 줬다. 은은하게 청량한 기운도 맴돌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초여름 밤 같은 조합이다.

"여기도 팝 댄스곡인데, 어쿠스틱 악기를 같이 사용했어."

"정원이 형, 분석 엄청 빠르다."

"귀에 들려서. 난 사운드가 풍성해서 좋은데? 그렇게 느린 템포는 아닌데, 분위기가 잘 맞아 보이는걸."

"나도 첫 번째 아니면 여기에 한 표."

"무거운 느낌은 아니지? 솔직히 우리 세계관이랑 여기가 제일 잘 맞는 것 같아."

"어? 나도 그 생각 했는데……! 후보곡 제목 리스트 보자마자 와, 저거 잘 맞네~ 싶었지."

"다들 비슷한 의견인 것 같은데?"

"그럼 이렇게 후보 3곡을 전부 들어 보셨습니다. 반응으로 보아하니 만족하신 것 같아 기쁘네요."

아웃트로가 종료됨과 동시에 심평화가 말을 이었다. 빔 프로젝터로 인해 어두컴컴하던 방 안에 빛이 들고, 눈을 돌리니 윤재희가 무언가를 기재하고 있다.

"아티스트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교차 검열을 통해 최종 결정될 예정인데, 혹시 기타 의견이 있으실까요?"

"아니요. 다 듣고 계셨던 것 같아서 크게는 없습니다. 혹시 저희가 말한 게 수렴되는 건지만 알 수 있을까요?"

"네, A&R 팀과 대표님이 픽스 미팅에 들어갈 예정인데, 방금 나누셨던 이야기가 큰 부분으로 적용될 것 같습니다. 최종 타이틀이 확정된 이후에는 마케팅 팀과 아티스트 전담 케어 팀이 협업하여 확고한 이미지 메이킹 작업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전까지 추가 피드백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솔직히 전 셋 다 마음에 들었어요. 첫 번째는 멜로디컬 한 게 좋았고, 두 번째는 퍼포먼스적으로 유쾌할 느낌이었거든요. 세 번째는 세계관과 컨셉에 대한 적중률이 높아서 만족스럽네요."

"혜성이 형, 피드백이 정확하네."

"뭐야, 채민이 너 이제 형이 좀 존경스러워?"

"왜 그렇게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응."

"저도 혜성이 의견에 공감했어요. 세 곡 모두 장점이 확실한 노래라 좋았습니다."

"그럼, 이상으로 데뷔 프로젝트 첫 번째 미팅을 마무리 지어 보겠습니다. 긴 시간 들어 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남은 일정은 저희보단 한 실장님께서 전달 사항이 있다고 하셔서 그걸 들어 주시면 되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2차 미팅 때 다시 봬요."

"윤 팀장님을 비롯하여 세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A&R 팀은 업무 복귀해 주시고, 하이사인 여러분은 잠시 기다려 주세요."

"네."

눈짓으로 인사하며 정리를 하고 자리를 뜨는 A&R 팀 4인방이다. 언제 있었냐는 듯 깔끔한 뒷마무리로 스크린 위에는 아까의 첫 화면이 게시되어 있었다. 'Realize HISIGN.' 몇 번이고 입안에서 굴리던 우리의 처음이다.

* * *

잠깐의 재정비 시간을 가진 뒤 다시 모인 자리다. 윤재희가 비운 단상에 한지헌이 위치한다.

"오늘 미팅은 어떻게, 괜찮으셨나요? A&R 팀이 설명드린 것처럼 오늘은 전초전 정도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수급된 곡의 경우 대표님과의 미팅을 통해 정확한 방향이 정해질 예정입니다. 대표님께서 오늘 밤에 입국하셔서 늦어도 이틀 안에는 최종 결론이 나올 것 같습니다."

"대표님이요?"

"네, 일을 마무리하시는 데 문제가 있어서 좀 늦어졌습니다. 사실 제가 대표님 옆에 있어야 했는데, 기타 일정 때문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인사드릴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팔짱을 끼며 말하는 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대표라… 드디어 얼굴을 볼 수 있는 건가?

사실 별로 안 보고 싶다. 알고 있는 정보를 취합했을 땐 만만치 않은 사람이란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일 잘하는 사람들을 수하에 두고, 자신은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나이부터 성별까지 정체에 대한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안 그래도 이런 저런 신경쓸 일이 많았다. 그런데 저기까지 피곤하면 답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저기를 만나야 하는 건 피할 수 없을 것 같지. 그래서 되는 대로 최대한 무탈히 지나가 버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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