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125화 (125/328)

125화

들어오자마자 이상훈이 갖고 있던 물품부터 정리했다. 나머지 팀원들도 미팅 준비를 하는 데 정신없어 보인다.

"주 팀장님네는 아직 안 오셨나 보네요."

"네, 마케팅은 주 팀장님과 은경 씨만 들어오기로 해서 금방 올 것 같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주세라와 처음 보는 단발머리의 여성이 함께 나타났다. 여기는 서류철과 노트북을 들고 있었는데 시원한 미소가 위풍당당한 집단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아, 주 팀장님 오셨군요. 자리는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그럼 은경 씨, 사전 세팅 부탁해요."

"네, 팀장님!"

익숙하게 노트북을 연결하는 여성을 지켜봤다. 주세라 직속 부하였는지 목에 걸린 사원증이 달랑거린다. 이은경… 여기도 나중에 소개해 주려나. 절도 넘치는 행동을 구경하다 팀장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팔짱을 낀 주세라가 윤재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당신의 아이돌 때와 달리 여기서부턴 '0'에 가까운 지식을 갖고 있었다. 험난한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귀는 열되 입은 다물고 살아야겠지. 원래 생존법은 조금 치사한 법이다.

"대표님은 아직 안 오셨나 봐요? 전 우리가 제일 마지막일 줄 알았거든요."

"네. 아까 통화하러 내려가시는 건 본 것 같은데……."

"아, 그럼 저 내리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던데, 1층에서 올라오고 계신가 보네요. 하여간에, 대표님은 왜 대표실 놔두고 매번 나가서 통화하시는 걸까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 특이하신 분이잖아요."

여기 대표는 뭐 하는 사람일까. 주세라와 윤재희가 대표를 편한 뉘앙스로 지칭하는데도, 익숙하다는 듯이 구는 한지헌이었다. …FM들이 아니었나? 가장 윗선의 상사를 대하는 것치곤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은 찰나였다. 업무만 칼이고, 이런 건 아주 프렌들리 한 회사인가. 여러모로 파도 파도 신기한 기업으로 나야 상식적이고 일만 잘한다면 뭐든 상관없다.

똑똑- 다시 한번 들리는 노크 소리에 벌컥 미팅 룸의 문이 열렸다. 한지헌이 문을 열어 주러 가기도 전인데 성격이 어지간히도 급한 사람 같다.

"늦어서 미안해요. 통화가 좀 길어졌거든요."

"대표님, 오셨습니까."

"예, 역시 다들 먼저 올라와 있었네요. 어쩐지 안 보더이더라니… 저 A&R이랑 마케팅 들렀다가 왔는데 좀 봐줄래요? 나름 데리러 간 거였거든요."

"안녕하세요."

"주 팀장님은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들어오신 지 며칠 됐는데, 뵙기가 힘드네요."

"이래 봬도 대표라서요. 할 게 많더라고요."

저 남자는 분명… 얼굴은 처음 봤지만, 그 사람이다. 1층 로비에서 외국어로 통화하던 남자. 루즈한 봄 니트 차림에 흰 얼굴이 도드라지는 인상이다. 입고 있는 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이목구비로 도대체 몇 살인지 가늠이 가질 않는다. 겉으로 봐선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말하는 어조에선 연륜이 느껴진다. 어라? 이상한데? 다시 한번 생각해도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이었다. 내 촉이 또 정답을 맞힌 듯하다. …이런 거 하나도 안 반갑다니까.

"대표님, 일단 인사부터 하심이……."

"아, 다들 놀랐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매번 자리를 비운 대표였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소란을 피워 버렸네요."

미스터리 하다고 생각한 사람답게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적어 보인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로퍼를 신은 게 누가 봐도 자유분방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우리 대표라는 거지. 소매를 걷어붙인 채 손에 들고 있던 텀블러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나야 1층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어 그나마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있었다. 하지만 초면인 다른 멤버들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특히 권혜성, 쟤는 입에 파리라도 들어갈 것 같다. 어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여러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기는 저희 메이터스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이사직을 맡고 계신 서도경 대표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메이터스의 서도경이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일로 계속 약속을 깨던 사람이었는데, 뒤늦게 얼굴을 비쳐서 죄송합니다. 올해 한국 나이로는 서른여섯이 됐습니다. 대표치곤 젊긴 하지만, 다른 엔터에도 제 또래분들이 계시다고 들었으니 불가능한 연령은 아니겠네요. 아무튼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이사인 여러분."

유들유들하게 구는 게 제 인상과 잘 어울리는 성격을 지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여긴 나이에 맞지 않는 동안들이 많아 보인다. 커리어 하이란 소식은 들었지만, 실력 좋은 경영자인 건 확실했나 보다. 아까 영어로 대화하던 어투만 봐도 여간내기는 아닌 듯했지. 희태 선배가 잘 몰랐던 이유는 해외파여서 그랬던 거구나. 이제야 예전에 들은 무성한 소문들이 이해됐다. 국내에 없었으니, 팩트를 논하기 힘든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신해신 씨는 이번이 두 번째네요. 잠깐 사이긴 했지만요. 엘리베이터 같이 타고 올라갈까 했는데,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다음 걸로 탔습니다."

"아, 네."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며 응대하니, 문채민이 속삭이듯 질문해 온다. 마치 저 사람은 또 어디서 만났냐는 듯한 뉘앙스다.

"…두 번째라니, 형 대표님 만난 적 있어?"

"만났다고 하기도 뭐해. 화장실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로비에서 통화하시는 걸 봤어. 그냥 여기 직원분인 줄 알고 지나왔는데 몰랐지, 대표님이실 줄이야."

서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나눈 대화였다.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생판 남이란 소리다. 유도리가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사람이라고 돌려 표현했다. 문채민 얘라면 전부 알아들었을 것이다.

"형도 의외로 이런저런 일에 잘 엮이네."

"…어째 그렇게 기쁘진 않은걸."

가장 상석에 앉아 턱을 괸 채 우리를 둘러보던 서도경이었다. 가볍게 미소 짓고는 그대로 입을 열었다.

"자, 서두는 여기까지로 하고, 이제 본미팅에 들어가 볼까요?"

"네. 그럼 하이사인 데뷔 프로젝트 2차 미팅 시작해 보겠습니다."

* * *

"먼저 언급드렸던 것처럼 하이사인 여러분은 싱글 앨범으로 출격하게 되었습니다. 하이사인 1st 싱글 앨범명은 'dreamlike'입니다. 후보 세 곡 중 한 곡은 타이틀로, 나머지 둘 중 한 곡은 커플링곡으로 확정됐습니다. 그럼 여러분께 최종 임원진 미팅 결과물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윤재희의 주도하에 이어진 프레젠테이션이다. 어둑한 미팅 룸 안에서 밝게 비쳐 오는 화면을 지켜보니 이전처럼 깔끔하고 보기 좋은 템플릿이다. 슬쩍 눈을 돌리자 집중하고 있는 대표가 목격됐다.

…일단 저긴 무시하고, 본론부터 확인하자. 리모컨을 누르기가 무섭게 전환된 장면이었다. 거기엔 궁금하던 최종 데뷔곡이 적혀 있었다.

프로젝트 'Realize HISIGN'

1st Single album 'dreamlike'

Title [ Night (한밤의 동화) ]

Coupling [ Light ]

"최종 타이틀은 'Night (한밤의 동화)'로 확정됐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신진 작곡가의 새로운 색깔이 보여지는 음악으로, 계획하고 있는 하이사인의 이미지와 부합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처음 대중들 앞에 나선다는 포부에 맞춰 시너지 효과도 적지 않겠단 판단하에 나온 선택입니다. 커플링곡으로는 비슷한 모토를 이어 가고 있으며, 호불호가 강하지 않을 'Light'를 배치했습니다. 남은 후보곡인 'hopeful'은 추후 앨범의 수록곡 내지, 타이틀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결국은 저 노래였다. 드디어 모든 호기심이 해결되는 것 같았다. 놀이동산 소재를 꺼낼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된 타이틀이다. 분위기가 잘 맞는다고 확신했는데, 임원진도 같은 마음이었던 듯했다. 확실히 신비롭고, 몽환적인 계열이었지. 오디션 프로그램의 캐치프라이즈와도 잘 맞고, 메이터스에서 기획한 계획들과도 어울린다.

"완연한 여름이 아닌, 7월로 잡아서 잘 어울리기도 하죠. 신진 작곡가라 모험하는 경향도 있기는 하지만 저희 쪽에선 그걸 메리트로 봤습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인물에 대한 호기심은 대중들에게도 먹힐 구간이니까요. 그렇죠, 윤 팀장님?"

"네, 그렇습니다."

한 손으로 펜을 돌리고 있던 서도경이었다. 팔짱을 끼며 등을 기댄 게 퍽 마음에 든다는 얼굴이다.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윤재희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전과 달리 세부 사항을 파고드는 게 빠른 진행을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여기에 맞춰 하이사인 여러분의 포지션 및 기획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이걸 봐 주시죠."

[HISIGN 1st Single album 'dreamlike' 기획]

'Night (한밤의 동화)'

센터: 윤명(19)

→ 프로그램 1위 데뷔에 대한 연계

→ 타이틀과의 연관성

→ 올라운더의 육각형 멤버

→ 그룹의 특색을 보여 줄 최적의 성향

다시 한번 넘어간 페이지에는 우리도 잘 아는 사람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윤명?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인물을 바라봤는데 리액션이 크지 않은 애답게 덤덤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만 저러지, 속은 제법 놀란 모양이다. 미묘하게 벌어진 입에서 감정을 캐치 할 수 있었다. 요 며칠 같이 지냈다고 나름 파악이 된 듯하다.

"어? 나다."

"네, 맞습니다. 첫 번째 앨범 타이틀곡의 센터는 윤명 씨입니다. 당신의 아이돌에서 1위로 데뷔했다는 상징성과 동시에 그룹의 특색을 보여 줄 수 있는 최적의 멤버라고 판명했습니다. 이번 타이틀곡과의 연관성으로도 빼 놓을 수 없어 보입니다. 분위기와 어우러져 전체적인 무게중심을 잡아 주기엔 윤명 씨를 베스트로 꼽아 봤습니다. 또한 올라운더 성향이 강한 육각형 멤버라는 게 특색으로 도드라진 구간입니다."

"맞습니다. 보통 론칭 그룹 첫 공개 멤버는 그룹의 성향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인물을 선정하곤 하죠. 포지션이 도드라지는 스타일도 좋지만, 전체적인 밸런스가 육각형에 가까운 멤버를 오픈하곤 합니다. 저희 메이터스도 그 루트를 타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윤재희의 설명 뒤론 서도경이 첨언을 붙었다. 여기 사람들은 지나치게 꼼꼼한 면이 있었다. 어떤 의미로 채택됐을지 알 것 같아 공감하는 구간으로 그건 모두 같았는지 애들은 덤덤해 보인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이 곡에는 명이가 부합하다고 봅니다."

"저도요. 이 노래랑 명이는 분위기가 잘 맞잖아요?"

"확실히 명이 형은 밸런스가 좋으니까요. 중심에서 잡아 준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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