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126화 (126/328)

126화

"좋아요. 만족스럽네요. 그럼, 윤 팀장님 다음 순서 진행해 주세요."

"예, 대표님. 저희는 이번 앨범을 통해 하이사인 여러분의 포지션을 보다 공고히 다져 보고자 했습니다. 실무진을 비롯하여 전 임원진이 프로그램 진행 과정을 분석해 본바, 이런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HISIGN 포지션 시안]

이정원(22) - 메인 보컬

신해신(22) - 리드 보컬 1 / 리더

윤명(19) - 리드 보컬 2

권혜성(19) - 메인 댄서

강태오(20) - 리드 댄서

문채민(18) - 래퍼

이유준(20) - 래퍼

드러난 표에 입가를 매만졌다. 메인 보컬에는 이정원이 가겠다는 확신이 있어 제외했지만, 그 뒤가 예상 밖이다. 내가 리드 보컬 1을 받았을 줄은 몰랐는데. 윤명이 채택될 줄 알았기 때문에 신기해했다. 쟤는 올라운더 성향을 제외하고도 기본기가 탄탄한 인물이었다. 뒤늦게 스탯을 올리긴 했다지만, 메이터스에서 초반부 방송을 놓쳤을 리도 없고.

혹시 윤명이 첫 번째 타이틀의 센터로 뽑혀 나를 올려 준 건가. 그렇다면 사실 내 입장에선 좋을 일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애들은 제법 만족한 것 같았다.

"리드 포지션의 신해신 씨, 윤명 씨, 강태오 씨 세 분은 사실 리드가 아닌 메인을 다셔도 충분할 실력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보다 확고하게 포지션을 나눠, 수월한 파트 분배를 하고자 이렇게 확정 지었습니다. 올라운더 성향이 강하다고 판독되어, 밸런스로는 탄탄하단 추이를 나타냅니다."

"래퍼의 문채민 씨와 이유준 씨는 곡의 성향에 따라 메인을 유동적으로 결정할 예정입니다. 두 분의 스타일이 확고하신 만큼, 넓은 스펙트럼의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넘기는 프레젠테이션의 페이지가 그리 적지 않아 보인다. 아무래도 우리에 대해 오랜 시간 연구하고 분석한 결과물 같았다.

뒤에 이어지는 프로모션 설명까지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는데 그렇게 얼마를 지켜봤을까, 윤재희와 주세라가 바통 터치를 한다. 보좌로 보이는 직원이 들고 있는 서류 뭉치가 두꺼워 보인다. 여기도 짧진 않겠는걸.

복잡해 보이는 구성의 아이템들이 소개된다. 컨셉부터 모티브 구성까지 오랜 시간을 쏟아부은 것 같은 게, 예시로 보여 주는 가이드까지 세심하게 소개해 줬다.

대표는 전체적인 흐름에 맞춰 무언가를 계속 체크하고 있었다. 적어도 회사 일로는 골머리 썩일 일이 드물 것 같다.

"그럼 이상으로, 마케팅실의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긴 시간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지헌이 타이밍에 맞춰 형광등을 켰다. 밝아진 공간에 눈을 찌푸리기가 무섭게 진지한 자세로 말을 잇는 대표다.

"전체적인 틀은 이런 느낌입니다. 앞으로도 세부 사항을 잡고 나가겠지만, 방향 정도는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첫 대면이었는데, 마음에 드셨는지는 모르겠네요."

느슨하게 들어오던 아까와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유들유들하게 굴었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는 게 역시 대표는 대표인가 보다.

"자, 그럼 오늘 아티스트 미팅은 여기까지인 걸로 해 볼까요? 한 실장님은 다음 일정 체크 들어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한 직원들의 모습에서 마무리가 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제 긴장 풀어도 괜찮겠지, 안도하기가 무섭게 멀지 않은 곳에서 대화가 들려온다. 이런…….

"명아, 무겁지 않아?"

"응. 여기 좀 엄청나네."

…권혜성, 윤명. 다 들리잖아. 입을 틀어막기엔 쟤들과 내 자리가 너무 떨어져 있었다. 자기들끼리는 나름 작은 목소리라며 조절한 것 같았는데 그래도 고요하던 공간에선 들릴 만한 볼륨이다. 차라리 모두 나가고 난 뒤에 말하든가. 팀장급까지 자리하고 있는 와중에 어처구니 없는 멘트를 내뱉었다.

놀란 마음에 눈을 돌리니 강태오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는다. 이유준은 뭐가 그리 웃긴지 제 입을 가린 채 낮게 웃고 있었다. 괜히 리더 한다고 했나. 순식간에 좌중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윤재희와 주세라는 서로를 바라보곤 어깨를 으쓱거리기 바쁘다.

"엄청나면 다행이네요."

서류철과 텀블러를 들어 올린 서도경이었다. 미팅실을 나가려고 했는지 몸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표정 자체는 나빠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제법 재미있다는 양 웃고 있었다.

분명 꽤 상식적으로 진행된 회의였다. 그런데 이 꼴을 보고서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걸음을 이동하다니, 저 사람은 어딘가 상식적이지 못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가볍게 까딱이곤 방을 나서는 모습에서 여기에 정상인은 나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천재들은 어딘가 맛이 갔다는 게 정답이었어. 뭐, 결론은 좋아 보이니까. 최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 보기로 했다.

* * *

"어? 백 쌤!"

"안녕, 얘들아. 오랜만이다. 야, 너흰 어쩜 이렇게 그대로야?"

"멘토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정원이 넌, 언제적 멘토님을 말하는 거야. 안 그런 척하면서 되게 딱딱하다니까. 그냥 혜성이처럼 백 쌤이라고 불러."

처음으로 들어온 안무 연습실이었다. 각자 편안한 차림새로 발을 들인 찰나, 알고 있던 얼굴 하나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다.

백승준……? 저 사람은 당신의 아이돌에서 멘토로 활약했던 안무가 중 한명이다. 채찍들 사이에서 몇 안 되는 당근으로 뇌리에 강하게 남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백승준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의아해하다가도 인사하며 주변을 살피니 A&R 팀의 이상훈이 함께 서 있다.

"어? 너희 아직 모르는구나. 윤 팀장님한테 말 못 들었어?"

"안 그래도 그거 설명드리려고 제가 함께 동행했습니다. 여긴 잘 아시겠지만, 케이팝 코래오그래피 전문 백승준 안무가님이십니다. 이번 하이사인 여러분의 타이틀 'Night(한밤의 동화)' 안무를 맡아 주셨습니다."

"백 선생님이 저희 안무 하시는 거예요?"

"…명아, 백 선생님 하니까 내가 늙은 것 같잖아. 나 아직 한창 때인데."

"그런가요?"

센터인 윤명을 상대하느라 지친 낯을 지은 백승준이었다. 파이널에선 서계현의 안무를 하느라 접점이 적은 멘토이기도 했지.

조용히 강태오와 문채민의 근처로 물러서는데 이유준은 이정원처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까, 혜성이랑 명이는 열외로 치고. 태오 넌, 왜 이야기에 안 껴? 파이널 백승준 안무가님이 주신 거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저기 낄 엄두는 안 나서. 형이 봐도 그렇잖아."

강태오가 고갯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이유준과 이정원을 상대하면서 권혜성과 윤명의 등쌀에 치이고 있는 백승준이었다. 맞아, 저 사람은 단호한 면이 있던 서계현과 달리 이리저리 휩쓸리는 성향이 강했지. 저런, 나 같아도 별로 끼고 싶진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여기가 안전 구역이다.

* * *

"우와, 쌤, 안무 장난 아니에요!"

"어때, 끝내주지? 서 대표님, 무서운 분이라고 들어서, 우리 애들이랑, 고생, 좀 했지."

"숨 먼저 고르시고 말씀하세요."

몸판에 윤명의 이름을 붙인 백승준이 헐떡였다. 어느 순간 들어온 산하 크루의 댄서들이 함께 춤을 추는데, 7인 모두 담당하는 멤버의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나는 그중 내 이름표를 붙이고 있는 사람을 지켜봤다. 이게 데뷔곡 안무라고? 복잡한 동선 변경과 예쁜 멜로디에 비해 쉼 없는 동작의 연계였다. 서바이벌에서 했던 노래보다 어려운 느낌이 드는 연출인데.

하긴 멘토인 백승준부터가 제법 힘들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댄서들도 허리를 펴거나 몸을 굽혀 가며 호흡을 정리하고 있는 게…….

망했다. 댄스 스탯부터 올려 놓을걸. 가장 먼저 느낀 소감은 이거였다. 파이널에서 떨어질 줄 알고 모든 코인을 탈탈 쏟아부었던 과거가 떠오른다.

확실한 효과를 받기 위해 스탯보단 아이템에 치중한 마지막이었는데. 일회성인 걸 생각해 보니 당장 한 치 앞이 막막한 듯하다.

B+… 다른 구간에 비하면 등한시했던 존재라고도 볼 수 있었다. 버그 때문에라 스탯을 올리려면 죽자 사자 연습해야 할 입장이다.

5,000코인, 까짓것 벌어 보지 뭐. 하지만 이전에 바짝 해 놓을걸 하는 후회는 어쩔 수 없다.

"원, 투, 쓰리 앤 포! 유준이 넌 오른발 더 뻗고. 파이브, 식스 앤 세븐 거기서 텐션 줘서, 에잇!"

"해신아 균형 잡아라~ 22살밖에 안 먹었으면서 관절에 힘 좀 줘 봐. 어떻게 된 게 30대인 나보다 기운이 없냐."

"하하!"

비틀거리는 몸에, 이를 악물곤 자세를 바로 잡았다. 들키지 않은 줄 알았는데 콕 집어 낸 백승준에 의해 고개가 떨궈진다. 민망함에 눈가를 가리니 사방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첫 안무 연습이라 유한 분위기를 이어 가려는 건 알겠지만 말이야. 그 소재로 내가 사용된 건 반갑지 않다. 내 성격을 아는 탓이겠지.

내 파트를 해 준 댄서의 도움하에 하나둘씩 동작을 갖춰 나가고 있었다. 여기서 돋보이는 건 단연 댄서 포지션을 지닌 둘이었다. 권혜성과 강태오, 쟤네는 배운 지 2시간 만에 어지간한 동작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쟤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서바이벌이 끝나면 안 써도 될 줄 알았던 잔머리로, 왠지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느낌은 아니다.

"혜성아, 저기 너희 형들 좀 어떻게 해 봐. 신해신, 이유준, 너흰 혜성이랑 그렇게 어울려 다녔으면서 어째 둘 체력이 제일 별로인 것 같아."

"혜성이랑 비교하는 건 잘못된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리고 쟤가 저희 셋 중에 제일 어리잖아요."

백승준의 장난에 지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요……. 스마일 어게인인지 뭔지가 오늘도 효력을 발휘하는 상황이다. 평범한 우리가 권혜성의 체력을 쫓아갈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에 공감한 이유준 역시 팔로 땀을 훔쳐 내며 내 편을 들어 줬다.

"에이, 유준이 형은 나랑 한 살 차이 나면서. 해신이 형이야, 뭐… 연장자 우대?"

"참 고맙네. 그런데 혜성아, 네 옆 좀 돌아볼래."

"어?"

덤덤하게 말을 잇는 나에게 의문을 표한 권혜성이었다. 그것도 이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이정원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네 입으로 번 매는 스스로 해결해라.

"권혜성, 그건 해신이랑 동갑인 나한테도 하는 말로 들린다?"

"…맞다. 정원이 형도 있었지. 사과드리겠습니다."

"쟤, 나랑 정원이한테 구는 태도가 너무 다르지 않아?"

땀을 훔치며 이야기하자 다시 한번 터진 웃음보다. 옷자락을 털며 몸을 일으키니 자세를 재정비한 백승준이 음악을 틀었다. 이건 농담은 여기까지니, 본격적인 안무에 들어가자는 의미로 보였다.

"처음부터 가 본다! 웃음끼 싹 빼고, 명이 너 센터에서 무게중심 잡고! 다들 정신 차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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