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이내 어둠이 사라지고 환한 빛이 쏟아졌다. 해신아, 잘하자. 누구보다 떨리는 심정으로 깊게 빠져들었다.
마침 다른 쪽 복도였는지 스크린 위로 애들이 하나 둘씩 등장했다. 아까 전에 본 VCR과 비슷한 세팅에, 신발을 신고 있단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조명 너머로 멤버들이 발을 움직이니 가장 앞에 선 것은 권혜성이었다. 아, 이건 타이틀이 아닌 커플링곡인 모양이다.
"악, 혜성아!"
"얘들아! 기다렸어!"
쏟아지는 함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현장이었다. 타이틀과 비슷한 결이지만 조금 더 빠른 템포의 인트로가 진행된다.
언밸런스한 반팔 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워커를 신은 권혜성이 활짝 웃었다. 그 뒤 대각선으론 그토록 기다렸던 해신이가 얼굴을 들었다. 'Light.' 본격적인 첫 무대의 시작이다.
대형을 잡은 멤버들 사이로 빛줄기가 쏟아졌다. 미디엄 템포지만 산뜻한 느낌이 맴도는 곡이다. 인트로에 맞춰 고개를 까딱인 권혜성이 씨익 미소 짓는다. 중복되는 악기가 풍부한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 Light 저 밝은 햇살 아래
빛보다 더 반짝이는 너
한여름 너와의 순간
시선이 마주치면 pop
온 세상이 어지러워
- 내겐 필요한 게 하나뿐이야
지금을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Light only you
배경 스크린으론 흰색의 이펙트가 나오는 중이었다. 부드럽지만 연계가 격한 동작이 이어졌고, 마지막 구절에선 관객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마나 연습을 한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딱 맞아떨어지는 박자와 안정적인 보컬이 감탄스러웠다. 해신이와 정원이가 사운드를 받쳐 주는 듯한 게, 오묘한 화음이 깔려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맑은 미성과 허스키하지만 시원한 톤을 지닌 두 사람이다. 중간 밸런스의 윤명이 서브를 자처해 오며 꽉 찬 음원을 자랑했다.
퍼포먼스에 특출난 강태오와 센터인 권혜성, 거기에 반대 계열이지만 합이 좋은 래퍼 문채민과 이유준까지. 수록곡일 텐데도 보이는 무대는 타이틀에 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너와 있다면 소나기가 내려도
온 세상이 환해져
네가 좋아 Like u
해신이의 파트가 나오면서 바뀐 대형이다. 가장 앞에서 박자를 타며 무릎을 들어 올렸다. 자연스레 흔들리는 움직임에 팔랑거리는 그물 니트 차림이었다. 속이 투명하게 비쳐 와서 받쳐 입은 민소매와 동작이 잘 보인다.
"악! 해신아!"
말로는 긴장했다고 하면서도 능숙한 태도의 해신이었다. 얼핏 여기를 돌아본 것 같았는데 싱긋 웃으며 몸을 물린다.
맑게 핀 얼굴에, 시선이 자동으로 쫓아갔다. 뒤에 있던 이정원과 바통 터치를 하며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안무였다.
- 빛보다 더 반짝이고
햇살보다 투명한
Light to Light
"아악, 정원아! 네가 내 여름이고 사계절이다!"
이번에 난리가 난 건 김희진이었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셔터를 누르기 바빠 보인다. 반팔 위로 시스루 니트를 걸친 이정원이었는데 걸치고 있던 실버 액세서리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깔끔하게 올라가는 고음과 신인으로 볼 수 없는 여유로운 태도가 그저 놀랍다.
- 우리 사이의 커다란 증표
너라는 존재는 너무나 커서
함께 있으면 온 세상이 밝아져
선명한 지표로 영원히 남아 줘
정확한 딕션에 안정적인 호흡이 장점인 문채민과 낮은 목소리로 곡을 지탱해 주는 저음의 래퍼 이유준이 등장했다. 연계되는 구절에 이어 같은 손동작으로 하나의 춤을 추는 중이다.
문채민과 작게 하이 파이브 한 이유준이 아련한 느낌으로 손을 흘렸다. 그렇게 양쪽으로 갈라지는 두 명의 가운데에서 권혜성이 나타났다. 곡의 끝부분에 다다랐는지 웅장하던 사운드가 잦아들고 있었다. 너무 좋으면 어지럽다는 게 무슨 이야긴지 알 것 같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은 공연이었는데, 벌써 내 목은 맛이 가 있었다.
- Light 넌 내게 한 줄기 빛이야
한여름 태양보다 눈부신 존재
Light Light You are my Light
센터에 선 권혜성이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곤 해맑게 웃었다. 댄스 브레이크에선 강태오와 합을 맞춰 춤을 추는데 격한 안무에 숨이 찼는지 가슴팍이 오르내린다. 거기서 더블링을 깔아 준 묵직한 목소리가 강태오의 존재감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서 있던 멤버들이 다른 곳을 바라보다 정면을 응시했다. 제각기 뉘앙스는 달랐지만 미소 짓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윤명의 근처에 서 있던 해신이가 살풋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눈이 빛나고 있는 게, 저건 즐겁다는 감정으로 보였다. 완전히 멈춘 음악을 끝으로 사방에선 환호성이 쏟아졌다. 나 역시도 질 수 없겠다며 최선을 다해 셔터를 누르고 응원해 줬다.
* * *
"MC 투입됩니다!"
"사운드 체크하고, 세팅 들어갈 준비 해 주세요!"
"여기 메이크업 팀 좀 와 주세요!"
정신이 쏙 빠질 것 같은 게, 무사히 첫 무대를 끝내고 들어온 무렵이었다. 백스테이지에 발을 디디자 오늘 MC를 맡아 준 탤런트가 지나간다. 여길 돌아보며 엄지를 치켜세우는데 감사한 마음으로 인사했다.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진행을 시작했는지 벽을 타고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몇 걸음 떼기도 직전에 사방에서 달라붙은 스태프들이었다.
각자 의상을 재정비해 주며, 땀을 식히는 등 바쁜 환경이다. 손을 뻗어 오는 김윤하에게 다리를 벌려 몸을 숙여 줬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키친타월이 이마에 붙는다. 손에는 작은 핸드 선풍기까지 들려 있었다.
"중간 텀 어느 정도 되나요? 혜빈 씨, 여기 유준 씨 베이스 좀 잡아 줘."
"헤어 팀, 태오 씨 앞머리 스프레이 좀 뿌려 주세요!"
분주한 분위기 속에서 주변을 돌아보다 문채민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도 조금은 숨이 찬지 헐떡이고 있는 애였다.
괜찮냐는 의미로 입을 뻐끔거리니 그걸 발견하곤 씨익 시원하게 웃어 보인다. 엄지까지 치켜든 게 아주 멀쩡하단 뜻 같았다.
주변을 돌아보다 모두와 다시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마에 붙은 티슈를 빼내곤 옆에 있던 스태프에게 선풍기를 돌려주며 다른 애들을 기다렸다.
눈앞에는 본격적으로 카운트되기 시작한 상태 창이 떠올랐다. 왠지 긴장을 풀어선 안 될 환경처럼 느껴진다.
실패하면, 무슨 일이든 패널티를 받아야 한다는 거였지. 아픈 건 둘째 치고 데뷔 쇼케이스부터 논란을 만들 순 없었다. 이를 악물며 상태 창을 살펴봤다.
[무대 퀄리티]
현재: 48.7% (count…….)
어떤 기준으로 측정되는 루틴인지는 알지 못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저 쇼케이스가 끝날 때까지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오늘 선보일 무대는 두 개. 그중 하나로 48.7%를 채웠다. 대충 두 배로 산정해 보니 아슬아슬하게 실패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기준점이 98%라면 마지막에 선보일 타이틀에서 50% 가까이 얻어 내야 한다는 뜻이잖아.
가능할까? 일단 걱정이 앞섰지만 다급한 호출에 정신을 차렸다.
"하이사인, 무대 올라가 주세요!"
"얘들아, 가자."
스태프의 말에 다른 애들에게 손짓하며 다시 무대 위로 걸어 나갔다. 줄지어서 이동하니 어둡던 뒤와 달리 아주 밝은 공간이었다. 순간 눈이 부셔 턱을 내리자 그 너머론 엄청난 관객들과 함성이 우릴 반긴다.
아까 전에도 올라온 곳이었는데,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퍼포먼스에 집중하여 제대로 보지 못한 팬들이 목격됐다. 제각기 플래카드와 슬로건을 들고 있는 풍경으로 이젠 조금 익숙해졌는지, 손을 흔들며 정해진 대형에 위치했다.
"자, 그럼 오늘의 주인공 하이사인 여러분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하나, 둘!"
"Star sign on stage!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입니다!"
기합을 넣어 우렁차게 외친 인사였다. 허리를 깊이 숙이고 다시 몸을 들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기자 쇼케이스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럼 하이사인 여러분, 한 분씩 우리 하이눈분들께 인사드려 볼까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하이사인에서 보컬이자 리더를 맡고 있는, 해신입니다."
사전에 MC와 말을 맞춘 대로 내가 먼저 나서 진행했다. 하겠다고 고집했던 포지션이니 책임지고 잘해야 한다.
리허설에서 맞춘 대로 고개를 돌려 다른 차례에게 신호를 줬다. 리더가 흔들리면 그룹이 흔들릴 테니, 어깨가 무겁게 느껴지는 자리이다.
…괜히 한다고 했나? 아니야, 이게 아니면 저 애들을 컨트롤할 명분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하이눈. 하이사인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정원입니다. 다들 보고 싶었어요."
"정원아! 나도 보고 싶었어!"
이정원의 말을 끝으로 다음 순서에게 눈짓을 했다. 그건 재밌다는 얼굴로 여길 보고 있는 이유준이었다. 어련히 잘하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강하다.
"하하, 정원이 형이 너무 임팩트를 남겨 버려서 제 인사는 묻히겠는데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하이사인에서 래퍼를 맡고 있는 유준입니다."
오늘도 예의 그 어딘가 음습한 기운이 담긴 웃음이었다. 천천히 손을 흔드는데 그에 맞춰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긴, 이유준의 팬들은 얘의 이런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자신의 장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애다웠다.
그렇게 다음 타자인 강태오가 마이크를 들었다. 여긴 벌써부터 술렁거리는 게, 강태오의 외모에 넋이 나간 듯하다.
"안녕하세요, 하이눈. 이렇게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하이사인의 태오입니다. 인사드릴 수 있어서 너무 반가워요. 다들 잘 지내셨죠?"
강태오의 멘트를 듣고 있다가 그만 깜짝 놀라 바라봤다. 그리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었는데 최선을 다해 이야기하고 리액션 한다.
모두 나와 비슷한 눈빛으로 쟤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유준과 윤명은 이 사안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둘만 재밌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게 강태오는 저기에게 많이 시달렸던 모양이다.
하긴, 얘도 결국은 아이돌이 꿈이었던 사람이지. 큰 탈 없이 잘 해내니 제법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강태오 잘생겼다!"
정적을 뚫고 한 팬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거기에 맞춰 다른 팬들의 웃음이 크게 쏟아졌다. 오늘 데뷔 쇼케이스를 기점으로 강태오에겐 새로운 이미지가 생길 것 같았다. 의외의 웃수저 같은? 뭐가 됐든 긍정적인 방향이다.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에서 댄서이자, 형들에겐 없는 상큼 발랄을 맡고 있는 혜성입니다! 모두 만나서 반가워요~"
팔을 뻗어 거침없이 인사하는 권혜성이었다. 관객석에선 귀엽다는 멘트가 이어지는데, 역시 자신의 장점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멤버다웠다.
원래도 저런 면이 있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유쾌하고 해맑았다. 이내 옆자리의 윤명을 향해 어깨동무하며 차례를 넘겼다.
"음,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윤명입니다.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밥은 다들 먹었나요?"
"명아!"
"응! 먹고 왔어!"
윤명의 인사를 끝으로 미소를 띤 문채민이 입을 열었다. 막내답지 않게 여유롭고 어른스러운 태도였다.
문채민이야 걱정할 게 전혀 없지. 너무 편애 같아 보이나? 하지만 그간의 행실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하이사인에서 래퍼를 맡고 있으며, 진짜 막내인 채민입니다."
"채민아!"
마무리인 탓에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였는지, 위트 넘치는 인사말을 내뱉은 문채민이었다. 모두의 성격을 알고 있던 터라 일부러 이랬다는 걸 눈치챘다. 사방에서 터지는 웃음소리에 MC가 다음 진행을 이어 갔다. 때마침 스태프가 카트를 밀며 들어오는 걸 목격했다.